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9화 (9/93)

<9화>

자일스를 따르던 부하들이 아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도부는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조차 두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철저히 제3자의 시선으로 본 자일스에 대해 보고받고 싶어 했다.

사실상 그 작전은 도망자들이 아닌 자일스를 위한 작전이었다. 그가 과연 살려 둘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인지 알아보기 위한 모의실험.

“보고서들은 빠짐없이 올라간 것 같네. 내게도 소식이 들려온 걸 보면 말이야. 문제는 자네를 지켜보러 갔던 요원들이…….”

해링턴은 ‘감시’라는 말을 꺼내지 않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네를 혁명군의 충실한 장교로 보기보다는 지주 혈통을 가진 벨담 사람으로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야. 보고서의 내용은 객관적이었지만, 자네에게 그리 호의적인 어조로 쓰이지는 않았어. 게다가 자네가 총을 사용하지 않은 사소한 내용 하나가 아주 좋은 꼬투리가 되었지.”

한마디로 자일스는 의심받고 있었다. 그들이 의심하는 것도 납득할 만했다. 실제로 자일스는 셀레스트를 직접 죽이지 못했으니까. 그건 자살이었다. 의혹이 합당함을 넘어서서 그것이 진실이었다.

혁명군 내에는 자일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자일스는 그들이 죽이지 못한 벨담인이었다. 그 사실이 혁명군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잔인한 작전이 짜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편함의 근원을 제거해도 될지 재검토하려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온전히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곧 청문회가 열릴 거야, 자일스.”

해링턴은 그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 혁명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입스윈의 투쟁은 끝을 보였지만 자일스에게는 아직 한참 남은 과제였다.

혈통은 그가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 것이다. 평생을 의심받고 질문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결백함을 검증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자네에게 여러 질문들을 할 거야.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납득시켜야 하네, 자일스. 나는 자네가 그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자넬 잃고 싶지 않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일스. 혁명이 마무리를 지어 가고 있어. 그 말은 더 이상 귀족들을 잡아넣는 것만으로는 충성심을 입증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야. 그 이상을 보여 줘야 자네가 살아남을 수 있어. 아무리 충실한 사냥개라도 주인이 사냥을 나가지 않게 되면 갈 곳이 없어지는 법이지 않나.”

“그들이 제게 기회를 주리라 믿으십니까?”

“자네의 가치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과연 그럴까. 어차피 자일스는 단두대에 오를 죄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운명이었다. 사소한 잘못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를 없애는 데에 활용하고 싶어 할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피로가 몰려왔다. 물론 자일스는 살아남고 싶었다. 하지만…… 셀레스트의 죽음 이후로 그를 쌓아 올렸던 것들이 일부 무너졌다. 생존에 대한 집착까지도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얻게 된 내일 하루의 목숨이 얼마나 오래 갈까.

해링턴은 그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말을 꺼냈다.

“자네에게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른 이들이 다 그렇듯이. 그럼 그것 하나에 집중하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식사가 나왔다. 식당 직원이 쟁반을 들고 나타나 자일스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자일스는 말없이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었다. 붉은 핏물이 흰 접시 위로 배어 나왔다.

차마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

해링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자일스는 혁명 지도부에서 그를 위한 청문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사방에서 수 쌍의 눈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굳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군인으로서의 예민한 감각이 가르쳐 주는 사실이었다. 필시 그들은 청문회를 앞두고 그가 사라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

이런 시기에 릴리가 머물고 있는 버려진 저택을 들락거리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수시로 미행이 붙었다. 자칫하다간 릴리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솔즈부르의 저택에 잠시 발길을 끊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릴리는 그의 도움을 받기 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자일스는 릴리를 믿기로 했다.

길어야 며칠 안에 청문회가 열리리라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지도부는 오래 뜸을 들였다. 며칠이 어느새 몇 주 단위로 넘어갔다.

자일스는 밤마다 릴리에 대한 생각을 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끼우고 녹음된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그러곤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릴리 벨모어를 사랑하게 되었나?

처음에는 오직 그녀의 음악이 좋았었다. 그 아름다운 음악을 그가 구해 냈다는 게 좋았고, 더 나아가서는 릴리를 죽이지 않았다는 그의 선택 자체가 어쩐지 그를 기쁘게 했었다.

그러나 감정의 축은 점점 음악이 아닌 릴리에게로 옮겨 갔다. 릴리의 몸에 살이 붙고 혈색이 도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면 자연히 따라 미소 짓게 되었다. 자일스는 릴리가 건강해지기를,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게 된 건 자일스의 세계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가 믿던 가치관. 당연히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믿음. 앞날에 대한 희망. 그 모든 것들을 자일스는 한순간에 잃었다.

그리고…… 마치 솔즈부르의 저택처럼 약탈당해 텅 비어 버린 그의 세계에 남은 단 한 사람이 바로 릴리였다. 자일스의 마음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인 릴리는 점점 제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곧 릴리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자일스는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 혁명 지도부의 명령이라는 핑계를 앞세워서 수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인 살인자…….

너무 오랜 세월을 그리 살아왔던 탓에, 그의 머릿속은 피와 비명 소리로 점철되어 버렸다. 아마 그가 살아남더라도 남은 여생을 망령들의 목소리에 시달리며 악몽에 떨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것들을 모두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게 릴리였다.

릴리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만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지?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곧 열릴 청문회에서 그는 참관자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진실은 그가 누이, 셀레스트 헤센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셀레스트는 자살했고, 자일스는 임무에 실패했다. 혁명을 위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혁명보다는 자기 자신과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더욱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자일스는 진실을 말해야만 했다. 그 쪽이 죄를 짓지 않는 방향이었다. 그는 이미 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지켜 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정작 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를 달리게 했던 생존에 대한 열망마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예전과 같지 않은가?

청문회 당일, 그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혁명 지도부 인사들 앞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자일스는 여전히 외지인처럼 동떨어져 보였다.

수많은 눈들이 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자일스 또한 그럴 생각이었다.

더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어.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해.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만 했어…….

의장 역할을 맡은 남자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자일스 헤센 대위, 그대가 이끌었던 마인헤바흐 작전의 성패에 대해 여러 의견이 갈리고 있음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직접 진술하시오.”

오른쪽에 앉은 해링턴 장군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네에게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진실을 말해.

편한 죽음을 맞을지, 혹은 오래 고통받으며 살다 죽을지…… 네가 직접 선택해.

자일스는 어깨를 펴고 의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실’을 말했다.

“제가 직접 셀레스트 헤센을 죽였습니다.”

작은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

어느덧 솔즈부르의 사유지 전역에 낙엽이 깔렸다. 나무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모두 잠에 들었다. 쓸쓸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낙엽들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점차 몰아붙였다. 곧 있으면 그것들마저도 모습을 감출 것이다.

릴리가 저택에서 오래 버티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문이 깨져 외풍이 들이닥치고 한기가 매섭게 저택을 장악할 텐데, 악기 케이스 안에 웅크려 잠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를 도시로 데려가야만 했다. 그러는 편이 릴리에게도 좋았다. 신분에 대한 문제는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이미 출생 신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입스윈 사람들이 전역에 깔려 있었다. 릴리도 겉으로만 보면 그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자일스가 거기에 손을 좀 쓰기만 한다면 이전에 가졌던 불온한 신분 같은 건 쉽게 벗어던질 수 있으리라.

자일스는 자동차에서 내려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넓은 건물이었지만, 릴리가 있을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악기 보관소를 고집했다.

자일스는 항상 오르던 계단을 오르고, 이전과 같은 코너를 돌아 저택을 가로질렀다. 문틈 사이로 버려진 피아노가 보였다.

“릴리?”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자고 있는 건가? 자일스는 굳게 닫힌 보관소 문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었냐는 것처럼 마른 먼지만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자일스가 외쳤다.

“릴리!”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