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화 (8/93)

<8화>

예상치 못한 부탁이 들어오자 당황한 자일스는 피아노와 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아노를 마지막으로 만져 본 건 변성기가 채 오기도 전이었을 때다. 제대로 연주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그는 결국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린 시절 배웠던 연주곡들은 대부분 기억 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소나티네 연습곡 정도는 더듬거리며 칠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건반을 눌렀다. 선율이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뉘른베르크 소나티네는 기본적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간단한 연습곡이었다.

어릴 적 연주했던 연습곡. 악보에 새겨진 음표 하나하나를 더듬어 기억해 내는 것은 곧 그가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한 옛 시절을 다시 더듬어 돌아가는 과정을 동반했다.

자일스는 더 이상 버려진 폐가의 텅 빈 방에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환청처럼 겹쳐 들렸다.

못 하겠어. 그가 결국 건반에서 손을 떼려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의 곁에 앉았다. 릴리였다. 릴리가 오른손을 뻗어 건반을 눌렀다. 그녀의 선율이 자일스를 지도 교사처럼 이끌었다. 자일스는 릴리의 가이드에 맞추어 다시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함께 연주하던 그는 어느새 행복하던 그 시절의 낯익은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일스가 옆을 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행복한 아가씨가 있었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슴이 탔다. 또한 동시에 뜨거워졌다. 가늘고 얇은 선율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자일스는 이끌림에 못 이겨 천천히, 릴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가 입을 맞춘 순간, 환상을 자아내던 선율이 사라졌다. 사위가 정적으로 고요했다. 자일스는 환상과 현실의 차가운 경계 속에서 번쩍 깨어났다.

“아, 미안하군.”

다급히 그녀에게서 물러난 자일스가 괜스레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이걸 어쩌면 좋지. 방금 그는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절대로 그런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닌데.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러나 자일스가 다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릴리가 벌어진 간격을 다시 좁혀 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을 맞추었다. 서툴지만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자일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릴리는 자일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온 여자였다. 자일스를 안에서부터 조금씩 파괴하고 있는 과거 중 그 무엇도 그녀와는 연관이 없었다.

릴리가 옆에 있으면,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그런 것들은 전부 다른 세상 이야기인 양 잊어버릴 수 있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아니, 릴리 벨모어는 그의 도피처였다. 자일스는 이상향처럼 찾아온 달콤한 순간 속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그가 살린 피아니스트. 그가 내린 ‘올바른 선택’…….

릴리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괜찮았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자일스는 두 팔로 릴리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현실이 그녀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지키기라도 하듯, 그는 필사적이었다.

“릴리…….”

그가 달뜬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자일스는 동력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버린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속 뜨거운 화로가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해링턴은 말했다. 그에겐 이루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고. 목표도, 갈망도, 그 어떤 것도. 자일스는 이제야 깨달았다.

릴리는 단순히 지켜 내고 싶은 사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자일스에게는 릴리가 필요했다.

릴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릴리 벨모어는 그를 다시 움직인 사람이었다.

*

그 날은 어쩐지 저택에 평소보다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날이었다.

처음에는 릴리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오곤 했던 그는 어느새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어쩌면 그가 거주하는 연립 주택보다 휑하기 그지없는 이 넓은 폐가가 더 편한 장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혁명군이 펜 한 자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압수해 텅 빈 저택에서 제일 안락한 장소는 릴리가 주로 시간을 보내곤 하는 악기 보관소였다. 아무런 쓸모도 없어 혁명군조차 버리고 간 망가진 악기들이 되레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자일스도 인정해야만 했다.

릴리에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뜯어내 오려 낸 신문 뭉치를 꺼냈다.

알고 보니 그건 신문에 부록처럼 실어 두곤 하는 십자말풀이였다. 가족들이 읽고 버린 신문을 몰래 훔쳐다 오려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고 릴리는 설명했다.

릴리는 군데군데 공란이 남겨진 십자말풀이 뭉치를 자일스 쪽으로 내밀었다.

“달리 할 게 없으니까 이거라도 풀어 줘요. 저는 아무리 해도 못 풀겠더라고요.”

“다 풀면 좋은 점이라도 있나?”

“기분이 좋잖아요.”

자일스는 십자말풀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묵묵히 릴리가 비워 둔 퀴즈들을 풀기 시작했다. 릴리는 그런 자일스의 옆에 앉아 그가 빈칸을 하나씩 채워 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모든 십자말풀이 퀴즈가 그렇듯이 채워 넣어야 할 정답에 대한 힌트가 주석처럼 달려 있었다. 농어목 자리돔과에 속하는 물고기. 빨강 혹은 주황과 흰색의 배열로 인해 클라운 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건 흰동가리다. 그는 정답을 써넣었다. 릴리의 필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필기체가 이질감을 자아냈다.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는 릴리가 이미 풀어 놓은 앞뒤 글자와 주석을 꼼꼼하게 읽어야 했다.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혹은 어떤 사물의 기초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텔레비전에서, 음성에 대하여 화상을 이르는 말.

퀴즈를 하나씩 풀어 가던 그가 한 문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혹은 그런 일.

이게 뭐였지? 자일스는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마냥 머리가 굳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자일스를 재촉하듯 힌트가 한 줄 더 쓰여 있었다.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혹은 그런 일.

그는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당장 얼마 전만 해도 그러한 감정이 밀물처럼 덮쳐 오는 것을 느꼈던 그였다.

자일스는 차마 정답을 적어 넣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혼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기가 찰 만큼 어이가 없었다. 그는 티가 나지 않게 슬쩍 릴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릴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졸고 있었다. 굳게 닫힌 눈꺼풀이 피로해 보였다. 어깨에 걸친 커다란 군용 코트가 꽤나 따뜻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잠에 든 것이겠지.

자일스는 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런 존재가 곁에서 자고 있다는 게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경악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던 동향 사람들을 트럭 안으로 무자비하게 밀어 넣고, 직접 총살까지 집행했던 그였다.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 그런 것들이 자일스의 일상이었다. 새 정부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살인은 곧 그의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삶을 살아왔던 그가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선량한 피아니스트의 곁에서 십자말풀이나 풀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일상적일 이 풍경이 못내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오랜 악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릴리의 곁 언저리에서 머물던 손이 곧 거두어졌다. 만지면 좋은 꿈이 깨질 것만 같아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십자말풀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곤 하는 감정. 가장 깊고, 강렬하고도 원초적인……. 더는 그의 삶과 관련이 없으리라 믿었던 감정의 이름을 자일스가 적어 내려갔다.

사랑. 흐릿한 모습으로 머릿속을 맴돌기만 하던 감정의 정체를 제 손으로 직접 적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자일스는 릴리를 아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지켜 내고 싶었고…… 그는 릴리를 사랑했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진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릴리는 그를 사랑할까? 속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지금 자일스의 코트를 덮은 채 그의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자일스가 위안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릴리는 왜 이 칸을 비워 놓은 것일까?

자일스는 그가 심문했던 비스마르 일가의 진술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사랑 같은 속 편한 감정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기에 급급한 탓에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은 전부 이 마룻바닥 밑에 밀어 넣고 다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릴리가 자일스의 위안이 된 것처럼, 어쩌면 그도 릴리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일스는 나직한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집중하는 이 순간만큼엔, 머리를 터뜨릴 것처럼 압박하던 사념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가 괜찮아질 때까지 이 평화를 누리기로 했다.

*

“자네는 요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자일스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링턴은 자일스의 머리를 갈라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파헤치고 싶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던 자일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질책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요새 괜찮은가 해서 말이야.”

그런 말이 스스로도 무안했는지 해링턴이 한숨을 쉬었다.

“근래에 겪어야 했던 일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지.”

“저는 괜찮습니다.”

“나한테는 거짓말할 생각 말게. 아무리 우리 혁명군의 적인 여자라 해도, 자네에게는 적이기 이전에 누이였을 것 아닌가. 위대한 혁명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게지. 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있네.”

자일스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한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해링턴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식사 자리였다. 자일스에겐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해링턴은 그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염려되는지 좀체 그가 혼자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자네가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야 할 계단이 더 남은 모양이야. 자네도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그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부하들 몇몇은 자네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기로 되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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