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화 (7/93)
  • <7화>

    한편 셀레스트는 자일스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괴성을 내지르며 저항하는 셀레스트를 몸으로 찍어 누른 채, 자일스는 잠시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조차 이 순간에는 사치였다. 부하들이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자일스는 권총 머리를 누이의 이마에 갖다 댔다.

    그러자 그의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느려졌다. 부하들은 더 이상 그를 돕기 위해 달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자일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작전 자체가 자일스를 중심에 둔 커다란 덫이었다.

    이제야 왜 부하들이 여자 하나를 잡지 못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셀레스트 헤센이기 때문이었다. 자일스가 직접 죽여야 할 목표물. 그가 처음 보는 부하들을 이끌고 마인헤바흐까지 여정을 떠나게 된 핵심.

    도주자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는 건 둘째 문제였다.

    이 임무는 자일스의 가치를 가늠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인 것이었다. 과연 그가 사랑하는 누이를 죽일 수 있을까?

    자일스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수많은 동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의 생존뿐만 아니라 누이 셀레스트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거기까지는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의 백 개 목숨보다 자신과 누이의 것이 훨씬 소중함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혁명 지도부와 누이라면 어떨까?

    이제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살아남을 것인가, 혹은 누이를 위해 희생할 것인가.

    자일스는 추위에 덜덜 떨며 충혈된 눈으로 망가진 셀레스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방아쇠를 당겨야 해. 아니, 당기지 마.

    시간이 얼마 없었다. 부하들이, 자일스의 충성도를 입증해 줄 증인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스카프를 걷었던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를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은 건 셀레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자일스의 손을 움켜잡고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셀레스트는 자일스를 내팽개치고 다시 도주를 시도했다.

    자일스는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온몸으로 찍어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임무가 자네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못 해.”

    자일스가 그의 밑에서 몸부림치는 셀레스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못 한다고. 셀레스트, 제발…….”

    반쯤 흐느끼던 그는 어느 순간 셀레스트의 움직임이 멎었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일스는 황급히 셀레스트의 몸을 반대로 눕혔다.

    누이가 쥔 작은 칼이 배에 꽂혀 있었다. 자일스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셀레스트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최악의 결말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녀는 조용한 성미를 가진 소녀였다. 파티나 사교 모임을 즐기기보다는 방 안에 틀어박혀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드레스와 구두 혹은 장신구보다 한 자루의 좋은 만년필에 더욱 열렬히 반응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자일스는 부디 누이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자유를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어디든지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스스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목숨 하나에 자유, 목숨 하나에 미래, 목숨 하나에 내일 새벽 어스름…….

    하루를 더 살게 해 줄 수많은 희생자들 끝에 결국 누이가 돌아올 거란 사실을 정녕 몰랐던가.

    구석진 곳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워 대는 그의 곁으로 부관 찰리가 다가왔다. 자일스는 별로 달갑지 않은 눈길을 보냈지만 언제나 그랬듯 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하신 겁니다.”

    그는 결국 갈기갈기 짓이겨진 자일스의 속을 긁어 놨다. 자일스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지도부에서 결정을 내린 이상 어차피 죽을 여인이었습니다. 직접 끝을 내 주지 않으셨다면 더 처참하게 죽었을 수도…….”

    “혼자 있고 싶다.”

    “안 됩니다.”

    “……찰리. 나 피곤해.”

    “하지만 해링턴 장군님께서 대위님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하셨는데요. 혼자 별별 생각을 다 하고 계실 거라면서 말입니다.”

    그걸 잘 아시면서도 찰리를 보내셨단 말인가. 지도부의 결정과 저번 작전에 대해 단 1초라도 더 생각했다가는 정말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자일스는 성질을 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인내했다.

    마인헤바흐에서 돌아온 후 그는 피부가 빨갛게 일어날 때까지 손을 문질러 씻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누이의 피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었어.

    내가 그랬어.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이건 해링턴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한데…… 대위님도 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자일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윗선에선 대위님이 총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영 의심쩍어한답니다.”

    “…….”

    “다른 부하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분명히 총으로 목표물을 겨누고 있었는데, 죽은 뒤에 시체를 확인하고 나니 사인은 자상이었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땐 그리 이상스럽게 여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냥 몸싸움하다 보니 무기를 바꾸신 것뿐이잖아요.”

    가만히 허공만 바라보던 자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부관의 곁을 떠났다.

    “대위님이 죽이신 거 맞죠? 전 그렇게 믿어요!”

    등 뒤에서 찰리가 소리쳐 물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자일스는 차라리 지도부가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 버리라고 지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미련이 없어졌다기보다는 그 정도로 머리가 아프게 지끈거려 왔다.

    그의 삶은 오류와 잘못된 선택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던 일의 결과까지 결국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이제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말아야 할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아직 남은 한 가지의 ‘올바른 선택’이 있다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릴리 벨모어예요. 잘 부탁드려요.’

    릴리. 릴리 벨모어. 나의 안식처이자 나의 살아 있는 낙원.

    그녀에 대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자일스를 집어삼켰다. 분명 버려진 솔즈부르의 저택을 들락거리면 의심을 살 거라 생각해 다시는 방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당장 릴리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릴리를 봐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생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자일스의 정신은 마비되었다. 마인헤바흐 작전은 그의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더는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릴리를 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인헤바흐에서 있었던 일들도 잠깐의 악몽으로 치부할 수 있으리라. 릴리는 자일스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자일스는 차에 올라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시동을 걸었다. 운전하는 내내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이 있을 뿐이었다.

    반쯤 미친 사람이 되어 도착한 저택은 여전했다. 인적은 전무했고, 폐가가 된 저택은 곧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곧장 향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얼마간 답이 없던 커다란 문이 살짝 열렸다.

    “자일스!”

    문틈 사이로 슬쩍 내다보던 릴리가 웃으며 다가왔다. 이번에는 하얀 슈미즈 위에 그가 건넸던 코트를 헐렁하게 걸친 채였다.

    처음 만날 적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릴리가 웃음 짓는 모습을 보는 순간, 자일스는 마음이 가라앉는 동시에 가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릴리.”

    차마 무어라 말을 건넬 수도, 마주 웃어 줄 수도 없어 넋을 놓은 사람처럼 쳐다만 보는 그를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온 릴리가 이내 두 팔을 벌려 그를 포옹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오롯이 느껴졌다. 큰 위안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릴리는 머쓱했는지 바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안해요. 그냥 또 와 준 게 고마워서 그런 건데.”

    “……될까?”

    “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의도치 않게 말끝이 떨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놀란 건지, 혹은 충동적으로 꺼내고 만 말 한마디에 놀란 건지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던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자일스가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릴리를 안을 수가 없었다. 릴리는 그와 달리 선하고 때 묻지 않은 존재였다. 그가 릴리를 두 팔로 안았다가는 지금까지 묻혀온 더러운 때가 그녀의 몸에 탈 것만 같았다.

    “……다음에는 옷이라도 한 벌 가져다줄게.”

    “이미 한 벌 줬잖아요.”

    “그거 말고. 제대로 된 옷.”

    “난 이게 따뜻해서 좋아요.”

    릴리는 자일스가 코트를 도로 가져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는지 앞섶을 여몄다.

    불편한 정적이 감돌았다. 끝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릴리였다.

    “자일스,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그럼 연주해 본 적은 있다는 거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눈빛에서부터 다 보이거든요. 저, 부탁이 있는데…… 오늘은 당신이 내게 피아노를 쳐 주지 않을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