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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6화 (6/93)
  • <6화>

    그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자일스는 릴리와 시간을 보내며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결국 릴리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은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전국 각지에 숨어든 자들이 남아 있었다. 지도부는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찾으려 했다.

    어찌 보면 릴리도 지도부의 목표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녀의 소재가 들통난다면…….

    만에 하나, 릴리에 대해 알게 된 지도부에서 자일스에게 직접 그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이곳을 계속 들락거리는 게 맞는 걸까? 나로 인해 그녀의 거취가 들통나게 되는 건 아닐까.

    “자일스, 또 무슨 생각 하고 있죠?”

    눈치 빠른 릴리가 물어 왔다. 자일스는 말없이 흐릿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일스는 아직 혁명군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누구라도 체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릴리는 살아남았다. 그 사실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계속 들락거리는 건 의심을 사기 좋아 보였다.

    자일스는 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이제 살아갈 힘이 생겼다. 살도 붙고, 목소리도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만 발길을 끊어야 할 것 같았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릴리의 곁에 남고 싶어 했다.

    “내 걱정은 말고, 이 순간에 집중해.”

    그는 릴리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그 말을 전했다.

    자일스 헤센은 몸을 낮추고 릴리 곁에 앉았다. 곁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며, 스스로의 미련을 달랬다.

    나는 그녀가 살기를 바랐지, 그녀와 미래를 그리려 한 게 아니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는 순간, 릴리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자일스 헤센은 눈을 감았다.

    여기서 끝내.

    욕심을 내면 릴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네 손으로 그녀를 부수게 될지도 몰라.

    작별 인사를 해야 했지만 자일스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 영원한 작별로 못을 박게 될 것 같아서였다.

    *

    작전 당일. 자일스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군용 트럭에 올랐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부하들이 전부 트럭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일스가 말없이 지도만 내려다보는 사이, 그의 직속 부관이 말을 걸어왔다.

    “컨디션은 좀 어떠십니까?”

    “이상 없어.”

    “새벽부터 임무를 나가는 건 참 오랜만입니다. 혁명 집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철야 임무가 몸에 밸 지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며칠 잠잠했다고 몸뚱어리가 슬슬 투정을 부리네요.”

    자일스는 부관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늘어놓는 쓸데없는 말들을 무시했다.

    “다 모였나?”

    “한 명도 빠짐없이 집합 완료했습니다.”

    “운전수에게 출발하라고 신호해.”

    부관이 운전석과 그들이 앉은 뒤쪽 공간을 나눈 두꺼운 칸막이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트럭이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야 할 목표지는 국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터였다.

    벨담이 입스윈을 지배하던 시절, 그곳은 풍광이 아름답고 벨담으로의 왕래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이 머물러 가는 일종의 휴양지로 쓰였다. 물론 혁명군이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운 지금은 잿빛 잔해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는 사람도 살지 않는 그곳을 도주자들이 경유지로 선택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마인헤바흐. 벨담인들이 붙였던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던 자일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 임무는 지금껏 맡아 왔던 일들과는 달랐다. 자일스는 호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부하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냉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끌던 부하들이 아니었다. 개중엔 처음 보는 군인들도 있었다.

    특별한 임무라는 해링턴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군대가 그에 맞춰 다시 편성된 건가?

    혁명군 군대는 급한 대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그물망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직 편성 과정 중에 있었다. 한데 모아 놓고 보니 아귀가 안 맞으면 그 자리를 다른 이들이 채우는 경우 정도는 있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일스에게는 이보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는 덜컹거리는 트럭 안에서 목표물들의 인적 사항과 경로를 스크랩해 둔 파일을 읽으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되도록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와.’

    사살하라는 명령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시체를 운반해야만 할 이유가 무엇일까?

    입스윈 땅은 넓은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몇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자일스는 기쁜 마음으로 트럭에서 내렸다. 열댓 명이 한데 모인 좁은 공간 안에서 포장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 상황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경험은 몇 번을 해도 적응되질 않았다.

    예측에 따르면 도주자들이 국경을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두세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자일스는 부하들을 풀어 일대를 수색하도록 명령했다.

    10월의 끝자락.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샅샅이 뒤져야 할 마인헤바흐 지역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

    좋은 징조였다. 눈밭에 남는 발자국이 수색을 크게 도울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임무를 망치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토끼 사냥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부관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자 자일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토끼 사냥 말입니다. 말 그대로 토끼를 사냥하러 가 보신 적이 있으시냐는 겁니다.”

    “……아니.”

    “토끼는 겁이 많은 동물이죠. 하지만 몸집이 작고 날래서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식하게 달리기 솜씨만 믿고 잡으려 했다간 허탕을 치기 일쑤입니다. 모든 사냥이 그렇듯이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전략이 필요하죠.”

    자일스는 부관의 말에 대충 장단만 맞춰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전략이라는 게 뭐지?”

    “우선은 토끼굴을 찾아내야죠.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을 모아서 토끼굴 근처에 자리를 잡도록 시키는 겁니다. 특히나 추운 겨울에는 무조건 토끼가 굴속에 숨어 있기 마련이거든요. 제가 말씀드렸죠? 토끼는 겁이 많다고요. 입을 모아 고함을 지르면 놀란 토끼가 펄쩍 뛰어나오는데, 그때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게 지금 이 임무랑 무슨 상관이지?”

    “그냥요. 이렇게 수색하고 있으니 마치 토끼 사냥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토끼가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결국은 똑같지 않습니까?”

    자일스는 손을 들어 부관의 발걸음을 제지했다. 희미한 발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군화의 흔적은 아니었다.

    “찰리, 북서쪽을 맡은 인력이 우리뿐인 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거의 다 왔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 멀리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탕!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저 멀리 나무들 사이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자일스는 부관을 뒤로하고 목표물을 향해 곧장 뛰었다. 새까만 물체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도주자다.

    확신이 듦과 동시에 자일스는 권총을 꺼내 들어 사격을 가했다. 탕! 탕! 그러자 점점 멀어지던 물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놈을 잡았다고 해서 상황이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자일스는 부관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멀리서 소음이 나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찰리, 마무리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임무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자일스는 달리기에 방해가 되는 무거운 코트를 벗어 던지고 부하들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맨 처음 방아쇠를 당긴 부하들이었다. 아직도 목표물을 잡지 못했다는 건가?

    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그들이 도주자 한 명을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총으로 쏴! 쏴 버리라고! 자일스가 고함을 쳐도 그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고작 여자 한 명을 잡지 못해 시간만 지체하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하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여자가 앞쪽으로 튀어 나갔다. 저 자식들은 임무를 의도적으로 망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쓸모없는 녀석들!”

    자일스는 옆구리에서 선혈을 흘리며 도망치는 여자를 쫓아 쉬지 않고 달렸다. 점점 몸에 무리가 오고 호흡이 어려웠다. 놓치면 끝장이다. 목표물이 부상을 당한 덕에 다행히 수월하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자일스의 손이 여자의 뒷덜미에 가 닿았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된 채로 눈밭에 한차례 뒹굴었다. 궁지에 몰린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땅에 깔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자일스는 여자의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걷어 냈다. 화상으로 반쪽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이미 파일에서 사진을 확인한 덕에 그런 건 변수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다만 파일에 꽂혀 있던 사진의 화질이 형편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실물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자였지만 나머지 반쪽은 아직 멀쩡했다. 금발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의 반쪽 남은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이의 것이었다.

    “……셀레스트?”

    정신적인 충격과 더불어 혼란이 판단 감각을 마비시켰다. 누이가 왜 이런 꼴로 도망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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