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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5화 (5/93)
  • 5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건가? 나는 혁명을 일구어 나가는 내내 자네를 봐 왔어. 물론 자네에겐 혈통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열성적인 동지라고 생각하네. 그걸 지도부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자네에게도 길이 열릴지 몰라. 아니, 열릴 거야. 그러니 혹시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고 그 잘생긴 눈에 다시 불 좀 켜 봐.”

    “과연 지도부가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하겠습니까? 그들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저는 벨담 지주의 아들이고,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일스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는 완벽하고 순수해야 할 새로운 지도부의 표면에 진 얼룩 같은 존재였다. 큰 폭풍을 몰아내고 나면 그제야 작은 오점들이 눈에 보이는 법이다. 그다음엔 마무리 청소가 시작된다. 완벽한 끝맺음을 위해서라면 필요 불가결한 일이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자네가 계속 내 밑에 있어 줬으면 해.”

    해링턴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당부했다.

    “최선을 다해서 도울 테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더라도 자네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줬으면 하네. 자네는 혁명군의 충성스런 인재야.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봐 왔기에 알아. 하지만 저 멀리 있는 이들은 자네를 옆에서 본 적이 없으니 그런 판단을 내린 게지.”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네가 직접 맡아 줬으면 하는 임무가 있네.”

    해링턴은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자일스는 파일을 건네받아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도주한 포로들. 추적 결과에 따르면 그들은 벨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패전의 여파로 느슨해진 국경을 통과하기만 하면 그들은 자유로워질 테고, 그것이 훗날 입스윈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네가 할 일은 그들이 국경을 넘기 전에 체포하는 일이네. 이번 임무는 지금껏 맡아 왔던 일들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할 거야.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임하게.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하도록 해. 필요한 정보는 모두 이 서류에 들어 있을 걸세.”

    “중요한 인물들입니까?”

    “그들이 누군지 알게 되면 자네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인물들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자네 부하들에게는 내가 전갈을 보내 놓겠네.”

    해링턴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덧붙였다.

    “되도록 시체로 만들어서 데려와. 뒤처리는 언제나 귀찮은 일이니까. 자네도 동의하겠지?”

    *

    “무슨 생각 해요?”

    별안간 릴리가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자일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본 릴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숨죽여 웃었다.

    “별생각 안 했어.”

    “거짓말. 난 자일스가 화난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죠. 인상을 팍 쓰고 계시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잖아요.”

    릴리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신경이 쓰이기는 했는지 자일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자일스와 함께 있는 동안 항상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본인은 아닌 척해도 자일스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혁명군 장교라는 사실이 릴리에게 위압감을 주는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자일스는 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꾸며 냈다.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가끔씩 그럴 때가 있어. 습관이야.”

    “별일 있는 건 아니고요?”

    그녀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랐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벌써 눈치챈 것이다. 그러나 자일스는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

    자일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빵을 내밀었다. 릴리는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영락없는 피아니스트의 손이었다.

    “빵이 조금 딱딱할 거야.”

    “괜찮아요.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요.”

    “천천히 먹어. 체하니까.”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둘 모두 말이 없었다. 릴리 또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많이 건강해졌다. 햇볕을 쬐지 못해 여전히 창백했지만, 예전의 유령 같던 모습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머리카락에도 서서히 윤기가 돌고 있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릴리는 주저하던 끝에 곧 말을 이었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계속 찾아와 주시고 저에게 먹을 것도 가져다주시잖아요. 혹시 번거롭지는 않으세요? 저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여자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내주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자일스는 릴리를 바라보다 간단히 대답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니까 찾아오는 것뿐이야.”

    “제가 하는 일이라곤 당신이 준 음식을 먹는 것밖엔 없는데.”

    “그래. 그거면 됐어.”

    그건 진심이었다. 릴리가 그가 챙겨 온 음식들을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자일스에게 큰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단순히 아무 음식이나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오지 않으면, 너는 굶을 게 분명하잖아.”

    “이렇게까지 마음 써 주시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누군가 자신을 위해 신경을 써 준다는 일이 어색한 걸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그녀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자일스가 보이는 호의에 편하게 기대지는 못했다.

    “저를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인데…….”

    “릴리. 때로는 좋은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는 마.”

    자일스는 덧붙여 말했다.

    “지금으로선 네가 나를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니까.”

    릴리는 그 말을 듣고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한 티를 숨기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자일스는 그런 릴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택 밖으로 자주 나가는 편이었나?”

    “열매를 따야 할 때만요.”

    “그럼 남은 시간 동안은 뭘 하면서 지내는 편이지?”

    “그냥…… 대부분 누워서 시간을 보내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전 불만 없어요. 이제 아무도 나를 해치려 하지 않으니까. 나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요.”

    “밖에 나가서 산책하거나 하지는 않고?”

    “그러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이 근방에는 사람이 없었다. 본래 귀족의 사유지였을뿐더러, 혁명군이 휩쓸고 간 지역을 감히 기웃대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바깥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나와 함께 있으면 괜찮을 거다.”

    자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는 릴리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고 싶어졌다. 핍박하는 사람도 없는 지금,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릴리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릴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자는 건가요?”

    “그러는 편이 네게도 좋을 거야. 햇볕을 쬐어야지.”

    “하지만 저는 신발이 없어요.”

    자일스는 릴리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를 따라 나섰다가 혹시라도 발을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던 자일스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실례하겠다.”

    그러더니 그가 릴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릴리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자일스!”

    “불편하면 말해.”

    릴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곧 자일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 바깥으로 나섰다. 가을의 하늘은 청명했다. 릴리는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언제 이곳에 피바람이 불었냐는 듯, 저택 주위를 둘러싼 전원 풍경은 마냥 평화롭기만 했다.

    자일스는 그가 눈여겨봐 두었던 곳으로 릴리를 데려갔다. 들꽃이 무수히 피어 있는 오솔길 근처 냇가였다. 한때 귀족들이 이곳을 거닐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는 냇가 근처에 릴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녀도 이곳은 처음이었는지 생경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새들의 울음과 어울려 그들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버려진 저택에만 갇혀 있던 릴리는 이곳에서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냇가에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가 보던 릴리가 넌지시 말했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작은 박새 무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짹짹거렸다. 자일스는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평안한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릴리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절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없었으리라.

    말없이 발을 흔들어 물장난을 치는 릴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확신했다. 릴리만큼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릴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일스의 안식처이자 낙원이 되어 있었으니까.

    스스로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나, 적어도 자일스는 한 사람만큼은 살렸다.

    그 사실이 그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자일스는 얼마 전 해링턴 장군이 내린 임무에 대해 생각했다. 탈주자들을 체포하는 평범한 임무처럼 보였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이것이 정말 단순한 임무에 불과하다면, 왜 해링턴은 그의 목숨을 운운하며 중대한 일이라고 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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