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래된 공복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서야 릴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꼴사나워 보였죠? 그동안 죽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먹고 살았거든요.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어서 주체를 못 했는데…….”
“다음에는 더 많이 가져오겠다.”
“정말 고마워요. 정말로.”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녀가 이내 물어 왔다.
“나를 왜 구해 주시는 거예요?”
릴리를 돕게 된 이유. 그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결국 자일스는 형편없는 대답을 내놓고야 말았다.
“그러고 싶어서.”
“내가 뭐라도 돌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라 빚만 지는 것 같아요.”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냥 살아 있기만 해. 그 정도로도 충분하니까.”
“그래도 다음엔 꼭 보답할 거예요. 내게 그럴 능력이 생긴다면 꼭 그럴 거예요.”
하지만 릴리는 이미 보답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죽지 않고 생존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릴리를, 릴리의 음악을 살리고 싶었다. 후회만 가득한 삶을 살아온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거라면, 더는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피아노를 연주해 드릴까요?”
“갚을 필요 없다니까.”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제가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당신은 제 연주를 좋아하시니까…… 그렇죠?”
릴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건반이 더러워질까 봐 신경이 쓰였던 건지 때가 탄 옷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이윽고 그녀가 건반을 눌렀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폐허 속의 생존자였을 뿐인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모했다. 마치 마법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릴리는 자일스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일스는 부디 그녀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릴리의 연주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 또한 아니라, 자일스는 구태여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릴리의 연주는 그가 가슴속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처박아 버렸던 옛 기억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대접받았던 시절. 또래 아이들이 그랬듯 자일스 또한 여러 교양 교육들을 받았다. 그중엔 피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날들의 친숙한 소음들과 닮아 있었다. 은식기가 부딪히던 소리. 셀레스트가 연주하던 바이올린 선율. 무도회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주고받던 이야기들…….
한때 그 풍경 속에서 자란 소년이었던 자일스는 스스로의 손으로 그 시절들을 무참히 부수고 짓밟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러야 해.
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의 목을 겨눈 칼날은 그를 비껴 간 것이 아니었다. 먼 길을 빙 돌아오는 속도가 남들보다 느렸을 뿐이다.
결국, 끝에 남은 건 무엇이었는가…….
자일스는 화염에 휩싸여 검게 타들어 가던 저택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로 그 저택이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불태운 애정 어린 집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던가? 슬픔? 비애? 그것도 아니면 죄책감?
그가 제대로 기억해 내기도 전에, 릴리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장교님?”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릴리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릴리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자일스는 오해를 풀기 위해 즉시 표정을 풀었다.
“별거 아니야.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미안해.”
그가 뒤늦게 덧붙였다. 릴리는 시선을 떨어뜨린 채 깍지를 낀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런 게 아니야.”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예요. 제가 감사를 표할 방법은 연주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릴리,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난 그냥…….”
“게다가 청중을 가지게 된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자일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미약하게나마 릴리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미소가 낯설었다. 두려움에 떨며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와는 또 다른 사람 같았다. 찰나 동안, 자일스는 그녀에게서 초상화 속 엘로이즈 비스마르의 모습을 보았다.
“제 연주가 마음에 들어서 또 오신 것 아니에요?”
꼭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이라, 자일스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 연주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요. 오랜만이라 부족한 점은 많지만…….”
“그동안 피아노 연주는 멈췄던 건가?”
“누군가 듣고 신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동안은 쥐 죽은 듯이 지내야 했어요. 나도 살고 싶었으니까.”
자일스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입 안에서 수많은 말들이 맴돌았다. 나도 그랬어. 나도 살고 싶었어. 누구보다도 간절히 살기를 원했지. 그래서 친구들을 죽이고, 내가 살던 집을 불태웠어. 그런 것들이 나를 살릴 거라고 믿었어.
“너는 죽지 않을 거야.”
자일스가 말했다. 비굴한 살인자로서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에라도 그는 이 세상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남기고 싶었다.
릴리는 자일스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동향 사람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살갗을 찢으며 고문하는 데에 망설임 없던 그였기에 더더욱 릴리를 살리고 싶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적어도 사형수처럼 운명이 찾아오기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직 당신 이름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네요.”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물어 왔다.
너무 늦은 소개였지만 자일스는 기꺼이 대답했다.
“자일스 헤센이야.”
“고마워요, 헤센 씨.”
“그냥 자일스라고 불러. 그 쪽이 나에게도 편해.”
“자일스.”
릴리가 그의 이름을 입 속에서 몇 번 굴려 보았다.
“입에 잘 붙는 이름이라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
“저도 제 소개를 할게요. 릴리 벨모어예요.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네 진짜 이름은…….”
릴리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찬 손이 자일스의 손을 장난스레 잡았다가 놓았다.
“기억 안 나요? 엘로이즈는 죽었잖아요. 예전에.”
그녀가 무어라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자일스가 릴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차가웠다. 이런 손으로 식어 버린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는 건가.
“손이 왜 이렇게 차.”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빼서 릴리의 손에 끼워 주었다. 안감에 인조털이 있는 가죽 장갑이었다. 릴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날씨가 서늘했지만 자일스는 코트와 장갑 없이 저택을 나섰다.
춥기는커녕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했다.
그날 이후로도 자일스는 종종 릴리를 만나러 갔다. 집행부의 추가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버려진 저택 깊숙한 곳에서, 릴리는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자일스 앞에 나타났다.
처음 만날 적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던 두려움과 경계가 물러난 자리에는 웃음이 많고 천진한 소녀 같은 릴리가 있었다. 그녀는 자일스가 하는 말을 경청하며 곧잘 웃고는 했다. 누이와 영영 헤어진 이후로 누군가와 마음 편히 담소를 나누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자일스가 식량을 가져다준 덕인지 릴리의 몸에 살이 붙고 혈색이 점점 살아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일스는 그녀가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릴리는 그의 손으로 살린 여자였다. 릴리 또한 그 사실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핏빛으로 얼룩졌던 그의 삶이 또 다른 색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가 본래 어떤 인간이었는지에 대해 깜빡 잊어버릴 만큼.
어쩌면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요새 좋은 일 있나 봐?”
자일스의 상관인 해링턴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는 자일스를 앞에 앉혀 둔 채 한 손에는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안색이 많이 편해졌어.”
“그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자네는 거울도 안 보나? 난 자네를 볼 때마다 다음 날 시체가 되어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어찌나 곧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지 말이야.”
“업무로 인해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혹시 미련을 놓아 버린 건지.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든다네. 마음을 비우면 평화가 찾아오기 마련이지. 마치 보상처럼 말이야. 등에 짐을 잔뜩 지고 걷는 사람의 눈에 길가에 핀 들꽃이 보일 리 없지 않나.”
해링턴은 파일을 넘기다 말고 자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 가며 공기 중에 불투명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말해 봐, 헤센. 요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말로 해서 안색이 좋아졌다는 거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네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보여. 지금 자네 눈을 봐도 그래. 아무것도 없어. 이루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목표도 갈망도 아무것도 없다고. 이젠 다른 의미로 다음 날 시체가 되어 돌아올까 봐 걱정될 지경이야.”
“전 괜찮습니다.”
해링턴은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헤센. 지도부에서 자네를 보호할 수 없다고 한 건…….”
“모든 것이 정리되면 저를 내치겠다는 말과 같죠.”
자일스가 즉각 대답했다. 해링턴은 차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