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1화
1. 자일스 헤센
방울꽃과 솔체꽃이 아름답게 만개한 솔즈부르의 어느 사유지. 검은 딱정벌레처럼 빛나는 자동차가 잘 닦인 포장도로 위를 달렸다.
본래대로라면 벨담 귀족을 태운 고급 승용차만 오갈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뒷좌석에 앉은 자일스는 정장 혹은 오간자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깔깔 웃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이 길을 지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더 이상 벨담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승용차 또한 본래 귀족의 소유물이었을 것이다. 귀족은 이제 몰락했고, 입스윈 혁명군은 벨담 귀족의 재산을 징발해 그들을 체포하고 짓밟는 데에 두루 사용했다.
자일스가 타고 있는 이 차 역시 징발된 것이었다. 차에는 총 네 명이 타고 있었다. 자일스를 뺀 셋 모두 그의 부하들이었다. 부하들이 떠드는 소리로 차 안이 시끌벅적했다. 자일스는 대화에 끼지 않았다. 원래 그는 부하들과 별로 친한 편이 아니었다.
처음에 그들은 자일스의 부하가 되는 것을 껄끄러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벨담인의 밑에서 싸우라니…… 모순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목적지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였다.
운전을 맡은 부하가 창 너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보인다! 저기 저 저택!”
그러자 나머지 부하들도 저택을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이야, 집 한번 화려하게 지어 놨네.”
“도대체 방이 몇 개일까? 내가 장담하는데 저 중 절반은 쓰지도 않는 공간이었을 거야. 허영심 때문에 돈지랄을 해 댄 거지. 저건 나중에 학교로 써도 되겠다.”
“우리 손에 뒈진대도 저 집 꼬라지를 보니까 남는 장사 같네. 한 번이라도 저렇게 살아 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부하들이 그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자일스 또한 귀족이 살던 저택을 볼 수 있었다. 벨담식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물론 그곳에 살던 이들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다.
혁명군은 이미 예전에 이 지역을 접수했다. 귀족들을 끌어내고, 저택 안에서 물건이란 물건들은 전부 다 뒤져서 가져가 버렸다. 보기에만 그럴듯하지 사실상 버려진 폐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자일스를 비롯한 이들이 솔즈부르의 저택을 다시 찾은 건 시찰을 위해서였다. 과연 새로운 시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절한지 검토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관공서로 쓸 수 있다면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자비하게 철거될 것이다.
과거 빛나는 명성을 자랑하던 벨담 귀족들이 그리 되었듯이.
본토에서 쳐들어온 그들은 남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여 입스윈 사람들을 빨아먹고 부유하게 지냈다. 국가의 원래 주인인 입스윈 사람들이 도리어 노예처럼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전쟁에서 패전한 여파로 벨담은 약화되었다. 벨담이 자국을 지키는 데에 바빠 입스윈을 아예 포기해 버린 덕에 귀족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그 틈을 타 입스윈 사람들은 귀족들을 몰아낼 혁명을 일으켰다.
약 2년이 지나고서야 혁명이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벨담 귀족들은 전부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제 입스윈 그 어느 곳에서도 벨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일스는 폭풍 같던 시절을 견디고 이 땅에 살아남은 유일한 벨담인이었다. 그 또한 아주 오래전에는 저런 저택에 살면서 도련님 대접을 받았던 지주의 아들이었다.
지금은 그저 입스윈에 투항한 혁명군 장교일 뿐이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대위님?”
“그래.”
“저런 저택 말입니다. 진짜로 화장실이 거실만 합니까? 제 동료가 그러더군요. 귀족 저택 화장실이 자기가 살던 집보다 더 넓었다고요.”
뼈가 있는 질문이었다. 그들도 자일스가 벨담 지주 혈통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제공하고, 무기를 건네주었을 때까지도 적대적인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자일스는 동향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고 총살하면서 점점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대위님은 우리 중 유일하게 경험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저희는 네 가족이 함께 쓰는 작은 화장실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어서요.”
비록 자일스는 그들의 상관이었지만 대답을 신중히 해야 했다.
혁명에 공헌한 영웅 대접도 그의 혈통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생각도 안 나.”
“별로 오래되지도 않으셨을 텐데.”
운전병이 툴툴거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조수석의 페터슨이 견디다 못해 끼어들었다.
“아, 그게 뭐 중요해? 화장실을 금으로 만들어 놨든 은으로 만들어 놨든 이제 무슨 상관이야. 다 우리 건데. 이해하십쇼, 대위님. 로빈이 어제 술 먹다 애인한테 한 소리 들어서 컨디션이 안 좋답니다.”
“그런 일 없었어!”
“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로지아한테 바칠 뇌물이나 생각하고 있어. 둘이 빨리 화해하라고. 네 풀 죽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사기가 떨어진다니까.”
로빈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승용차가 저택 내부까지 들어섰다. 철제 대문은 이미 고장이 나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본래 정원으로 꾸며졌어야 할 공간에 잡초가 들쑥날쑥했다. 멀리서는 아름다워 보였던 저택 건물 또한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방치된 태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자일스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너희는 아직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나 살펴봐라. 나는 보고서에 뭐라고 써서 올릴지 둘러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부하들과 흩어져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메인 홀을 보고 처음 느낀 감상은 이러했다.
‘가관이군.’
한때 번쩍번쩍 광이 났을 대리석 바닥은 빛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낙엽이 들이쳐 난장판이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완전히 박살이 난 채 나동그라져 쓸쓸한 쓰레기로 전락해 있었다.
커다란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옷장이나 침대를 비롯한 가구는 물론 욕조까지도 전부 뜯어 가 버렸다. 펜 한 자루 남아 있지 않았다. 사물이 없으니 새삼 이 저택의 규모가 더욱 실감되었다. 부하의 말대로 학교로 개조하면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이곳저곳 천천히 돌아보던 자일스는 화려한 무늬로 양각이 된 문을 발견했다. 특별해 보이는 공간 같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는 점마저도 다른 곳과는 달랐다.
방 안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부서진 곳 한 데 없이 멀쩡했다. 아마 이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기물일 것이다.
호기심이 동한 그가 피아노를 향해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쓸어 보니 먼지가 하얗게 묻어났다. 뚜껑 아래에 잠들어 있던 건반들은 모두 멀쩡했다. 허리를 굽히고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 보았다. 조율은 나름 잘 되어 있었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혁명에 쓸 데도 없는 데다가 너무 무거웠다. 옮기다 파손될 확률도 높고. 고작 유희를 위한 악기는 자리도 많이 차지했다.
자일스는 간단한 소나티네 정도는 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연주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그의 출신 성분을 알고 있는 판국에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행위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피아노 연주 따위가 아니라 더 많은 벨담 귀족들을 찾아내 체포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큰 바람이 지나간 요새는 이마저도 뜸해졌지만.
자일스는 피아노를 내버려 두고 구석의 작은 문을 열어 보았다. 기름칠이 안 된 경첩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관리를 받지 못해 망가져 버린 악기들이 여럿 보관되어 있었다. 이 집의 주인은 음악을 꽤나 사랑했던 모양이었다. 돈 받고 갖다 팔지도 못하겠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자일스의 눈이 한쪽 구석에 가 닿았다.
커다란 악기 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콘트라베이스를 위해 만든 케이스 같았다. 자일스는 케이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지퍼가 열려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이걸 열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안에 들어 있던 건 콘트라베이스가 아니었다.
비쩍 마른 검은 머리 여자가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설마 이런 케이스 안에서 사람을 찾아낼 줄은 몰랐던 자일스는 잠시 당황했다. 얼굴 위에 쏟아진 머리카락 새로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보였다. 여자는 제대로 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속옷으로 사용하는 하얀 슈미즈 드레스가 전부였다. 앙상한 다리에 오래된 매질 자국이 눈에 띄었다.
한숨을 내뱉은 자일스가 물었다.
“넌 누구지?”
겨우 숨만 쉬는 지경인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단 한 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마냥, 여자가 두 팔로 자신을 감쌌다.
“이름이 뭐야?”
여자가 곧 대답했다. 말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된 사람 특유의 쉰 목소리였다.
“릴리예요.”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인가?”
“그,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이제는 릴리가 역으로 물어 왔다. 떨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 선연했다.
“나와 함께 살던 사람들, 그들이 나를 때렸는데…… 그래서 잡혀간 거죠? 사람을 때리고 괴롭혔으니까. 그래서 벌을 받는 거죠?”
“누가 널 때렸지?”
“백작님. 그리고 마리안나 백작 부인께서도…… 전부 다요.”
“그때부터 줄곧 이곳에 있었나?”
귀족들을 전부 끌고 나간 건 물론이고 일하던 사용인들도 전부 흩어졌을 터였다. 돈을 주고 사 온 사람이라면 뭐 하러 이런 폐가에 숨어 있었던 거지?
릴리가 대답했다.
“배가 고파요. 쓰러질 것 같아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여기 안에 누워 있었어요. 여긴 생각보다 아늑하거든요. 난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널 음식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
“안 돼요!”
돌연 그녀가 외쳤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공포가 요동쳤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안 돼요. 부탁이에요.”
“여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건 혁명을 위해 압수됐다. 네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어.”
“내가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따라가요? 날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도 모르는데.”
“신분증을 원하면 보여 줄 수 있어.”
“그래도 바깥에 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먹을 것을 준다고 하는데도 강경하게 거부하는 모양새가 의심스러웠다. 그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저택을 나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릴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자일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 저택에 살던 귀족들과 사용인들을 직접 심문한 적이 있었다.
‘명부에는 다섯 사람이 올라 있다. 네가 직접 보고 대답해. 여기 적혀 있는 마지막 이름. 가족이 맞나?’
‘……맞아요.’
‘우리가 체포한 건 네 사람뿐이었다. 이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거짓말이 아니에요. 걘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못 찾았겠죠.’
‘아아악! 정말, 정말이라니까요! 그년은 심지어 내 딸도 아니라고요! 천박하고 쓸모없는 년이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서 죽여 버렸어요. 몇 달 동안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고요. 시체만 겨우 남아 있겠죠. 믿어 주세요. 정말이에요…….’
‘막내 아가씨는 주인님께서 하녀를 통해 얻은 따님이세요. 말만 아가씨였지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신세셨어요.’
‘하도 풀이 죽어 계셔서 무엇이든 서툴고 부족했어요. 그래서 많이 맞기도 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어요.’
‘막내 아가씨를 못 본 지도 벌써 몇 달이 된 것 같아요. 아마 벌써 죽어 계실 거예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는 저택을 다시 뒤져서 시체를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얼마 후, 부하에게서 전갈이 왔다.
‘여자 시체를 찾았습니다. 벽장 안에 있더군요.’
시체는 그림 속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아무튼 귀족 부인의 진술과 일치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자일스는 아직도 그림 속 여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 물론 그림 쪽이 훨씬 더 예쁘고 행복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본디 초상화란 왜곡하기 쉬운 법이다.
그는 무언가 조작되었음을 느꼈다.
“한 가지 묻겠다.”
자일스는 릴리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네가 엘로이즈 비스마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