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8/218)

특별 외전 10화

* * *

“레티시아.”

“네, 아빠.”

레티시아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여행복도 갈아입지 못한 칼렌을 보았다.

그는 레티시아의 맞은편에서 브랜디 넣은 홍차를 마시고 있었고, 시온은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백마법사들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콘단의 무덤이 발견된 일을 숨겼는데, 이런 큰 일을 벌여?”

“게다가 그 콘단의 무덤은 가짜 였죠. 레티시아가 정보 길드를 이용해 낸 소문이었으니까요.”

이제 모든 전후 사정을 알아챈 제이드가 혀를 찼다.

“이제는 신문 기사 날조까지 아주 자유자재구나.”

“레티시아, 우리까지 속이다니, 너무하구나.”

“죄송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레티시아는 가족들의 눈치를 보았다.

“나이젤이 탈옥하면서 죄수 여럿을 죽인 다음, 벽에 피로 절 저주하는 내용을 적어 넣었다는데 어떡해요? 걸어온 도전을 받 아 줄 수밖에.”

레티시아는 말했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런 일을 할 정도의 흉악한 범죄자라면, 바깥 세상에선 더 큰 일을 칠 거라 생각했어요. 나이젤이 관여한 범죄가 무려 97개였잖아요?”

“아. 그래.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레티시아는 그제서야 미소 짓고,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그러니까 진짜 콘단의 무덤을 여는 방법이 네 머릿속에 숨겨져 있었다고?”

“그걸 심은 건 시벨이고요. 제 머릿속에 숨겨진 ‘콘단의 무덤을 여는 암호’를 푸는 방법을 아는 이는 나이젤이었고요.”

콘단의 무덤을 여는 방법은 단하나였다.

콘단의 무덤이 열리면, 백마법사 가문의 문양들 수십 개가 허공에 떠오른다. 그 문양 중 열개만을 ‘순서대로’ 열어야 콘단의 무덤은 열리게 된다.

“그러니까 일종의 퍼즐 암호랄 까요?”

“지금이야 콘단의 무덤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제이드가 말했다.

“발견되면 그 무덤을 네가 열 수 있겠군.”

칼렌이 거들었다.

“맞아요.”

즉, 콘단의 무덤에서 나올 보물 이며 무기들은…….

‘다 제 겁니다.’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그러면 이 청동 구슬은?”

제이드가 물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추론을 설명 했다.

“이 청동 구슬 두 개는, 제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백마법의 매개였을 거예요. 나이 젤이 백마법사는 아니니, 이 도 구를 이용해서 가능한 거였겠죠. 그리고 나이젤은 그 환상 속에서 절 심문했답니다.”

다름 아닌 세드릭을 이용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세드릭에게 필요한 정보이니 내놓아라. 이런 시나리오로 날 심문하려 한 거지.’

제이드가 말했다.

“남의 집 귀한 아이의 머릿속이 금고인가? 그런 걸 왜 심어 두 지?”

“글쎄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닥터 시벨. 그 사람은 믿을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혹은 변태니까. 뭐 분석이 필요하겠어요? 나쁜 놈들의 행실을 분석해 봤자죠.”

“아무튼.”

제이드가 말했다.

“다시는 백마법사들 일에 관여 하지 마. 나이젤도 마찬가지야. 네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평소처럼 나른한 제이드의 말에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속으로는 조용히 덧붙였다. 아무리 레티시아가 칼렌의 피 안 섞인 자식이라고 해도.

‘걸어온 도전을 참지 못하는 호승심은, 유전 이상으로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나 봐.’

그러니 이렇게 오싹할 정도의 스릴이 몸 안에 남아 있지 않은가?

‘그래, 나도 내 머릿속을 침략하는 공격은 처음 받아 봤거든.’

역시 악당들은 나날이 새로워.

레티시아는 입술을 핥으며 생각 했다.

며칠 뒤, 나이젤은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번엔 외딴섬에 감금되는 종신형을 받았다고 한다.

〈죽인다, 그 망할 년 죽일 거야!〉

재판장에서 나이젤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레티시아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느 수요일. 레티시아는 세드릭과 함께 공작가 근처의 작은 숲으로 소풍을 갔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가 절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네. 그러네요.”

레티시아는 도시락으로 싸 온 샌드위치의 마지막 입을 먹고 두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으음- 저도 안부도 여쭐 겸 뵐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하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으실 거 같죠?”

“네. 이번 추리는 쉽네요.”

레티시아와 세드릭은 동시에 말 했다.

“결혼하라고 압박하실 것 같은데요.”

“결혼 압박이겠죠.”

그리고 두 사람은 미소 지었다.

“좀 걸을까요?”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세드릭이 레티시아를 뒤따랐다.

“세드릭은 어떻게 생각해요?”

“레티시아, 난 당신과 간절히 결혼하고 싶어요.”

세드릭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압박하고 싶진 않아. 충분히 원하는 삶을 산 뒤, 나와 함께하도록 기다릴 거예요. 어차피 내 삶에 여자는 당신뿐이니까.”

세드릭의 말에 레티시아는 가슴 이 뭉클하고 알싸했다.

‘천사인가, 이 사람……. 정말 완벽한 남자야.’

〈네 이름 안에 갇혀 죽고 싶어. 난 널 가두고 싶어. 너를 미치도 록 원해. 온몸을 뜯어 먹고 싶을 만큼.〉

그렇게 말하는 오싹할 정도로 두렵고, 아름다운 세드릭도 인상 적이었지만…….

‘난 역시 이 사람이 좋아.’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나도 세드릭과 혼인하고 싶지 만요.”

“……역시 압박감이 있죠.”

“네! 당신 결혼하면 그 핑계로…….”

“왕위 계승을 압박하시겠죠. 결 국 일레프 형도, 전하도 모두 제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니까.”

“세드릭의 아내는 되고 싶어도 아직 왕비는 되고 싶지 않다고요.”

“그럼, 당분간은 지금 이대로가 좋겠네요.”

세드릭이 입술을 핥았다.

“좀 아쉽지만.”

“그 러게요.”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손을 잡고더 어두운 숲으로 천천히 산책하며 나아갔다.

“그런데 레티시아, 하나 궁금한 데요.”

“네.”

“당신 안의 숨겨진 암호, 그걸 캐내기 위해 나이젤이 보여 준 환상 말입니다. 그 안에서 도대 체 무슨 일이 있었죠? 혹시 내가 나왔나요?”

“아…….”

레티시아의 귀가 붉어졌다.

‘물론, 그 세계 안의 세드릭도 내게 협박 비슷한 건 했지만 전혀 강압적으로 굴진 않았어.’

먼저 키스한 것도 나였고.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세드릭만 생각하면 오싹하고 손끝이 저릿하며…… 조금은 무서웠다.

“그게……. 그 꿈에 나온 건 세드릭이 아니에요. 다른 남자였어요. 좀 잘생기고 날 사랑한다곤 했지만. 뭐…… 아무튼. 무서운 남자였어요.”

결국 레티시아는 둘러대듯 어물대며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다른 남자?”

세드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혔다.

“누가 당신 꿈속에, 아니.”

“…….”

“당신 머릿속에 있었는데요?”

응?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얼굴이 좀 익숙하다는 걸 떠올렸다.

‘이, 표정. 느낌은…….’

〈나도 인간성을 날조할 능력은 없거든.〉

‘인간성을 날조하지 않았다면. 그건 본성이라는 거야, 뭐야?’

그 순간 불현듯 레티시아는 그 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레티시아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날 갖고 싶고, 감금하고 싶고, 자기만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요. 하하…….”

“그래요?”

레티시아는 어느새 등에 나무가 닿는 것을 느꼈다.

사르르. 나뭇잎이 바람에 서로의 몸을 비비고, 그 아래 만들어진 그늘이 얼룩덜룩하게 세드릭의 얼굴을 수놓아서.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그늘진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거 유감이네요. 누군지 꼭 알려 줄래요? 찾아내게.”

“세드릭?”

레티시아가 세드릭을 보았다.

“화난 거 아니죠?”

“설마요.”

“……농담이에요.”

“…….”

“하하. 정말이에요. 제 꿈 안에 세드릭이 나오긴 했죠. 그 외에 다른 남자는 없었어요.”

“그럼 누가 당신을 협박한 건데?”

“어- 제가 착각했나 봐요. 다른 꿈이랑 잠깐 혼동했어요.”

레티시아는 둘러댔다.

“워낙 요즘 흉흉한 꿈을 많이 꿔서요.”

세드릭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정말요?”

“그럼요.”

레티시아는 말했다.

세드릭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마요. 알 았죠?”

“물론이죠!”

“네, 아주 좋아요. 착해요.”

세드릭이 레티시아를 내려다보 았다.

‘세드릭, 키가 이렇게 컸구나. 평소에는 그를 늘 편하게 생각하니 몰랐네.’

묘한 의문이 마음속에 돋아났다. 하지만…….

“개꿈이었지만 그걸 통해 역시 난 세드릭을 사랑하는구나, 라는 걸 느꼈어요. 꿈에서도 세드릭을 좋아한다고 느꼈거든요.”

세드릭은 그제야 맑게 웃으며 레티시아를 끌어안았다.

“기뻐요,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그럴 리가 없지. 세드릭이 얼마나 선하고 상냥한, 유약 하기까지 한 사람인데.’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품 안에서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이젤이 내 꿈 안에 따라 들어온 ‘꿈속의 세드릭의 기억’을 조작해 그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는 함정을 팠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리 없지. 하하, 나이젤이 헛소리를 하는 걸 거야.’

레티시아는 납득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 일에는 레티시아도 도무지 냉정해질 수 없었다.

‘지금이야 다정하고 잘 지내니 된 거지 뭐. 좋은 게 좋은 거.’

레티시아는 이렇게 간결히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세드릭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역시 당신은 주변 사람 일엔 순진한 게 좋아.’

세드릭은 레티시아를 품에 안은 채 생각했다.

“누가 레티시아에게 그러면 안 되잖아요.”

나만 보고 싶고, 죽을 정도로 사랑하고, 이 세상이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랑스러운지, 완벽한지 아는 게 아쉬울 만큼.

함부로 쥐면 부서질까 봐 두려운 사람인데.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미움 받을까 봐, 마음속의 지저분한 곳은 조금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이토록 저속할 정도로 지독히 사랑하는데.

‘다른 놈이 이 여자를 그렇게 바라보면 난 살 수 없을 거야.’

세드릭은 생각했다.

“사랑해요, 레티시아.”

세드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티시아의 손을 잡았다.

레티시아가 세드릭에게서 떨어져 배시시 웃었다.

“네, 나도요.”

세드릭은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종종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 심장이 멎어도, 후회 없을 것 같다고. 세드릭은 레티시아의 이름 속에 갇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세드릭이 찾아낸, 유일한. 완벽한. 단 하나뿐인 행복이었다.

세드릭은 미소 지으며 레티시아의 볼에 키스했다. 그거라면, 그거 하나라면. 앞으로도 그는 기꺼이 그녀만의 천사로 살 수 있 었다.

〈두 개의 구슬과 백마법사의 무덤〉

케이스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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