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218)

특별 외전 7화

* * *

뚜벅, 뚜벅.

이윽고 누군가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그 때 레티시아는 눈을 감고 차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레티시아야.’

칼렌의 자랑스런 양녀.

제이드의 양동생. 그리고 그 유명한 탐정 공녀 레티시아다.

한때는 레였던, 그 레라는 이름을 포함해 ‘레’티시아인. 레티시아.

‘우리 가족들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고. 무엇도 되지 못한, 뒷골목 거랭뱅이가 된 나의 미래.’

어쩌면 레티시아가 가장 무서워 할 미래.

‘아마도 누군가 이 세계를 창조 했다면, 날 아주 잘 아는 사람이 겠지.’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끼익.

지하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드릭이 문을 등진 채 의자에 앉은 레티시아의 뒤에 섰다.

레티시아는 향기만으로 그의 존 재를 느낄 수 있었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레티시아의 턱 아래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그건 승마용 채찍이었다.

“날 보자고 했다면서요?”

“네, 세드릭.”

“당신은 참 흥미로워. 일개 길 바닥 거지가 날 불러낼 수 있다니.”

“그 이유가 궁금해요?”

“물론. 언제나 우리 게으른 거렁뱅이 레 아가씨에 대한 건 흥 미진

진하거든.”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세드릭, 그건 너무 쉬워서 수수께끼라고 할 수도 없어요.”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드릭의 멱살을 잡았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세드릭이 말했다.

“아!”

레티시아의 몸이 책상 위로 올라갔다.

레티시아는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미소 지었다.

“첫 번째. 내가 자꾸 불온한 사건에 휘말리는 건, 그냥 운이 나 빴던 거예요. 범죄자들이나 미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특수 체질 이거든요.”

“……무슨 헛소리지?”

세드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런 나를 사랑한 유일한 ‘정상인 남자’가 세드릭이었다고요. 그러니까 이런 세계는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이번엔 레티시아가 세드릭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확 끌어당겼다.

세드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내 탓을 하면 안 돼요.”

세드릭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헛소리는 아무래도 좋아요.”

세드릭이 속삭였다.

“오늘은 내가 원하는 답을 줘야 할 테니까.”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손 아래 짚어진 문양들을 보았다.

“이런 문양을 골라내기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갈게요. 당신이 궁금해하던 수수께끼의 해답일 거예요. 집중해서 들어 줘요.”

레티시아가 세드릭에게 말했다.

“하나. 이 세계의 당신도 날 사 랑해요.”

“…….”

“난 레티시아예요, 세드릭.”

“…….”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고,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르지만.”

“…….”

“내 이름은 레티시아예요.”

그녀가 세드릭의 뺨에 손을 가 져다 댔다.

“이 모든 수수께끼 중 이게 제일 뻔한데 이게 제일 풀기 힘들 었다니까요. 역시 저한테 소중한 사람들은 약점인가 봐요.”

세드릭은 레티시아의 말에 전기라도 통한 듯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지금 올라간 당신의 이 맥박.”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목께에 손을 댔다.

“체온 반응은 둘째 치고, 세드릭 당신은 사실 남에게 별 관심 없는 성격이거든요. 아무리 다른 사람처럼 되었어도 난 잘 알아요. 원하지도 않는 여자를 이렇 게 바라볼 리가 없죠. 게다가, 날 지금껏 살려 뒀다면서요? 당신이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싱긋.

레티시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라는 이름만 받은 나.”

“…….”

“길거리 거렁뱅이. 가진 것 없고 무식한, 나란 여자를…….”

쪽.

레티시아가 세드릭에게 키스했다. 세드릭의 어깨가 크게 움찔 했다.

“좋아한다는 거죠. 얼마나 좋아 하는진 모르지만. 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원래 수십 번 키스한 사이거든요.”

참고로 더한 것도 했답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앗!”

세드릭이 레티시아를 책상 위에 거칠게 눕힌 것이다.

레티시아의 팔과 세드릭의 팔이 엮이고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세드릭의 얼굴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당신은 날 지독히 원하고, 가둬 두고 싶을 정도로 집착한다는 건데요.”

레티시아가 배시시 웃고 세드릭의 뺨을 톡톡 쳤다.

“혹시나 정말 미움 받는 게 아닐까 하고 긴장했다니까요. 어휴, 생각해 보니 어려운 건 하나도 없었는데.”

레티시아가 말했다.

“세드릭에게 미움 받으니까 심 적으로 충격이 와서. 뇌의 한 85%를 여기에 쓰다 보니 결론이 느렸네.”

세드릭이 레티시아의 옷깃을 다 시 끌어당겼다.

“당신은 날 원해요, 세드릭. 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에요. 있잖아요, 나 알아요.”

레티시아가 씨익 웃었다.

“당신, 저에게 각인했잖아요.”

그 어떤 세계에 가도, 어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단 하나. ‘라이칸슬로프의 각인.’

“넌 틀렸어.”

세드릭이 말했다.

“난 널 증오하고 분노해.”

“……왜요?”

“넌 나와 원수를 졌으니까. 나와 맺어지기에, 넌 너무 초라하거든.”

“…….”

“하지만 네 온몸을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널 원해. 내 인생을 증오 가득한 것으로 만든 네게 집착해. 널 부서질 때까지 내 손 안에 두고 싶을 정도로.”

세드릭이 말했다.

“빌어먹을, 널 원해. 널 증오하는 게 내 인생의 목표일 만큼, 널 생각하면 살인을 해도, 누군 가에게 고통을 줘도 현실을 사는 것 같지 않아. 그래. 널 너무 원해.”

세드릭이 말해 놓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세드릭이 내게 집착하는 마음만 남으면, 게다가 신분 차이가 나는 데다 가족이 엮인 원한 관계가 얽힌다면 결론적으로 우린 비틀린 관계가 될 수 도 있구나.’

레티시아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드릭.”

레티시아가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도 난 당신을 사랑하는걸요.”

“…….”

“내가 당신에게 줄 대답은 그것 뿐이에요.”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 그래?”

“상관없어요.”

레티시아가 눈을 깜빡이며 세드릭의 어깨를 밀어냈다.

“상대가 세드릭이라면 괜찮아요. 조금 부서져도 되어요.”

세드릭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길 가다가 뺨과 황금 벼락을 동시에 맞은 사람의 표정이네.’

“인정하시겠어요, 제 추리를?”

레티시아가 픽 웃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하, 심문은 어떻게 진행되시 는지요? 왕실 마법사를 불러올까요?”

문밖에서 울리는 거친 목소리. 그건 빈스의 목소리였다.

레티시아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럼 이제, 본게임으로 들어가 볼까?

“쉿.”

레티시아가 세드릭의 입에 손을 댔다.

“한 번만 더 입 열면 또 키스해 버릴 거예요.”

레티시아가 말했다.

‘아!’

그 말은 세드릭의 이성을 날려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세드릭의 손길이 거칠어진 순간…….

쿡.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목에, 아까 빼돌려 둔 고문용 침을 살짝 찔러 넣었다.

“레!”

“걱정 말아요. 잠깐 잠들 뿐이에요. 세드릭이 나한테 침술을 가르쳐 주었잖아요.”

내 남자 친구는 의술에도 조예 가 있다니 똑똑하기도 하지.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추리이자, 본게임으로 들어가 볼까?’

레티시아는 책상 위에 엎어진 세드릭을 부드럽게 의자에 앉혔다.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빈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쓰러진 세드릭과 책상 위에 앉아 빙글 미소 짓는 레티시아를 보았다.

“이게 무슨…….”

“입 다물고 들어요, 빈스.”

레티시아가 세드릭을 앉힐 때품 안에서 슬쩍한 단도를 꺼냈다.

“암호를 알려 줄 테니까.”

레티시아는 그 순간 요동치는 빈스의 눈빛을 보았다.

‘오늘도 정답. 정곡을 찔렀군.’

역시 내 추리는 백발백중이야.

“아, 역시 안 되겠다. 아빠가 수 상한 사람한테 이거저거 불지 말라고 가르쳤거든요.”

그런 수상한 사람인 당신에게 선물할 건, 흉기뿐.

“안 돼요, 싫어요, 대답하고 싶 지 않아요.”

그리고 레티시아는 단숨에 빈스의 목으로 단도를 날렸다.

빈스가 윽,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레티시아는 빈스의 시체를 유심 히 보았다.

빈스의 얼굴은 레티시아가 익히 아는 얼굴로 변모했다.

‘그래, 내 예상이 맞았어.’

그리고 빈스는 부스스, 모래처럼 흩어졌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다가갔다. 빈스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청동 구슬 한 개였다.

레티시아는 싱긋 웃으며 그것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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