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5화
* * *
레티시아는 밤새 꼬박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다리가 터지도록 돌아다녔지만, 확인한 건…….
‘공작가의 저택이 있던 곳이 폐허……잖아.’
정말로 공작가의 저택이 있을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길거리 사람들을 붙잡고 ‘르웰턴 공작가’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미친 사람 취급받았다.
결국 레티시아가 절망적인 기분으로 돌아온 건, 미사와 함께 사는 초라한 판잣집이었다.
“아휴, 머리 아파.”
레티시아는 먼지투성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생각했다.
‘이 집, 위생 상태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칼렌을 만나지 못한 세계의 나는 비참하구나.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다행히 레티시아는 집 안을 탈탈 털어 동전 몇 개를 찾아냈다.
‘일단 이 상태론 못 살겠다.’
다행히 칼렌과 가족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외한 이 세계는 모두 기억과 엇비슷했다.
‘좋아, 이제 이 세계에 대해 파악이 끝났어.’
레티시아는 그 돈을 싹싹 긁어 모아 밤새 영업하는 야시장 거리에 갔다.
그곳의 헌옷 상점에서 그럭저럭 입을 만한 옷을 하나 샀다.
‘일단 인간처럼 좀 차려입어 보자.’
그다음 레티시아가 향한 곳은 뒷골목의 우물가였다.
그곳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었다.
그 대신 그 우물 옆에 수도 펌프가 있어 빈민들은 그곳 수도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곤 했다.
‘이 우물가는 아직 있네.’
월터랑 아이들과 지냈을 때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망을 보며 몰래 몸을 씻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라서 좀 무 섭다.’
촤아악.
레티시아는 물을 길어 몸에 끼 얹었다.
마찬가지로 집 안에서 찾아낸 싸구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몸 단장을 했다.
‘그래도 영양 상태는 나쁘지 않고, 또 현실의 나랑 비슷한 얼굴이야.’
레티시아는 허술하게 옷을 걸친 채, 젖은 몸으로 금이 간 거울 안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는 것보다 키가 조금 작고, 그리고 야위었지만…….
“그래도 씻고 나니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나.”
메마른 뺨 위로 드러난 얼굴은 전생과 비슷했다.
‘이게 무슨 일이니? 물이 차갑고 배도 고픈 걸 보니 꿈은 아닌데……
레티시아는 자신의 뺨을 만졌다.
‘별별 사건을 다 겪은 나도 이런 기괴한 일은 처음이야.’
그렇게 쓰게 미소 짓고, 레티시아가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어?”
레티시아는 처음엔 무언가를 잘 못 본 줄 알았다.
“이거 뭐야?”
레티시아는 천천히 우물가로 다가갔다.
‘방금 우물에서 무언가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는데.’
레티시아는 우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누가 걸어 놓았는지 모를, 머리 위의 낡은 랜턴이 레티시아가 선 폐우물 지붕 아래서 삐걱, 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 시체?’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살던 곳이나, 이 이상한 세계나…….’
레티시아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 소가 걸렸다.
‘이런 미친 일이 밥 먹듯 일어 나는 거 하나는 똑같네.’
레티시아가 그 시체로 추정되는 것을 향해 손을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아!”
누군가 레티시아의 손목을 잡아 챘다.
“누구……?”
그 순간 레티시아의 코끝을 스친 것은 익숙한 향기였다. 제비 꽃 향 같기도 하고, 향나무 냄새 같기도 한 은은한 냄새.
‘세드릭!’
어둠 속에서 세드릭이 레티시아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거기 손대지 마.”
세드릭이 나직이 말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래?”
“어, 세드릭? 앗!”
세드릭이 레티시아의 손을 확 놓는 통에, 레티시아는 세드릭의 품 안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가슴, 단단해…….’
레티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레티시아는 자신의 차림을 깨달았다.
큰 셔츠 하나만을 걸친 채, 가슴의 단추도 다 채우지 않고 아직 물에 젖은 머리로 떨고 있는 모습.
세드릭의 보랏빛 눈동자에 묘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젊고 아름다운 악마.〉
〈백마법사에 관련된 일만 있으면 사람을 잡아서 죽을 때까지 이단 심문관 본부 지하실에서 고 문하고 그걸 즐긴대〉
〈아름다운 얼굴만으로 판단하면 안 돼.〉
‘그게 이 세계에서의 세드릭이 라고.’
만일 레티시아가 칼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정말 지금처럼 ‘별볼일없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세드릭에게 말을 걸 수도 없는 신분인 건 맞구나.’
게다가 이 세계에서 세드릭은 왕인 것 같았으니까.
“세드릭, 놔줘요.”
레티시아가 말했다. 심장이 터 질 것 같았다.
‘세드릭 무서워.’
만지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 닫는 그 순간이 두려웠다. 이성 적인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세드릭이 레티시아에게 몸을 굽히더니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또 나한테 끌려가서 혼나고 싶어?”
“그게 무슨……?”
“내가 한 번만 더 수상한 짓을 하면.”
세드릭이 레티시아를 벽에 밀어 붙였다.
“잡아가서 팔다리를 부러뜨려 새장에 가둬 키우겠다고 했잖아.”
“…….”
“평생 나 말고 다른 사람 얼굴 구경할 일 없이 살고 싶으면 내 눈에 띄라고.”
달빛 아래서 세드릭의 보라색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
“계속 내 눈에 띄는 건, 잡아가라는 친절인가?”
“어, 세드릭?”
그 순간 레티시아가 느낀 것은 약간의 오싹함이었다.
‘응?’
세드릭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한 순간…….
“농담이야.”
세드릭은 흥미 없다는 눈으로 레티시아를 놔주었다.
“…….”
휙.
세드릭은 레티시아를 지나쳤다.
“……으응.”
세드릭은 우물 아래를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못 참아.’
레티시아 안의 경계심이 드디어 꼬리를 내리고, 답답함이 폭발했다.
“세드릭, 정말 하나도 기억 안나요? 나랑 당신, 원래…….”
하지만 레티시아의 그 말은 가로막혔다.
“전하!”
세드릭의 부하가 튀어나와 큰 소리로 외치며 레티시아의 말을 끊은 것이다.
“검문에 걸린 자들, 모두 잡았 습니다. 그리고 이건…….”
“꺼내. 여기 우리가 찾던 물건 이 있는 모양이다.”
세드릭이 기사에게 명령했다.
허술한 차림의 레티시아를 본기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또 왜 이분의 눈에 띄셔서.”
“절 아세요?”
이번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곧 세드릭의 기사들이 더 몰려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물에서 끄집어 낸 건, 사람 모양의 거대한 밀짚 인형이었다.
‘허수아비?’
레티시아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안에 마약이 꽉 차 있어.”
세드릭이 말했다.
그 순간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맞다, 이 사건. 기억나!’
오래된 우물가에 인형을 걸어 두고, 그 인형 안에 ‘붉은 나팔꽃 마약’을 가득 채워 무인 거래를 하던 사건.
‘분명 이거 내가 세드릭이랑 해 결한 사건인데.’
그 사건에 관여한 사람이 있었다.
‘분명 이거 범인이…….’
하지만 레티시아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체포해.”
세드릭이 레티시아를 가리키며 명령했기 때문이다.
“난 이 일과 무관해요.”
“퍽이나 그렇겠네요. 이제는 마약 사건까지 연루되다니, 당신 참 대단한 여자네.”
“세드릭.
“자꾸 그렇게 내 이름 불러서 자극하면 재미없을 거예요, 거렁 뱅이 레 아가씨.”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레티시아의 몸을 밧줄로 묶었다.
“잠깐, 이게 뭐예요?”
“안 그래도 이 근처에 마약 밀 매를 하는 피라미들이 있다는 사 실이 거슬렸는데.”
세드릭이 부하 기사를 향해 말 했다.
“…….”
“뜻밖의 새까지 잡았네.”
세드릭이 차갑게 비꼬았다. 그리고 레티시아를 달랑 들어서 말 위에 태웠다.
“으아, 잠시만! 우리 대화로 해요!”
그리고 나란히 말에 올라탄 세드릭이 거칠게 말고삐를 당겼다.
결국 레티시아는 전리품처럼 세드릭의 말에 엎드린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