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218)
  • 특별 외전 4화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레티시아를 불렀다.

    “쉿, 레! 어서 이리와!”

    레티시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너, 누구야?”

    그 누군가는 레티시아에게 입을 막고 끌어당겼다.

    상대가 너무 막무가내로 손목을 잡아끄는 데다, 어두운 골목길로 데려가 레티시아는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누구…… 혹시, 월터?’

    레티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서야 레티시아는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미쳤니? 어쩌자고 사람들 앞에 나가? 우리 같은 애들이 대로변을 걸으면 사람들이 욕한단 말야!”

    그 사람이 레티시아를 놓더니 옷을 탁탁 털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라고 생각한 사람은 이제 보 니 여자였다. 아주 평범한,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낡은 옷차림의 여자. 거지보다 좀 나은 몰골이었다.

    ‘허드렛일에 익숙한 손. 그리고 까칠한 머리카락. 팔 근육과 손의 움직임.’

    아마도 빨래 하녀 같은 허드렛 일을 하는 하녀일 가능성이 90%.

    레티시아는 그녀에 대해서 그렇 게 평가했다.

    “누구세요? 도대체 여긴 어디에요?”

    “어디라니?”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미사.”

    “……미사?”

    “얘 왜 이러니? 나 기억 안나?”

    “…….”

    “너랑 길바닥에서 같이 자란 거지 동료, 그리고 룸메이트인 미사. 그게 나야.”

    “그랬……어?”

    레티시아는 놀라 말했다.

    ‘그러니까…… 거지인 내가 커서 같은 거지 출신 친구와 산다라. 이상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이 세계, 도대체 뭐야? 내가 몰랐던 사람들이 튀어나오네?’

    레티시아는 경악했다.

    “너, 손님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정신 차려!”

    “손님?”

    “응, 장사 안 해?”

    “무슨 장사?”

    레티시아는 얼굴을 확 구겼다.

    “정보 팔아야지! 너 그걸로 먹고살잖아.”

    그런 설정이란 말인가?

    “……나 직업이 있긴 했구나.”

    거지가 커서 거지가 된 게 아니 구나.

    레티시아는 안도했다.

    “집……. 그래. 집이 있다고 했지? 일단 집으로 안내해 줘.”

    레티시아는 그렇게 말했다.

    ‘배가 고프고 팔다리가 저릿한 걸 보니 이건 꿈이 아닌데.’

    그렇다면…… 환상 마법?

    ‘혹은 나, 함정에 빠진 건가?’

    레티시아의 손에 죽은, 백마법사 시벨. 레티시아는 이미 최면 술이 특기인 그에게 비슷한 일을 당한 적 있다.

    ‘이것도 최면술의 일종인가? 아 니…… 혹은 백마법일 수도 있지.’

    레티시아는 지끈대는 머리를 부 여잡았다.

    ‘기억해 보자. 내가 이 이상한 세계에 오기 전에 뭘 했는지.’

    분명.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고…….

    그다음.

    ‘편지, 무슨 편지를 읽었지?’

    그리고 겨우 떠오르는 건.

    ‘구슬? 무슨 구슬 같은 걸 본 것 같아.’

    〈언제까지나 그대로만 있어 줘요, 세드릭.〉

    〈안녕하세요, 아가씨.〉

    〈이 물건을 넘기게 되어 죄송합 니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몇 사람의 목소리와 글귀들이 교차했다.

    하지만 도통 뚜렷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건 긴 의자 위에 누워 잠을 청하던 자신의 모습뿐.

    ‘생각해 보자…….’

    〈레티시아, 선물을 줄게요.〉

    그 순간 레티시아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눈을 감고 나를 봐요. 내가 당신에게 가르쳐 주는 걸 똑똑히 기억해야 해요.)

    책상 위에 앉은 레티시아. 그녀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나비장 식을 머리에 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레티시아의 앞에 누군가 시계추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 재수 없는 목소리는, 시벨?’

    그런데 이건 언제 적 기억이지?

    “아야!”

    레티시아는 그때 갑자기 멈춰선 미사 때문에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여기야?”

    레티시아는 두통을 느끼며 물었다.

    “그래. 일단 집에 들어가자.”

    미사가 레티시아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레티시아는 그제서야 주변을 돌 아볼 수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라고? 그럼 헛간은?”

    “얘 진짜 왜 이러니? 왕이 널 협박해서 정말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미사가 말했다.

    “여긴 우리가 밤에 잠만 자는 곳이고, 대로변의 버려진 헛간은 네가 정보 장사하는 곳이잖아?”

    “그랬……나?”

    보아하니 레티시아가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있던 헛간,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일단 집이 있으니 그냥 거지는 아니고, 빈민인 건가?’

    어느 쪽이든 암울했다.

    레티시아는 천천히 어두컴컴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내 집이라고요?’

    이게 집이라면, 나무꾼의 오두 막도 궁궐이었다.

    판잣집이라는 말도 부족한 누더기 건물. 천장 여기저기엔 빗물이 샌 흔적이 있고, 낡아 썩는 목재 냄새가 나는. 방이라고 하기도 부족한 폐허였다.

    ‘으앙- 내 인생 어떻게 해!’

    우리 가족들이랑 집 돌려줘!

    레티시아는 울고 싶었다.

    “저기, 공작가는 여전히 메인 스트리트 쪽에 있지? 칼렌 드 르웰턴! 맞아. 아빠는. 아빠는 어떻게 되었어? 이럴 때가 아니야. 공작가에 가야겠어.”

    “르웰턴? 그게 누구야?”

    미사가 귀신 보는 눈으로 레티시아를 보았다.

    “이 나라엔 공작가가 없는데?”

    “그럴 리가. 네가 잘못 아는 걸거야.”

    “아니야, 정말 공작가가 없어. 네가 나한테 알려 준 사실이잖아. 이 나라는 공작이 없어서 왕권이 강하다고. 그런 말이었어.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네가 바보라고 말하고 세 번이나 설명해 주었잖아.”

    “…….”

    레티시아는 후두부를 한 대 얻 어맞은 것 같았다.

    ‘안 돼! 우리 가족들!’

    “그럼 성녀는?”

    레티시아는 마리아네를 떠올렸다.

    “성녀가 뭐야?”

    미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곳에 있는 게 뭐야?”

    레티시아는 미사와 대화 끝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은 비렁뱅이 레티시아. 평판이 좋지 않은 게으름뱅이 정보상.’

    ‘칼렌과 마리아네와 제이드를 비롯한 가족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드릭은…….

    “그럼 세드릭, 그 사람은? 그는 날 아는 눈치였는데.”

    “너 정말! 그 악마의 이름을 자꾸 부를래? 베스티온 국왕 전하 말하는 거지?”

    “악마? 그 사람이 왜? 폭군이라도 돼?”

    “무섭단 말이야. 그 사람에게 숙청당한 귀족이 몇 명인데. 얼마 전엔 마을 하나를 청소해 버렸다니까! 아이 한 명도 살려 주지 않았대.”

    “……왜?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상냥한 사람인 걸.”

    “상냥?”

    미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다고 했지. 아주 오래전에는 말야.”

    “오래전이라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이어지는 미사의 말 또한 가관이었다.

    〈베스티온 전하의 가족들을 백마법사의 잔당이 몰살했잖아.〉

    〈그 이후, 그는 왕위에 올라 백마법사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가문들을 참살했어.〉

    〈너 빼고 관련자는 다 죽었다고!〉

    〈얼마 전에 참살된 마을 사람들도 백마법사들의 후계자들이 숨어 사는 마을이었대.〉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해 물었다.

    〈내가 왜 관련자야?〉

    〈너는 정보상이잖아. 먹고 죽을 돈도 없지만 찌끄러기 정보 팔아서 먹고사는 정보상.〉

    그리고 미사는 말했다.

    〈네가 백마법사 잔당에게 정보를 팔았어.〉

    〈선왕의 일가가 비밀리에 별장으로 놀러 간다는 정보를 말이야. 그리고 백마법사들은 별장으로 향하는 숲속에서 왕족들을 참 살했지. 그리고 그 시체를 왕실의 별장에 널어 두었어.〉

    〈그때 그는 몰살된 가족들을 제 눈으로 보았지.〉

    말도 안 돼.

    레티시아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럼 세드릭이…… 그 사람이 왜 날 살려 둔 건데?〉

    〈나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넌 그 사람에게 눈엣가시라는 거지. 게다가 넌 유명하잖아.〉

    〈뭘로 유명한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사는 말했다.

    〈정말 더 아는 게 없냐고? 어, 사실은 말이야. 지난번에 전하가 왔을 때 하던 말을 엿들었어. 네가 그의 가족들이 남긴 ‘유언’의 단서를 숨기고 있었다던데.〉

    〈혹시, 너 뭐 물건 훔쳤어?〉

    〈그 유언을 찾아내면 그때야말 로 널 처형하겠다고 하던데? 거 지 주제에 왕을 거스르고 살아남은 여자는 너뿐일 거다.〉

    〈…….〉

    〈그 사람이 널 증오하냐고?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그럼난 야간 빨래 일 하러 간다. 요즘 여관들이 성수기거든!〉

    이렇게나 세상에서 제일…….

    “운 없는 여자라니.”

    레티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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