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완결 (208/218)
  • 사흘 전. 내가 공작과 처음 만난 날.

    그날 나는 5분 뒤 내 인생을 바꿀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누가 버린 신문을 쥐고 코를 박고 있었다.

    "왜 이런 걸 봐? 너도 매춘부가 되면 돈 많이 벌 텐데."

    혹시 몰라 말하지만, 내게 이렇게 말하는 월터는 좋은 애다.

    우리 빈민가의 거지 아이들은 매춘부가 뭐 하는 건지도 몰랐다. 코르티잔(그게 매춘부라고 들었다. )이 되면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이 있었다. 코르티잔은 매일 과자도 먹는다고 했다.

    음, 달콤한 과자.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시끄러워. 집중하는 중이야."

    나는 옆에서 자꾸 말을 거는 월터가 귀찮았다.

    아홉 살의 나는, 읽을 줄 아는 글자가 몇 개 없었다. 하지만 신문에서 구직란을 찾는 방법은 알았다.

    하, 녀, 모, 집…….

    좋아. 오늘은 네 글자나 읽었다.

    "너 글도 읽을 줄 모르잖아."

    "몇 자는 읽을 줄 알거든. 엄마가 죽기 전에 나한테 그랬어. 이 거리를 나가서 직업 구하라고. 그래야 팔자 고친대."

    "팔자가 뭔데? 어떻게 고쳐?"

    "고치기 힘든 거긴 하지."

    하긴. 거지가 커서 거지될 가능성이 제일 높긴 하다.

    "저 키 큰 남자 돈 많아 보이지 않아?"

    "저기 빨간 모자 쓴 사람?"

    "아니. 저기 까만 옷 입은 사람."

    역시 월터는 착하다. 돈 많아 보이는 신사는 늘 내게 양보해줬으니까.

    나는 주로 구걸로 먹고살았다.

    친구들 말로는 내가 얼굴이 귀여운 편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잘 줬다.

    내가 구걸에 성공하면 그날은 다 같이 빵 먹는 날이었다. 그게 내 인생을 바꾸는 기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기요, 동전 한 닢만 주세요."

    나는 신사에게 다가가 애원했다. 그리고 흐읍, 숨을 들이켰다.

    '와 진짜. 오지게 잘생겼다.'

    검은 머리는 짙었고 그 아래 독특한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보석이 이런 색일까?'

    진짜, 너무, 와아. 잘생겼다.

    "비켜라. 바쁘다."

    사내는 까만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매정하게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남자의 맨손에 닿는 그 순간, 이상한 기억이 내 머릿속을 점령했다.

    '어?'

    〈가망이 없습니다.〉

    〈유나야, 사랑해. 남은 시간이라도 하고 싶은 걸 다 하렴.〉

    〈너 이런 소설 좋아하지? '르웰턴 공작가의 나날들'.〉

    남자에게서 밀려나며 난 남자의 회중시계를 보았다.

    칼렌 드 르웰턴.

    호주머니에서 삐져나온 그것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난 글자를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이름만은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똑딱. 회중시계의 초침이 몇 번 움직일 시간. 그 사이에 난 많은 기억을 엿봤다.

    '……어?'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전생에 한유나라는 이름의 시한부 소녀였던 것을.

    '이 기억은 뭐지?'

    번개처럼 꽂힌 기억들이 펑펑 밀려들어 왔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사실을 눈치챘다.

    '내가 소설 속에 살고 있었다니.'

    그걸 어떻게 눈치챘느냐고? 붉은 눈에 검은 머리, 남색 깃을 댄 정장. 소설 속에 숱하게 묘사된 르웰턴 공작의 묘사와 똑같았거든.

    남자의 이름은 칼렌 드 르웰턴.

    눈앞의 사내는 〈르웰턴 공작가의 나날들〉 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젠장. 그 자식이 어디 간 거지? 벌써 여길 뜬 건가?"〉

    그리고 그 대사까지도.

    '……르웰턴 공작의 일상 3화. 붉은 모자 살인 사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피폐한 다크 소설. 르웰턴 공작 가문 이야기. 어둠 속에 사는 권력자 히어로. 르웰턴 공작.

    〈"젠장. 그 자식이 어디 간 거지? 벌써 여길 뜬 건가?"〉

    칼렌은 생각했다. 늦으면 범인이 기차에 올라타 버릴지도 모른다.

    범인은 붉은 모자를 쓴 사내였으나, 칼렌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그자는 옷을 갈아 입고 붉은 모자를 쓴 채 빈민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칼렌이 기차역을 향해 뛰어가자 그는 빈민굴에서 학살을 시작했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의 피로 바닥에 강이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당한 사람은, 월터라는 이름의 빈민 소년이었다.〉

    뭐? 월터가 죽는다고? 빵 한쪽도 나눠 먹는 우리 친구가?

    "이봐, 꼬마! 정신 차려!"

    칼렌의 싸늘한 외침이 내 귀를 때렸다. 난 칼렌의 품에서 몇 초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칼렌은 기차역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칼렌의 옷자락을 잡았다.

    내게 이렇게 센 힘이 숨겨져 있었나?

    "……붉은 모자를 쓴 수상한 사람이 있었어요! 기차역으로 가는척하고 골목에 숨는 걸 내가 봤어요! 악마 살인마 윌리엄의 현상 수배 포스터와 똑같아요!"

    태어나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뭐라고?"

    칼렌이 섬뜩한 눈으로 천천히 나를 보았다. 저절로 내 어깨가 굽었다.

    "정말로 봤니, 꼬마야?"

    "저기예요, 얼른 가요. 기차역으로 가면 안 돼요. 사람이 죽어요!"

    나는 악을 쓰듯 외쳤다.

    칼렌은 알 수 없는 힘에 끌리듯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곧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났다.

    "오늘 개 잡는 날이구나. 응? 지금껏 운 좋게 도망쳐서 좋았지?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손으로 직접 때리는 재미로 살거든."

    나는 힐끗 골목 안을 엿보았다.

    악마 살인마. 밤이면 술에 취한 행인들을 납치해 아지트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다 죽인 윌리엄. 그리고 현재 현상 수배 중인 범인.

    방금 떠오른 정보다.

    그 윌리엄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무언가에 묶인 듯, 검은 연기 같은 것에 둘러싸여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흑마법이다.'

    그 뒤는 소설 속에서 읽은 내용과 똑같았다.

    -퍽, 퍽!

    비명을 지르는 소리. 그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칼렌은 손에 든 로드로 사내를 내려치고 있었고, 그의 매끈한 구둣발은 사내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살면서 피를 본 건 처음이었다.

    '히익!'

    칼렌은 그자를 패다 말고 머리를 넘겼다.

    '도망치자.'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때 칼렌이 눈을 들어 정확히 나를 보았다.

    "이리 와."

    나는 곧 칼렌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아파요!"

    그는 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칼렌의 손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무서워.'

    그의 붉은 눈과 마주치자 몸이 발발 떨렸다.

    "놔주세요……."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안에는 경찰도 섞여 있었다. 칼렌은 주위를 돌아보다 급하게 명함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내 이름은 칼렌 드 르웰턴이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를 찾아와. 알겠지? 네가 준 '도움' 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다."

    칼렌이 나를 놔주었다.

    경찰들이 몰려들었고 나는 황급히 뛰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겪은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세계가 소설 속의 세계라고?

    '왜? 도대체 어떻게?'

    중격과 공포 그 자체가 아닌가! 나는 내 손을 보고 하늘을 보고 내가 사는 빈민굴을 보았다.

    '거기다 하필이면 거지 엑스트라?'

    이 세계에서 내 역할은 정말 하찮았다. 그저, 길거리 풍경 묘사에 가끔 나오는 조연. 길에서 '여기 시체가 있어요!' 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구걸하는 역할이었다.

    '나, 매춘부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멍청했구나.'

    이대로면 내 인생, 답이 없다.

    '나 이제 거지로 인생 종 쳐? 글도 못 읽고, 이 세계에서는 맛있는 걸 먹어 본 적도 없는데.'

    전생의 나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죽은 소녀였다.

    병실 밖으로 거의 나가 본 적이 없다. 머리는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늘 책을 읽거나 퍼즐이나 스도쿠 게임 같은 걸 하고 있었으니까.

    부모님은 날 안고 다음 세상에라도 꼭 건강하고 행복하게 태어나라고 했다. 그 서러운 울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진짜 건강하게만 태어날 게 뭔데!'

    나는 며칠을 골목길의 내 아지트에서 앓았다.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

    어차피 거지로 살 거라면 차라리 지난 삶이 더 나았다. 거긴 차라리 안전이라도 하니까.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서러워.

    그렇게 사흘을 내리 앓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골목길에서 신문지와 기운 담요를 덮고 있었다.

    "이거 뭐야?"

    나는 담요 위에서 무언가 후드득 떨어지는 걸 보았다.

    "꽃……?"

    처음 보는 빨간 꽃이었다.

    '나팔꽃 같은데? 비싼 꽃 같아.'

    꽃의 가운데에는 금색 줄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뒷골목의 꽃마차에서 꽃을 파는 오빠는 꽃이 많이 남은 날에는 종종 애들에게 공짜로 꽃을 나눠 줬다.

    '받은 걸 누가 나한테도 주고 갔나 봐.'

    나는 코를 훌쩍이며 생각했다.

    꽃이 몇 송이나 흩어져 있었다.

    내가 덮은 신문지 위에도.

    "어?"

    그 순간, 나는 신문지에서 눈에 띄는 글자를 보았다.

    하, 녀, 모, 집.

    내가 겨우 읽어 냈던 글자였다.

    '차라리 하녀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날 누가 하녀로 써 주겠어?'

    그 순간, 나는 하녀 구함 옆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이 글자는……!'

    나는 칼렌이 내게 준 명함을 꺼내 글자 모양을 비교해 보았다.

    '동그랗고! 네모지고! 맞아, 분명 똑같은 글자야. 이 글자, 읽을 수 있어.'

    하녀 모집. 르웰턴 공작가.

    툭. 나는 신문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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