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18)
  • 88 화

    * * *

    방 안에서의 짧은 휴식도 잠시, 곧 칼렌이 날 데리러 왔다.

    "저녁 식사 전에 엘레나에게 인사하자."

    "네."

    칼렌은 나를 데리고 복도를 지나 가장 깊은 방으로 향했다.

    칼렌이 안내한 방 한복판에는 어른들이 죽 서 있었다. 그리고 방 가장 안쪽 큰 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저분이 엘레나?'

    아까 애기들을 무릎에 올리고 있던 푸른 옷의 할머니. 딱 봐도 가장 중요한 인물 같았다.

    중년 아저씨와 할아버지들 사이, 중앙석에 앉아 있었으니.

    '이 세계에서 머리 짧은 여잔 처음 봐.'

    단발. 난 살짝 티 안 나게 내 머리끝을 만졌다. 나도 크면 단발해 볼까?

    "공작가에 영광을."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엘레나(로 추정되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다들 오랜만에 뵙는군요."

    칼렌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란 느낌. 아저씨들이 일어나고 나서야 엘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서 와라, 칼렌. 집에 오는 일이 참 잦는구나."

    "보자마자 비꼬시는 건 아니지요. 내 딸을 소개하러 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어떤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은 거랑 좀…… 다르구나."

    엘레나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알아요. 평범하죠?

    '신문이 문제야. 천재 아님, 평범함. 하고 이마에 써 놓고 다녀야 하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렌은 오늘도 직진이었다.

    "제가 왜 왔는지 아시죠. 내 딸을 가문의 적에 올려 주십시오."

    "앉지도 않고 본론부터 말하는 거냐?"

    엘레나는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다.

    "빨리 끝내고 내 딸에게 남부를 보여 주고 싶어서요."

    칼렌이 말했다. 사람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진다.

    "일단 인사부터 하자. 난 엘레나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엘레나 님."

    나는 배운 대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엘레나가 손짓했다.

    "이리 오렴. 어떤 애인지 좀 자세히 봐야겠다."

    엘레나가 자신의 무릎 쪽을 손짓했다.

    '여기서?'

    나는 방금 본모습을 떠올렸다.

    "저? 바로…… 지금요?"

    "그럼. 어서 이리 와."

    엘레나는 오히려 내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언뜻 엘레나를 보았다.

    와, 멋진 중년 할머니다. 입가에 주름이 새겨져 있지만 이렇게 예쁜 할머니 처음 본다.

    '무릎이 안 좋으시다는데?'

    내 아까 걔네에 비해 너무 크지 않나? 에라 모르겠다. 나는 아까 그 애들처럼 엘레나의 무릎에 앉았다.

    갑자기 주변이 싸해졌다.

    '나 뭐 잘못했어?'

    시온이 웃음을 겨우 참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시온? 그런 뜻 아니었어?

    칼렌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레티시아, 앉으려면 아빠 무릎에 앉아야지."

    "아빤 서 계시잖아요."

    "지금 앉으면 되잖아."

    칼렌은 냉큼 권하지도 않은 의자에 앉았다. 엘레나 바로 옆, 역시 상석으로 보이는 의자다.

    그보다 집에서도 칼렌 무릎에 앉지 않는데.

    "풉."

    결국 엘레나 주변에 서 있던 중년 귀족 중 한 사람 - 아마 남부 회의의 멤버 중 한 명이겠지? - 이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리고 여럿 풉 터졌다.

    "공녀님이 다리가 아프셨나 봅니다."

    "연약해 보이시는데 의자부터 권유하지 않고 다들 뭘 했는지."

    어떤 사람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소!"

    "아니, 방심하지 말기로 했기로서니 웃지도 못해?"

    어떤 사람들은 뜻 모를 말을 소곤댔다.

    "이 애는 너를 바로 자리에 앉게 만드는구나. 남부에 오면 오래 머무르지 않고 부리나케 돌아가던 너인데."

    엘레나가 묘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칼렌은 대답하지도 않고 내게 손짓했다.

    "빨리 이리 와."

    나는 움직이려 했다. 엘레나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애 좀 살펴보자. 성질 급하긴, 어릴 적과 하나도 안 변했구나, 칼렌."

    엘레나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신 앞에 선 나를 꼼꼼히 나를 살폈다.

    "왜 내 무릎에 앉은 거니?"

    "방금 전에 아이들이 엘레나……, 님의 무릎에 앉은 걸 보아서요."

    나는 성안으로 들어오며 본 광경을 말했다.

    "아. 그 애들은 하인의 자식들인데 내가 예뻐하지. 내 무릎에 숄을 덮어 주기에 과자를 준 건데."

    ……그랬단 말인가.

    와, 내 어떻게 해?

    '각도 때문에 잘못 봤구나!'

    애들이 무릎에 앉은 걸로 나 지금 흑역사 만든 거야? 내 표정을 본 엘레나의 입가가 씰룩였다.

    "……귀엽긴 하구나."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특히 칼렌은 하나도 안 닮았어."

    그거야 친딸이 아니니까.

    "다행인 일이죠. 내 판박이는 제이드 하나로도 충분해서."

    칼렌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순간 남부 회의의 아저씨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걸 난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공작 가문의 피는 아주 귀하다. 양자가 적에 올라간 건 거의 없는 일이야. 만일 그렇게 하려면 이 아이의 자질을 봐야겠다. 귀족으로서 교육받았는지, 아닌지."

    "아가씨는 아직 교육받으신 지 몇 년 되지 않으셨습니다. 햇수로는 2년이 좀 넘는 정도지요."

    시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놀라울 정도의 성적을 내고 계시기도 하고요. 책을 잡으시기보다 그런 점을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엘레나 가주 대리님은 관대하시지 않습니까?"

    엘레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온, 감히 어디라고 입을 여는 거냐? 고용인을 귀여워하는 나쁜 버릇을 아직 못 버렸구나, 칼렌."

    그러자 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시온……, 이분 안 관대한데요.'

    나는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나 때문에 혼나서 미안해요.

    '그런데 칼렌 앞에서 할 말을 다 하시는구나.'

    이런 사람은 처음 봐. 좀 무섭지만 놀라운 엘레나.

    "난 어느 상황이든 내 딸과 아들을 챙기라고 집사를 가르칩니다. 딱히 일일이 가르쳐야 할 만큼 모자란 놈도 아니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칼렌은 까도 내가 깐다는 성격인가 봐. 시온을 그렇게 놀리면서 편드는 걸 보면.

    하긴 그게 우리 아빠지.

    나는 슬쩍 웃을 뻔했다. 칼렌이 시온 편을 들어줘 안심했다.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숙모님께 약하긴 해도복종할 만큼 약한 건 아니라는것을 아실 텐데요. 계속 존중하게 해 주시죠."

    칼렌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또 그거. 악마처럼 매혹적인 악당 미소.

    "그래야 남부가 평화롭지."

    꿀꺽. 칼렌이 나직하게 한 말에 남부 회의의 사람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딱 한 명, 엘레나만 태연했다.

    "일단 오늘 밤 만찬회 때 결론을 말하마. 우리 모두를 파면할 권리가 있는 건 알지만 우리에게도 저 애를 적에 올리는 걸 동의하고 말 권리가 있는 걸 잊지 말거라."

    엘레나가 나를 보았다. 시선이 좀 누그러진다.

    "오늘 밤의 만찬회는 새해 무도회를 겸하는데, 그 연회에 이아이도 데려오렴. 어쨌든……. 네 양녀니 남부에 선은 보여야 하지 않니?"

    칼렌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시온, 레티시아를 준비시켜."

    * * *

    그래서 나는 어른들의 만찬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직 무도회는 이르신데."

    시온이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시온이 가져와 하녀의 도움으로 입은 드레스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시온, 하지만 이 드레스를 가져온 걸 보면 어느 정도 예상한 거 아니에요?"

    "남부는 보수적이라서 행사가 많습니다. 이때쯤이면 무도회나 만찬회가 많으니, 한 번은 참석하게 되실 거라 생각했죠. 오늘은 그냥 정식 데뷔 탕트 전의 연습이라 생각하세요."

    시온은 역시 대단한 집사다.

    그가 빠른 눈치로 수도에서 보내라고 미리 명령해 둔 옷은 나를 위해 맞춰 둔 어린이용 무도회 드레스였다.

    잔잔한 꽃무늬가 금실과 은실로 잔뜩 들어간 소매가 부푼 초록색 드레스. 허리 부분이 높고, 가슴 바로 아래에서 퍼지는 디자인이다.

    머리에는 금장식을 나뭇잎 모양으로 엮어 만든 헤어밴드를 썼다. 그리고 머리는 그냥 풀었지만 양옆 한 가닥씩을 땋았다.

    다 꾸며 놓고 보니 내 스트로베리 블론드가 더 풍성해 보였고 결도 좋아 보였다. 눈동자도 반짝반짝해 보여.

    "이 드레스, 수도에서 입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굳이 비유하자면 수도에서 입은 드레스는 샤랄라 한 게 많았다. 그런데 이 드레스는 고전적이라고 할까?

    "남부는 고루한 전통이 많은 곳이라 어린이 드레스도 이런 스타일이 많죠. 하지만 아주 어울리십니다. 남부에서 제일 귀한 아가씨 같아요."

    나는 시온의 말에 웃었다. 역시 시온은 다정해.

    "만찬회 예절이나 춤은 다 배우셨지요?"

    "네에……."

    하지만 실전은 처음인데.

    "오늘은 그냥 눈도장을 위해 나가는 자리이니 걱정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도회면 파트너 없이 참석해도 돼요?"

    "파트너가 왜 없으십니까? 공작님이 직접 아가씨를 에스코트하실 겁니다."

    문이 열렸다. 머리를 넘기고 검은 정장을 입은 칼렌이 들어왔다. 와아…….

    '뉘 집 아빠인지 참 잘생겼다.'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칼렌은 잠시 나를 훑어보았다.

    "놀랄 정도로 예쁘구나."

    칼렌이 말했다. 기분 좋은 말이었다.

    "아빠도 멋져요."

    "내 딸은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 격이 되겠군. 너처럼 예쁜 애는 없을 터이니."

    "거기다 최연소 참가자시죠. 보통 만찬회도, 무도회도 아이들은 참가하지 않으니까요."

    시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두 분, 다녀오십시오."

    시온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칼렌의 손을 꽉 잡았다.

    "아빠, 저 이제 조금이라도 귀족적으로 보이나요?"

    엘레나는 내가 귀족으로 교육받았는지 보겠다고 말했다. 나, 아직도 뒷골목의 거지 출신인 티가 날까?

    "그 이상이지. 넌 정말 놀랄 만큼 완벽하게 자라고 있어."

    칼렌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좋겠어요……. 저, 아빠의 망신이 되긴 싫거든요."

    사실 내 평가는 아무래도 좋다. 그게 제일 걱정이다.

    "넌 내 딸이니, 상관없어. 누가 비난하면 다 일러."

    나는 구두 안에 갇힌 발가락을 꼼지락 댔다.

    칼렌은 평소처럼 성큼성큼 걷는다. 조금 따라가기 버거웠다.

    처음 신는 무도회용 구두는 금색이었다. 발볼이 좁고 구두 굽이 딱딱해 아팠다.

    "걸음이 평소보다 느리군."

    "무도회 신발을 처음 신어 봐서요."

    어? 내 말이 끝나자 칼렌은 나를 휙 안아 올렸다.

    "이 남부 성은 쓸데없이 넓기만 해서 말이다. 계단도 많고."

    나는 다시 아홉 살이 된 기분을 느꼈다. 칼렌은 가끔 제멋대로다. 물론 싫진 않다. 이윽고 연회장 앞에 도착했는데…….

    '나 안 내려 줘?'

    칼렌은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당당하게 연회장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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