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18)
  • 87 화

    * * *

    레티시아와 칼렌, 시온이 공작령인 남부에 도착했을 때, 유난히 날이 흐렸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마차가 마중을 나왔다. 그 마차를 본 게이트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공작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남부의 군주에게 예를 올립니다."

    칼렌은 익숙한 듯 레티시아를 마차에 태웠다.

    '남부에서 공작가의 위세가 굉장하구나.'

    레티시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공작 가문의 성은 먼가요?"

    "근방입니다. 마차로 한 시간이 안 걸립니다."

    얼마를 달렸을까? 곧 마차는 양 갈래 길에 접어들었다. 한쪽은 울창한 숲길, 한쪽은 숲을 돌아서 난 조금 더 거친 길이었다.

    마부가 말을 멈추더니, 창문을 두드렸다. 칼렌은 창문을 열었다. 마부가 모자를 벗고 공손 히말 했다.

    "숲 옆길로 빠져서 좀 돌아가겠습니다."

    "상관없으니 숲을 가로질러가."

    "네?"

    마부가 사색이 되었다. 레티시아는 마부에게 물었다.

    "숲길이 험한가요?"

    "아니요, 길은 다 정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마부가 우물쭈물했다. 그 표정에 칼렌은 피식 웃었다.

    "아직까지도 그런 미신을 믿나?"

    레티시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미신이라니? 숲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곧 마차가 숲길로 들어섰다.

    레티시아는 창가를 기웃댔다.

    그러다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한 사내가 마차 창문 밖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었다. 마차는 숲길 옆으로 빠져있었다.

    "멍청한 놈아! 내가 이 숲길이 용하지 말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저는 급하다고 하시기에……!"

    "아무리 급해도 이딴 음침한 길로 와? 여기 사람들은 이 길 피하는 게 상식인 거 몰라?"

    화통 삶아 먹은 듯 큰 목소리였다. 각도 때문에 얼굴은 못 봤으나 중년 사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성격 한번 나쁘네.'

    아무리 실수했기로서니, 아랫사람에게 저렇게 욕을 할 필요가 있을까?

    레티시아는 자연히 얼굴이 찌푸려졌다.

    거기다 그 사내는 나뭇잎이 떨어져 손을 스치려 하자 호들갑을 피우며 손을 털어 내는 것이다.

    '나뭇잎 좀 맞는다고 죽나? 이상한 사람이네…….'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한이 들지?'

    레티시아는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숲에 뭐라도 있나?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같기도 하고.'

    칼렌이 레티시아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저자, 내 딸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게 보기 좋지 않군. 아마 남부 회의에 가는 길인가 본데."

    "공작님보다 늦는 가신이라니 말이 안 되죠. 누구인지 알아보고 조치 취하라고 전달하겠습니다. 남부 회의에 참석하지 않게 하죠."

    시온이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아아, 교양 없는 놈들. 이래서 남부는 오기 싫다니까."

    칼렌이 따분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 * *

    새까만 공작의 마차가 멈췄다.

    공작 가문 남부의 성. 소위 포레스트 펠이라 불리는 그곳은 남부의 요지이자 비옥한 땅 한가운데 세워진 곳이었다.

    작지만 울창한 숲을 전경으로 우뚝 선 오래된 성과 그 주변에 흩어진 별채들은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공작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공작이 몇 년 만에 남부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모든 사용인들이 뛰어나와 도열했다.

    엘레나를 제외한 남부 회의 일원들은 사용인들이 만든 길을 지나 일렬로 섰다.

    "어서 오십시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곧 마차 문이 열리고 새까만 정장을 입은 칼렌이 내렸다.

    "내가 나 올 때마다 이렇게 번거로운 짓 하지 말라 했을 텐데."

    "예의이자, 전통입니다."

    포레스트 펠의 집사가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남부인들은 늘 말대답을 하지. 뭐, 좋아. 그게 남부니까."

    칼렌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마차 문이 열렸다.

    "레티시아, 네 남부 집이다. 구경해."

    "벌써 도착했어요?"

    공작이 마차 안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을 안아서 내려 주었다.

    '작다.'

    사람들이 제일 처음 느낀 건 그거였다.

    눈을 비비며 공작의 품에 폭 안긴 아이는 뺨이 발그레했다.

    처음엔 흔한 갈색 머리인 줄 알았는데 햇빛에 닿자 핑크빛 도는 금발이 딸기색으로 빛났다.

    끔뻑이는 커다란 녹색 눈동자.

    달싹이는 조그만 핑크색 입술.

    쉽게 말해…….

    '안 닮았어! 엄청 귀엽잖아.'

    다들 소리 없는 경악을 했다.

    그 공작과 판박이라던 양녀가 이렇게 생겼다니!

    "엘레나는?"

    "예, 가주 대리님은 방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엉덩이가 무거워지셨군."

    "요즘 무릎이 좋지 않으셔서요."

    "흐음. 일단 아이가 좀 쉬어야 하니, 배정한 방으로 안내하도록."

    "네."

    집사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레티시아는 종종걸음으로 칼렌을 따라갔다.

    '여기가 공작가의 본가인 남부…….'

    오늘따라 어깨엔 살짝 힘이 들어가 있다.

    '오늘 입은 옷 괜찮지?'

    신전에서 급하게 납치당해(?) 오느라 이번엔 레티시아가 직접 옷을 갈아입었다. 하녀조차 따라오지 않은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복잡한 옷도 입을 줄 아는 자신이 뿌듯했다. 리본이 좀 삐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머리카락도 찰랑거리고 양말도 두 짝 다 똑바로 신었다.

    "잠시만요, 공작님."

    그때 칼렌을 따라 묵묵히 걷던 시온이 멈춰 섰다. 레티시아는 앞서 걷다 걸음을 멈췄다.

    "그게, 집사가 귀띔해 주길 남부 회의에서……."

    "아, 그렇게 나온다? 반항인가?"

    칼렌과 시온이 목소리를 낮춰 중얼댔다. 레티시아는 왠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원에 저런 건물이 있네.'

    반만 탁 트인 건물. 정자 같기도 아주 작은 오두막 같기도 했다.

    건물 주변을 겨울 식물들이 잔뜩 감싸고 있다. 창문 너머로 상체만 보이는 나이 있는 여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애기들 웃음소리였나?'

    여인의 무릎 위로 -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애들 상체가 움직이는 걸 봐서 그랬다. - 웃는 아이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들이 쪼르르 내려가 문밖으로 나온다.

    '저분이 시온이 말한 그 엘레나라는 분인가?'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때 대화를 마친 칼렌이 등을 돌렸다.

    "레티시아, 들어가자."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내게 배정된 방 안에 들어가니 마리아네가 신전에서 보낸 짐이 도착해 있었다.

    '음, 옛날 느낌 나는 방이다.'

    오래되어 멋있긴 하지만 좀 낡은 방이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웃는 낯의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주근깨가 있는 소녀였다.

    "안녕하세요. 여기 있는 동안 시중을 들어 드릴 마리예요. 먼저 짐을 푸시는 걸 도와드릴게요."

    하녀가 트렁크를 열었다.

    난 내 보물 2호를 확인했다.

    바로 칼렌이 선물해 준 곰 인형!

    참고로 1호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마탄 총이다. 역시 곰 인형이 있어야 잠이 잘 오지.

    "곰 인형은 침대에 놓을게요."

    "네, 공녀님."

    나는 곰 인형을 곱게 눕혀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마리는 짐을 정리하며 나를 계속 힐끔거렸다.

    "왜요?"

    "아뇨, 저, 공녀님이 어떤 분인지 다들 궁금해서요……."

    아, 신전에서와 같은 이유인가?

    '아니면 그냥 공작가 효과일 수도 있지.'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보다 훨씬 귀여운 분이세요."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커튼을 걷고 까치발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숲 때문에 이 성 이름이 포레스트 펠인 거예요?"

    벽돌로 감싸인 큰 창문 너머로 어두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거 하나는 수도의 공작가 저택과 같다. 숲이랑 딱 붙어 있는 거.

    "네, 맞아요. 작지만 특이한 생물이랑 나무가 많은 숲이래요."

    마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 숲엔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되세요."

    "왜요?"

    아까 마부가 숲에 들어가는 걸 꺼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저 숲 말이에요……. 나오거든요."

    마리가 작게 속삭였다.

    "유령?"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놀랐다.

    뻔하잖아요. 설마 요괴가 나오진 않을 거고. 아니지, 이 세계라면 요괴도 있을 법한가?

    "저 숲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거든요."

    마리가 소곤댔다.

    "그래서 저 숲에 들어가면 저주받는대요. 아랫마을 나무꾼 한 명이 몰래 저 숲에서 나무를 베어 가려다 온몸이 퉁퉁 불어 시체처럼 되어 나갔다지 뭐예요?"

    괴담이 따로 없었다.

    "어떤 유령이 나오는데요? 처녀 귀신이나 총각 귀신?"

    "아, 마법사 악령이 나온대요."

    점점 듣다 보니 재미있어졌다.

    "그리고요?"

    "아무도 없는 밤이 되면 발 없는 마법사 악령이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침대 밑에 숨어든대요. 그리고 잠버릇 나쁜 애들을 침대 밑에서 발목을 잡아끌어간다고 하네요."

    여기까지 들으면 웃기기까지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둘밖에 없는 방에서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댔다.

    "제가 이 말씀드린 건 비밀이에요."

    "네, 알아요."

    나는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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