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18)
  • 85 화

    "시온, 마차에서 내려라."

    "네."

    하지만 지금 마차가 달리는 중인데? 내 눈이 커졌다.

    다행히 시온은 마차에서 뛰어내리거나 하지 않았다. 마차를 두드려 세우고 멈췄다. 그리고 시온은 마부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각 따각.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제가 잘못 말한 건가요?"

    나는 눈치를 보았다.

    그동안 칼렌에게 내가 보는 환상에 대해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믿어 줄지도 확실히 몰랐고, 또 그러려면 전생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걸.

    '그리고 내가 전생에 칼렌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것과 최근 몇 년간 본 환상들이 별개의 문제라면…….'

    그게 이 세계의 능력이라면 잘못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낸 거다.

    "너, 언제부터 환상을 본 거지?"

    칼렌이 나직이 물었다.

    "몇 번 못 봤어요."

    나는 두 개의 일만을 털어놓았다.

    왕궁의 연극제 사건 때 비밀통로의 위치를 본 것. 그리고 최근 박람회 사건 때 키옌의 과거를 본 일.

    "그럼 최근엔?"

    "근 1년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왜요?"

    "시도 때도 없이 환각이 보이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아……."

    "하지만 그 정도 빈도로 보인 데다, 지금까지가 괜찮았다면 네가 미칠 일은 없지. 그래, 그 정도라면 괜찮아."

    오히려 완전한 능력이 아니라서 괜찮다는 건가?

    '하지만 차라리 이 능력을 조절할 수 있다면 칼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나는 그 말을 하려다 멈췄다.

    칼렌이 나를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환상을 본 일을 지금껏 숨겨?"

    "안 믿어 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소심하게 말했다.

    "넌 정말……."

    칼렌이 탄식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왠지 혼날 거 같다. 칼렌이 내 이마를 살살 톡 쳤다.

    "정말 아찔하구나. 도대체 넌어디서 온 어떻게 된 애인지……."

    나는 조용히 칼렌의 눈을 피했다.

    "그래서 말이다, 네가 지금껏 그 사건들을 해결한 것이 환상을 본 것 때문이라고?"

    "네,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말했잖아요. 저, 정말 천재 같은 거 아녜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칼렌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꾸준히 주장한 대로 난 천재가 아니다.

    "좀 이상한 부분들이 설명이 되는군. 하지만 네 나이에 정보가 좀 있다고 그 사건들을 해결하는 건 우연이 아냐, 넌 영리한 애다. 천재도 맞지."

    "……."

    "그런데 믿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니, 내 딸이 왜 그랬을까?"

    혼나는 기분. 나는 풀 죽어 칼렌의 눈치를 살폈다.

    "너, 내 딸이다. 그보다 더 해괴한 일을 한다고 해도 절대 내쫓지 않아."

    난 정곡을 찔린 듯했다.

    "아빠……."

    "애초에 우리 집을 봐. 이런 걸 부리는 집안이라고."

    칼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널 이상하다고 배척이라도 할까 봐?"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도 혼란스러웠어요. 제가 이상한 건 아닌가 싶고."

    칼렌이 내 볼을 꾹 양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다음부터 비밀 만들면 혼날 거다. 알겠지?"

    "네."

    나는 퍼뜩 어떤 생각이 들었다.

    "이 능력은 제 맘대로 없애거나 개발할 수 없나요?"

    "그건 불가능할 거다. 신에 관련한 능력은 전부 다 그냥 그들이 마음대로 주는 우연한 재능이니까."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만들지 마라."

    "네."

    이번에야말로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언은, 또 별다른 말 없었어?"

    나는 눈을 굴렸다.

    "저기, 아빠."

    말 나온 김에 말하자.

    "응?"

    "나, 결혼 못 할지도 몰라요……."

    귀족들에겐 결혼도 엄청 중요하겠지?

    학교 애들에게 들은 바로는 정략결혼의 상대는 대부분 가주가 결정한다고 들었다.

    '거기다 양녀는 언제까지 집에 있어도 되는지 모르니까.'

    상속자도 아닌 내가 집에 오래 버티고 있으면 좀 그런가?

    '귀족 가문의 노총각 노처녀는 골칫덩이라고 들었어.'

    하지만 제이드도 칼렌도 내게 상냥하니까 시집 못 간다고 바로 나가라며 쫓아내진 않을 것 같다.

    '생활비를 보태면 될지도…….'

    그리고 내가 커서 직업을 가지게 되면 돈도 벌 수 있을 거다.

    "뭐?"

    "만일 그러면……. 나 그냥 공작가에서 평생 살아도 돼요?"

    칼렌이 움찔했다.

    아까보다 훨씬 반응이 격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난 여신이 말한 남자복 부분을 슬쩍 말했다.

    '쉽게 말해 제가 똥차 자석이래요.'

    전생 용어로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니 좀 속상하긴 하군.

    "그냥 아빠랑 평생 살고……. 그래도 재밌을 것 같은데."

    칼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마부석을 격하게 두드렸다.

    다시 마차가 멈췄다.

    "시온! 어서 이리 와라!"

    시온은 오늘 고생이었다. 그는 급하게 마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공작님."

    "남부의 땅을 레티시아에게 증여해야겠다. 에메랄드 평원의 땅이 좋겠군."

    "네? 에메랄드 평원이라면 희귀 식물이 나서 가장 노른자위 땅 중 하나 잖습니까?"

    시온이 놀라 대답했다.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남들이 지참금 없어서 시집 못 간다고 오해하면 안 되잖나. 이건 선택인데. 그렇지? 아빠랑 평생 살려면 재산이 많아야지. 그래야 용돈으로 쓰지 않겠나?"

    "그건 제이드 도련님이 물려받으실 재산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 변호사나 친척들과 의논도 없이요?"

    시온이 매우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제이드는 죽은 제 엄마한테 물려받은 거 많아서 관심 안 둘걸."

    시온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죠.

    "그건 그렇죠. 하긴, 제이드 도련님은 아가씨에게 드린다고 하면 더 주라고 말씀하시길 분이기도 하고요. 잠시만요……, 그런데 평생 같이 사신다고요?"

    칼렌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주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이 결혼 안 하고 평생 나랑 같이 산대."

    "……아……."

    시온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버지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들으셨군요."

    "그거……, 찬사예요?"

    나 커서 아빠랑 결혼할래 같은 것? 그걸 찬사라고 할 수 있나? 난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시온도 계속 가문에 있으면 우리 다 같이 살겠네요! 그죠?"

    괜스레 시온의 눈치가 보여 덧붙였다. 시온의 뺨이 살짝 상기했다. 그리고 갑자기 태도가 변한다.

    "주인님, 그럼 땅은 물론이고, 저택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참에 공작 가문의 보물 창고를 다 줄까?"

    갑자기 또 스케일 커진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칼렌은 종종 너무 기분파다.

    "그건 정말 괜찮아요! 그래서 저 공작가에 계속 살아도 민폐 아닌 거죠?"

    "전혀."

    "절대 아닙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시온이 더 정색했다.

    "보통 딸들은 결혼하면서 독립한다고 하더라고요."

    이 세계에선 그렇다.

    시온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침 좋은 타이밍이군요. 주인님, 아가씨께 계획을 말씀해 주시면 어떻습니까?"

    "아, 그렇지."

    칼렌이 말했다.

    "안 그래도 네게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레티시아."

    "뭔데요?"

    "오늘 저녁에 알게 될 거야."

    칼렌이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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