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218)

77 화

며칠 후, 마리아네가 저택에 왔다. 마리아네는 그녀답게 매우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다.

"누구야! 왕실에서 우리 아기 괴롭힌 사람이! 게다가 박람회에서 인질로 잡혔다고? 내 이놈들을 그냥!"

마리아네는 내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시온이 만류하기도 전에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괜찮아? 이 귀여운 것. 봉변을 당했구나."

마리아네는 내가 무사한 걸 알자 이번엔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나는 컥컥 숨을 쉬었다.

'숨 막혀…….'

하지만 마리아네 냄새가 기분 좋아. 그보다 한참 전의 일이잖아?

"이제 괜찮아요. 다 해결됐어요!"

나는 마리아네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안 그래도 공작가의 천재 양녀가 맹활약했다고 소문이 자자해. 왕국 신문에 대서특필했던걸."

나는 마리아네에게 뺨이 잡혀 빙그레 웃었다.

"칼렌이 말년도 아니고 초년에 노망이 들어 제 양딸이 천재라고 주장하고 다닌다고 다들 욕할 땐 언제고, 천재 소녀 하면서 난리가 났다니까. 지방에서도 네 이야기를 할 정도란다."

"저 소문났어요?"

"소문이 난 게 아니라 명성이 생긴 거지."

마리아네가 내 볼을 꼭 쥐고 말했다.

"우리 아기 이렇게 귀여운데 똑똑하기까지 해서 어쩌니?"

나는 멍하니 있었다.

"마리아네, 저기, 이쪽 홀로 와요!"

나는 마리아네의 손을 잡고 옆방으로 갔다.

짜잔. 방 안엔 화려한 생일 상이 차려져 있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성녀님!"

"생일 축하드려요!"

고용인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녀 언니들, 도와줘서 고마워요.

"생일 축하해요! 아빠는 지금 오는 중이고, 우리 만찬 때 한번 더 파티해요!"

마리아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맞다. 선물!

"마리아네!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선물도 있다고?"

"네!"

나는 테이블 위에서 큼직한 보석 상자를 꺼내 열어 보여 주었다.

"제가 사건을 해결하고 상으로 받았어요."

"어머, 이거 정말 멋지구나. 이 오팔은 정말 유명한 물건이지."

역시 마리아네는 물건 볼 줄 아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제 것이에요.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결정했어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여러 개 준비해 봤어요! 이 중에 하나를 고르시면 돼요!"

마리아네는 말이 없었다. 나는 상자를 살살 흔들었다.

"빨리요, 마리아네!"

선물을 받는 것만큼 주는 일도 기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마리아네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들떠 있었던 거니?"

"네, 마리아네한테 좋은 거 드리고 싶어서."

혹시 마음에 안 드나?

'역시 마리아네에겐 이것도 부족한가?'

나는 움찔하며 눈치를 보았다.

깜짝 생일 파티는 기쁘지 않은 걸까?

"마리아네?"

마리아네는 나를 끌어당겨 가만히 꼭 안았다. 그리고 마리아네가 나를 놓았다. 설마?

"마리아네, 지금 울어요? 왜?"

마리아네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워서 우는 거야."

"뭐, 뭐가 그리워요?"

"그리운 감정이 떠올라서, 반가워서 눈물이 났어. 어른은 그래. 아주 오래전에 잊고 있던 감정들이 떠오르면 울고 싶어지기도 하거든. 하지만 슬퍼서가 아니라, 좋아서 그런 거란다."

마리아네가 내 볼에 쪽 키스했다.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이었구나. 공작가에선 원래 그런 걸 안 챙기니까……. 거기다, 신전에선 성녀의 생일을 인정하지 않거든. 여신의 환생이니 뭐니 하며 여신 탄생일 날 축하해 주지."

마리아네가 속삭이며 내 머리카락을 넘겼다.

"멋진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꼭 보답해야겠는걸."

마리아네는 한참을 고르다가, 개중 가장 수수해 보이는, 작은 에메랄드가 박힌 은 브로치를 골랐다. 난 더 좋은 걸 주려 했으나 마리아네는 이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자주 하고 다닐 테니, 가끔 내 사진이신문에 실리면 확인해봐."

"네!"

"엄청 질투하겠는걸. 두 사람이."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하얘졌다.

"저, 정말요?"

생각해 보면 난 지금까지 공작가에서 공짜로 먹고 자고 하고 있잖아.

역시 칼렌과 제이드가 안 된다고 해도 이걸 팔아서 내 생활비를 내야 하지 않을까?

"아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좋은 선물을 받은 걸 질투할 거라고."

마리아네가 쿡쿡 웃었다.

"나중에 볼에 키스라도 해 주렴. 칼렌 오빠는 제가 좋은 건 다 가졌고, 또 제이드 녀석은 다른 상속자와 다르게 이미 돈이 썩어 나게 많으니, 비싼 선물 줘봤자 귀찮아할걸."

그 말에 나는 호기심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제이드 오빠가 왜요?"

"아. 제이드의 어머니는 칼렌 못지않게 부자였단다. 결혼한 건 아니지만, 제이드가 사생아는 아냐. 언제 한번 제이드에게 물어보렴."

이건 또 수수께끼 같은 말. 마리아네가 말을 돌리며 씩 웃었다.

"그럼 우리 아가가 차려 준 생일상을 먹어 볼까?"

* * *

칼렌이 곧 집에 도착했다. 칼렌은 마리아네의 생일을 축하하며 점잖게 봉투를 건넸다.

'아, 역시 어른의 선물은 돈인가?'

마리아네는 칼렌의 선물은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나, 애기한테 선물 받았다!"

그녀는 한껏 자랑했다.

"그래. 잘 어울려."

"그렇지?"

그녀는 브로치를 단 모습을 보여 주고 나서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나, 레티시아에게 내년의 첫 예언을 줄 거야."

그 말에 칼렌의 몸이 굳었다.

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응. 줄 거야."

"꼭 줘야 해?"

"왜? 다들 받고 싶어서 난리가 나는데."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첫 예언이 뭔데요?"

"신전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중 제일 비싼 거."

"칼렌, 어째 설명이 속물적이다?"

"맞는 말 아닌가?"

"뭐, 그렇긴 하는데."

마리아네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해 주었다.

"나와 같은, 대신전의 성녀는 1년에 딱 한 번 예언할 수 있어. 새해가 지난 후 말이지. 올해는 벌써 끝났으니, 내년 예언을 줘야겠네."

헤에. 나는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그해 가장 비싼 예언을 네게 주는 거야. 마을 두세 개 값을 싸 들고 각 나라의 왕이며 부자들이 와서 제발 첫 예언을 달라고 애원한다고."

그런 엄청난 걸 내게 준다고? 고맙긴 하지만…….

"하지만 마리아네에겐 이미 선물을 잔뜩 받았는걸요. 전 정말……."

"귀여운 아이는 세상 모든 좋은걸 가져도 부족하지. 안 그래?"

"아아, 그건 그렇지."

칼렌이 끄덕였다.

사실 엄청나게 궁금하긴 하다.

예언이라니. 한편으론 조금 무서웠다.

'혹시 나쁜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해?'

그런데 나 정말 보답 바라고 선물한 거 아닌데.

"받아 줄 거지? 고모의 선물이야."

나는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겠어? 엄청난 단위의 돈이 날아간다고."

"그 정도는 괜찮아. 신전 녀석들, 가끔 성질을 부려 줘야 설설 긴다고."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역시 어른들의 사정은 복잡해.

"알았지? 그럼 내년 초엔 주신전으로 기도하러 오렴."

"그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네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짐을 풀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나는 칼렌과 둘이 남았다. 조심스럽게 묻는다.

"정말 제가 예언을 받아도 될까요?"

"본인이 준다고 하지 않으냐? 상관없지."

"하지만……."

내 표정을 본 칼렌이 신문을 접었다.

"나쁜 이야기 들을까 봐 걱정돼?"

"조금요."

"신경 쓰지 마. 예언은 현재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뿐이지. 변하지 않는 미래는 없다."

"아빠도 예언 들은 적 있어요?"

"응."

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예언을 들었는데요?"

"여러 가지 들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말은 한 가지였다. 평생 네가 품은 어둠 속에서 살 것이나, 너는 그저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어렵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어두운 내용의 예언.

하지만 난 칼렌을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쁜 놈을 죽이는 다크 히어로. 그게 칼렌이니까. 살인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바뀌었잖느냐. 네가 있어 요즘 이렇게 즐거우니까."

아, 그렇구나. 예언도 절대적인 건 아니구나. 하지만 경험 삼는 것치고는 너무 비싼 것 같은데.

나는 괜히 민망해서 내 옷깃을 만지작댔다.

"매일매일이 즐거우니, 내 삶은 변한 거지. 그러니까 예언은 변할지도 모르는 미래만을 말해 줄 뿐이다. 그냥 경험 삼아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신전이라면 남부로군. 우리 공작가의 본가에도 들르면 되겠구나. 그 시기엔 남부 영주들의 회합이 있으니까. 긴 여행이 되겠군. 거기도 슬슬 한번 갈 때가 되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남부 영주예요?"

"아니."

칼렌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남부 영주들이 다 내 것일 뿐이야."

……그러니까, 대영주 같은 거 맞지?

"내 딸을 소개할 기회겠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내년 첫 일정은 그게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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