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18)
  • 45 화

    누구지, 이 사람은?

    보라색 눈. 황홀할 만큼 화려한 백금발.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어, 세드릭……?'

    딱 한 번 본 그 애.

    그 애가 어른이 된다면 이런 외모일까 싶은 사람이다.

    〈이 비밀 통로는, 왕실의 아이들과 여자들만을 위한 통로야. 우린 비밀을 죽을 때까지 지킬거야. 그러고 왕비에게만 이 통로의 위치를 전하겠지. 오래도록이어지길 바라면서 말이야-〉

    〈네, 그거 참 좋겠군요. 그럼 한번 더 확인해 봅시다. 이걸 보세요.〉

    그리고 맞은편의 한 남자가 종이를 내밀었다.

    '어, 이 사람은 또?'

    반짝이는 은발.

    낯익은 얼굴이다. 이건 백마법사의 초상화? 아니지, 시벨 선생님?

    〈이 구조를 보세요. 벽과 벽 사이, 그러고 이 바닥의 통로. 완벽한 삼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방 안에 탈출구가 세 곳이라. 이거라면 한 번에 여러 명이 나갈 수 있겠군.〉

    〈네. 세 곳의 탈출구가 있습니다. 벽의 문, 그러고 지하 문……. 그다음이 가장 은밀한 곳에 있는 천장의 문이요.〉

    〈비밀 통로인데 입구가 너무 많지 않나?〉

    〈대를 걸러서 전달하시려면, 한 가지 문의 위치만 전달하세요. 각기 다른 사람에게 다른 문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겁니다. 비밀이 지켜지도록.〉

    〈그렇군. 이 위치를 잘 기억해야겠어.〉

    〈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이소 극장으로 아이들을 대피시키세요. 그렇게 도망치면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을 겁니다. 지하 수로를 활용한 비밀 통로랍니다.〉

    내 눈에 남자의 손이 짚은 지도가 똑똑히 들어왔다. 지도라기보단 구조도였다.

    '비밀 통로의 지도.'

    으응? 근데 이게 왜 보이는 거야?

    〈입구는 숨겨 둬야겠어. 나무를 가리려면 숲에 숨겨야지.〉

    〈그럼 그림을 걸어 둡시다. 하지만 철저하게 비밀은 지켜져야 합니다. 기억하세요. 방의 바깥쪽 벽, 그 벽의 중앙이 첫 번째 통로입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뭐야? 이건 누구 기억이야?'

    "레티시아?"

    그때 칼렌이 나를 가만히 불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네에?"

    나는 칼렌의 손을 잡은 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냐?"

    "네. 조금 긴장했던 것 같아요."

    "귀엽군요. 하지만 애는 애군요."

    귀족 중 한 명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난 내가 또다시 멍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뺨을 붉혔다.

    "그럼 애가 아니길 기대라도 했다는 건가?"

    칼렌은 말을 내뱉은 귀족을 은근히 보았다. 그가 창백해져 움찔했다.

    "건방지군."

    더 이상 대답은 듣지도 않았다.

    성격 하고는-. 이런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칼렌답다.

    칼렌은 나를 연극 무대 뒤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계속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기억이 자꾸 보이는 거지?'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불길하기도 하고.

    '연극이나 하고 있어도 돼?'

    그때 나는 깜짝 놀랐다. 누가 내 어깨를 팍 잡았기 때문이다.

    입이 댓 발 나온 라비네였다.

    "아바마마가 너보고 뭐라셔?"

    "응?"

    라비네는 딱 봐도 패닉 직전이었다.

    얘는 또 왜 이러지? 그보다……. 난 라비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라비네? 너 왜 이렇게 반짝거려?"

    "온몸에 펄을 칠했어. 원래 주인공은 그래."

    사실은 반짝 보다 번쩍에 가까웠다. 라비네가 움직일 때마다 빛이 다 났으니까.

    '인간 발광체 같은 모습.'

    그 모습을 하고 해골처럼 비틀대며 걷는 라비네는 두 번 다시 못 볼 꼴이었다.

    "나 토할 거 같아. 아바마마가 연극 일 물어봐?"

    "아니, 정말 별말 안 하셨어."

    "좋겠다. 관심받아서. 난 너랑 다르다고."

    "그거야 다르지, 당연히. 넌 공주님이니까."

    "그게 아니라!"

    라비네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무슨 역할 하는지도 몰라. 내 드레스는 시녀들이 마련해 줬고."

    "……."

    "넌 영재에다, 집에서 이런 드레스까지 준비해 줬잖아."

    "그게 지금 연극이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라비네가 와앙 울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와, 여기저기서 일이 터지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왕궁 생활인가? 나는 라비네의 손을 잡고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향했다.

    "라비네, 너 연습 잘했잖아."

    "정말?"

    "그럼. 나보다 연기도 훨씬 잘해. 진짜야."

    "공작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네가 뭘 알아, 우, 으. 흑흑……."

    하다 하다 공주한테 질투를 받다니.

    얘네는 내가 길에서 쓰레기 뒤지던 거지 소녀라는 걸 알기나 할까?

    '당연히 모르겠지.'

    얘네가 알면 기겁할 거야.

    "라비네, 너 저번에 나한테 그랬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그런데?"

    "나중에는 못 배울지도 몰라서 그래."

    뚝. 라비네의 눈물이 멎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지금 학교에 보내 주시고 학비 내주시는 것도 아빠의 큰 배려니까, 상황이 달라지면 배우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그러고 너희와 달리 물려받을 유산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직업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그러니까 최대한 많이 배워두고 싶은걸."

    "……공작가에서 널 결혼시키겠지. 너 정도면 커서 멋진 남자랑 결혼해서 진짜 귀족이 될걸."

    얘는 도대체 어린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긴,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일찍 결혼하니까. 나는 그 말은 못 들은 체하기로 했다.

    "……그것도 모르는 일이잖아. 양녀라는 신분은 앞일을 모르는걸."

    그러고 집에서 정해 준 남자랑 결혼하는 건 싫으니까.

    "……너 설마?"

    "아, 그런 거 아냐. 예전엔 쫓겨날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 없을 거란 걸 알아. 아빠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까."

    "……."

    "공주도 힘든 일이 많겠지만, 지금 잠깐은 날 보고 자신을 위로해. 그러고 이거 나 우습게 보라는 말 아니다. 잠깐 도와주는 거야."

    라비네는 입을 떡 벌렸다.

    "너 영재랬지? 똑똑한 거 같아."

    "그래?"

    다행히 라비네는 진정하기 시작했다.

    "방금 객석에서, 나랑 같은 색 머리카락의 키 큰 언니 봤어? 국왕석 바로 옆에 앉은 사람 말이야."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언니인 애나 언니야. 언니는 나와는 달리 부모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거기다 잘하는 것도 많고. 넌 애나 언니 같아."

    라비네가 그렇게 말하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사, 사실 내가 이 연극을 하고 싶었던 건, 애나 언니보다 내가 낫다는 걸 보여 주려고 그런 거야. 애나 언니가 했던 연극은 망했거든. 그럼 부모님도 날 다시 볼 것 같아서……."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연극이 망했다니?"

    "연극제가 다시 열린 건 4년 만이야. 원래는 매년 했거든."

    라비네가 주변을 살피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았다.

    "너, 친구니까 해 주는 말이야. 비밀이다."

    친구?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4년 전에 같은 연극을 했어. 〈전쟁에 나가는 일곱 공주들〉말이야. 그땐 애나 언니가 첫째 공주 역할이었지."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연극은 취소됐어. 리허설에서 사람이 죽었거든."

    "뭐?"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헙, 하고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만일 그걸 애들이 알게 되면 난리 날 거야."

    "이 장소에서 죽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사람 죽은 무대에서 연극을……. 하긴. 그럼 애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날 거다.

    "어쩌다가?"

    "신분이 그리 높은 아이는 아니었는데, 걔도 양녀였대. 운 좋게 왕실 행사에 나오게 된 모양인데, 리허설 무대를 하다 사고로 샹들리에가 떨어져 죽었다나? 그 뒤로 한참 이 소극장 문이 잠겼어.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그러고 밤마다 여기에서 우는 소녀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대."

    나도 기분이 좀 그랬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잘하면 칭찬 많이 받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 밤 행사가 성공하면 우리가 왕실 행사를 부활시킨 게 되는 거구나.

    "그건 그렇고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마워. 음, 평민의 침략에…… 내가 당해 버렸다는 걸 인정해야겠어."

    라비네는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우물거리며 나를 보았다.

    "너, 널 내 친구로 인정할게."

    "고마……워?"

    "그건 그렇고 네가 점심때 왜 그렇게 잘 먹나 했더니 혹시 그것도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몰라서 그런 거니? 불쌍해라. 난 그것도 모르고."

    라비네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너 맞을래?"

    아, 마음의 소리가 나와 버렸다.

    "뭐? 너 감히 나한테……."

    "이제 와서 막히는 무슨 감히야? 아무튼 밥을 많이 먹는 건……."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맛있어서 그런 거야."

    내 뺨이 살짝 붉어졌다. 라비네는 풋 웃었다.

    "홍. 나보다 작으면서 토끼처럼 먹어 대고 말이야."

    라비네는 뒤늦게 괜히 도도한 척했다. 너 방금 울먹이지 않았니?

    "키는 다 커 봐야 아는 거야."

    이번엔 내 입술이 나왔다. 하지만 난 이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잘하고 오자."

    "그래. 좋아."

    라비네는 나를 빤히 보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다, 다음에 차나 마시러 오든가."

    "그래. 안젤도 같이 갈게."

    "너만 와도 되거든."

    라비네가 개미 목소리만 하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사람은 정말 두고 봐야 하나 봐. 라비네 때문에 내 광대가 이렇게 봉긋 올라가게 될 줄 누가 알았어?

    "뭐야, 둘이 무슨 이야기해?"

    안젤이 다가왔다. 라비네와 나는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주님, 영애들. 어서 오세요. 연극 시작 시각이 임박했어요."

    총괄 시녀 클레어가 우리를 불렀다.

    "이제 가자."

    우리는 시선을 교환하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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