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18)
  • 44 화

    라비네가 침을 삼키더니 날 보았다.

    "레티시아, 너 대본 검수하느라 대사 거의 다 외웠지?"

    "그렇긴 한데-"

    "안젤, 다른 대사는 다 할 수 있겠어?"

    "웅, 그 외엔 가능할 것 같아. 칼은 보기만 해도 무서워."

    "그럼 장면을 좀 수정하자, 안젤. 초반부와 중반부는 그대로 해. 그러고 레티시아 네가 안젤을 좀 도와줘. 안젤이 못 하겠다는 칼 장면을 네가 대신하는 거야."

    나는 안젤을 보았다. 안젤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나는 안젤에게 성큼 다가갔다.

    "안젤."

    "으, 응?"

    "클라이맥스의 네 장면, 내가 대신할게. 그럼 괜찮겠어?"

    "어떻게든 해 볼게. 레티시아가 중요한 장면만 도와준다면 괜찮을 것 같아. 그 외에는 내가 크게 주목받는 장면이 없으니까."

    안젤은 구세주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좋아. 걱정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은 한참 나를 보다가 아주 작게 말했다.

    "고마워, 레티시아. 정말로."

    우리는 급하게 대사를 체크하고, 마지막 무대 동선을 손보았다.

    "레티시아, 너와 나는 따로 리허설해야 해."

    라비네가 내게 손짓했다. 라비네는 나를 무대 세트장으로 데리고 갔다.

    '멋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이었다. 이건 내가 생각한 학예회 수준이 아니었다.

    화려한 커튼들, 고급스러운 가구와 그릇들. 정말 왕궁의 한 방처럼 세트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무슨 냄새 안 나?"

    "아아, 왕족이 들어오는 곳이잖아. 저 향로가 빙글빙글 돌면서 향을 피우는 거야."

    "흐응."

    냄새가 진했다. 왕족들이라서 그런지 냄새에도 민감하구나.

    "이 침대 보이니? 이 침대에 내가 누워 있으면 네가 와서 칼로 찌르는 거야. 어떤 장면인지 알지?"

    "아아. 알아. '백마법사의 키스'를 받고 최면에 빠진 둘째 공주가 첫째 공주를 칼로 찌르는 거지."

    "맞아."

    라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칼에 찔려 중상을 입은 첫째 공주는 그 뒤, 전쟁에 나가 죽는다.

    그러니까 일종의 순교다.

    '이런 걸 애국적 내용이라 하나?'

    그래서 첫째 공주역의 라비네는 이 연극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이거 진짜 침대야?"

    "아니, 가짜 침대. 가구는 대부분 소품이거든."

    라비네는 침대 옆에 있는 단도를 들어 올렸다.

    "알지? 이 단도가 소품인 거. 날 이렇게 찔러도 안전해."

    이어, 라비네는 소품을 쓰는 법을 알려 주었다. 침대 옆에 놓인 단도는 빨간 보석이 달린 모양이었다.

    "알다시피, 이 칼로 몸을 찌르면 칼날이 안으로 그냥 들어가."

    라비네는 시범을 보였다. 그녀가 팔뚝을 찌르자 스르르 칼날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무대에서 겁먹지 말고 내 왼쪽 심장을 푹 찔러. 아주 세게 찔러야 해. 내 옷에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완충제가 들어가니까 겁먹지 마."

    "알겠어. 해 볼게."

    "친언니를 찌른 상황에 충격을 받고 우는 연기를 해야 해. 할 수 있지?"

    "응, 해야겠……지?"

    어떻게 좀 성공적인 발연기를 해 보겠습니다.

    나는 몇 번 칼을 쓰는 연습을 했다. 서서히 긴장도 되었다. 아무리 애들 행사라도 왕궁 행사였다.

    그때 무대 뒤에서 시녀장 클레어와 분장팀의 미라를 포함한 시녀 몇이 나왔다.

    "무대의 마지막 점검입니다. 귀하신 아가씨들께서 다치지 않게, 영애들의 몸에 닿는 소품들을 점검하세요."

    클레어와 미라가 우리를 발견하더니 다가왔다.

    "어머, 두 분. 아직 소품이 안전한지 확인도 해 보기 전인데……."

    "이 소품, 안전해. 방금 써 봤어. 연극의 내용 일부가 변해서 소품 칼을 쓰는 법을 레티시아에게 가르치려고."

    "그러셨군요. 그래도 귀하신 아가씨들이 무대에 오르시니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고 있었답니다. 미라, 칼을 들어 확인 좀 해주세요."

    "그게 절차인걸요."

    미라는 싱긋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미라에게 칼을 건넸다.

    "이 연극은 공주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니 왕비 전하도 기대가 크세요. 분명히 긴장되시겠지만 잘해 내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

    라비네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당신. 거기서 뭘 하는 거죠?"

    클레어가 날카롭게 외쳤다.

    클레어의 시선 끝에는 방금 홀로 들어온 한 사내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옷 특이하다.'

    사내는 포대 같은 긴 로브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손에 뭘 잔뜩 들고 있다.

    '이야기 속의 마법사 같은 옷이네.'

    그 사내가 허둥지둥 말했다.

    "아. 전 오늘 영상석을 담당하는 마법사입니다. 공작님의 요청으로 마탑에서 모든 영상석을 긁어모아 왔죠."

    "이야기를 못 들었는데요. 확인 좀 해 볼게요. 성함이?"

    "요안이라고 합니다."

    나는 마법사과 클레어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다 무대 뒤로 돌아왔다.

    칼렌이 말한 영상석, 그 담당 마법사가 저 사람이구나.

    리허설이 끝나고 관객들이 하나둘 입장하는 걸 나와 안젤, 라비네는 커튼 뒤에 옹기종기 숨어 훔쳐보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오네."

    나는 중얼거렸다.

    안젤이 내 뒤에서 속삭였다.

    "공작님도 오셨어. 이런 데 오신 건 정말 오랜만이네. 널 보러 오셨나 보다. 거기다 제이드 님도 오셨네. 애들 난리가 나겠다."

    제이드가 칼렌과 나란히 서서 들어오자 근처의 모든 귀족 영애들이 뺨을 붉혔다.

    '제이드, 열네 살인데 벌써 아빠의 아들답게 인기 많은 거 봐.'

    제이드가 무심히 앉아 있는 사이, 칼렌은 몸을 숙이고 한 사내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사내를 유심히 보았다.

    "저분은……?"

    "아아, 국왕 전하야."

    나이 든 중년은 특징 없는 얼굴이었다.

    굳이 특징을 매기자면.

    '옆집 아저씨?'

    뺨도 통통하시고 친근한 인상이다. 왕은 이렇게 생겼구나.

    '힉, 눈 마주쳤다.'

    커튼 사이로 고개만 쏙 내민 나와 국왕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커튼 너머로 숨었다.

    '그 세드릭이라는 왕자님은 없네.'

    요리조리 왕족들의 자리를 둘러보았지만 없다.

    안젤이 이어 말했다.

    "너, 화려하게 사교계에 등장하게 되겠구나. 인사도 하기 전에 무대를 보여 준다니 말이야."

    안젤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화려한 등장이야?"

    "왜? 오늘 제일 중요한 장면 맡았잖아."

    안젤은 신기하게 침착해졌다.

    "넌 가만히 있어도 오늘 눈에 띌 거니까, 더 비중 있는 역할을 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다들 네가 누군지 궁금해한다는 소리지. 호랑이 사건이 사교계 전체에 퍼졌다고 해. 소문으로는 네가 공작님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대."

    안젤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나 마법사 아닌데?"

    공작가의 혈통을 이었다면 붉은 눈이나 마법사겠지.

    "응, 맞아. 그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왜 너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거지."

    그러니까 나도 오늘 주목받는 존재란 거지?

    '나 긴장해야 하나?'

    칼렌이 워낙 유명해야지. 나는 내 매무새를 생각했다.

    이상한 애가 등장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때 중년의 시종 한 명이 다가왔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지만 왠지 시종 같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저는 전하의 시종장 디한이라 합니다. 국왕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저요?"

    설마 눈 마주쳤다고?

    '그럴 리가.'

    나는 안젤에게 눈짓하고 그를 따라갔다.

    국왕의 앞에 도달했는데, 칼렌과 제이드가 국왕과 나란히 서있었다. 그러고 이름 모를 아저씨랑 노인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 애가 제 양녀입니다."

    칼렌의 눈짓을 받은 나는 인사했다.

    "레티시아입니다."

    "오오- 아 아이는."

    국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라셨죠?' 라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딱 봐도 엄청 똑똑해 보이는 애가 아니라서 민망해지는 순간.

    "엄청나게…… 귀엽군."

    "그렇군요."

    노인들이 탄성을 울렸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제이드의 뒤에 살짝 숨었다.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친남매처럼 이렇게 사이가 좋죠."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친딸이 아니니 공녀는 그럴 테고."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호칭이야 나중에 주면 되는 거고."

    "호칭까지 줄 생각인가?"

    호칭이 뭔데?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때 칼렌이 내게 손짓했다.

    "이리 와. 무대까지 데려다주마."

    "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나는 빠르게 걸어 칼렌에게 걸어갔다.

    수십 쌍의 눈이 나만 빤히 보는건 무섭거든.

    칼렌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나는 그를 재촉하듯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아!"

    바닥의 일부가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곳에 발을 잘못 디뎠다.

    그러고-

    또다시 환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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