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18)
  • 38 화

    라비네의 소곤대는 - 시늉만 해서 사실 다 들리는 -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너네도 더러운 평민이랑 놀면 수준 떨어진다 했으면서. 내 탓하기야?"

    "라비네는 틀린 거 없어. 로제 영애의 충고가 기억 안 나? 로제 영애는 인기인이잖아! 거기다 우리 선배야. 그 언니가 쟤 때문에 공작님한테 차였다고 했잖아. 앗, 맞다. 차인 건 절대 비밀이랬는데."

    말을 하던 소녀가 입을 막았다.

    너희 진짜 바보구나…….

    나는 점점 짠한 마음이 되었다.

    "로제라니?"

    "히익!"

    내가 물어보자 아이들이 기겁했다.

    "저어, 다 들려서……."

    라비네는 토마토 같은 얼굴로 말했다.

    "모, 목소리가 들린 건 실수였어. 아무튼, 얼마 전 우연히 무도회에서 너에 대해 들었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람에게서 말이야. 네가 뒤에서 공작님을 조종해서 여자를 상처 주게 만들었다면서? 그 사람이 그러는데 네가 엄청 나쁜 애래."

    ……퍽이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람'이다. 레이디 로제 이야기잖아. 날 서커스단에 팔아 버릴 거라는 욕을 했던 로제.

    가슴이 뻐근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참 찌질한 어른이다…….'

    로제가 어린애들 붙잡고 험담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짠해지기까지 했다. 악당이라기엔 좀 어설펐다.

    "그러고 그 사람은 이 학교 졸업생이야. 우린 같은 학교 학생에 대한 의리를 지켜. 그러니까 너에 대해 더 의논을 해 봐야겠어."

    그러고는, 소녀들은 한참을 더 소곤거렸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이 되어 창밖이나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이 정도 신분의 아이들이면 친구 사귀기가 불가능한 수준인데. 아빤 내가 정말 잘 지낼 거라 기대한 걸까?'

    정말 여기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그보다 수업을 하긴…… 하나?

    "흠흠."

    라비네가 날 보며 헛기침했다.

    어른 흉내지 이거?

    난 고개를 들었다.

    "널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

    나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라비네를 보았다. 라비네는 턱을 추켜올렸다.

    "알다시피 넌 양녀 출신이야. 솔직히 너랑 같이 지내라는 건 우리한테 모욕 같은 거거든. 혈통이 다르니까."

    아……. 이번 말은 조금 상처가 되는 것 같다. 칼렌의 친딸이 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만일 네가 잘해 낸다면 우리 사이에 끼워 줄 수도 있어."

    "잘해 내?"

    나도 모르게 살짝 미간이 좁아졌다.

    "먼저 한 달 동안은 우리 정기모임에 끼워 줄 수 없어. 우리는 매주 모임이 있거든."

    라비네의 옆에 있던 소녀가 라비네를 흉내 낸 말투로 말했다.

    "일단 이번 주 토요일에는 중앙공원 온실 안에서 '애완동물 산책 모임'이 있어. 너 애완동물 있니?"

    "없는데."

    애완동물은 없지만 아빠가 사준 곰 인형이 내 보물이다. 그건 애완동물이 아니긴 하지.

    "그럼 넌 모임에 참가 못 하겠다. 아, 있어도 참가시켜 줄 마음 없으니 설레지 말고."

    라비네가 그렇게 말하자 소녀들은 쿡쿡 웃었다. 아까 안젤이라 불린 갈색 머리 소녀만이 무표정했다.

    얄밉다.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이었다.

    "그러고 다음 주에는 모의 무도회, 그다음 주에는 오페라 배우기 모임……."

    라비네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넌 당분간 이 모든 모임에 못나와. 우리가 널 친구로 인정할때까진 말이지."

    내 표정을 살핀 라비네는 과시하듯 말했다.

    "그렇게 실망할 것 없어. 네가 한 달간 잘해 내면 다음 달부터는 끼워 줄 수도 있거든. 먼저, 넌 가장 먼저 교실에 온 다음 가장 마지막에 나가야 해. 그리고우리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하게 대해. 우리 모두가 널 좋아하게 되면 네게도 꽤 좋은 일이 있을거야."

    그러고 라비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좀 이상한 규칙들이었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한 통씩 쓸것, 선물을 하나씩 할 것. 그다음에,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

    "그게 좋은 일이니?"

    그때, 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안젤이라는 소녀의 미간이 흐려졌다.

    "그럼 좋은 일이지. 너 같은 양녀가 어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지는 중요하거든. 신분 상승 길이라고 할까?"

    ……신분 상승이란 단어는 또 아네.

    이런 것만 조숙할 건 뭐야? 그보다, 이 애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봐야 다들 열 살 언저리일 텐데. 평소에 뭘 보고 배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래서 나 하는 거 봐서 어울려 주겠다는 거네?"

    "정말 큰 맘 먹고 하는 제의니까 기뻐해도 좋아."

    라비네가 선심 쓰듯 말했다.

    참자. 더 대꾸하지 말자. 하지만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사양할게. 병정놀이는 집에서 오빠하고 하는 편이 더 즐겁거든."

    "……뭐?"

    "친구 선발이라면 모를까, 부하 선발에는 응시하고 싶지 않아."

    말해 버렸다. 내가 떠올린 생각이다.

    라비네를 비롯한 아이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너 착하다고 한 것 취소야. 역시 출신은 어디 안 가. 너 진짜 건방져."

    라비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이제 두고 봐."

    나, 일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싶어 졌다. 아무리 어린애들 인간관계라지만, 무난하게 어울리긴 글러 먹었군.

    "레티시아 영애, 공작님께서 데리러 오셨습니다."

    칼렌이 나를 제일 먼저 데리러 와서, 나는 가장 먼저 하교할 수 있었다.

    "공작님이다!"

    칼렌이 직접 나를 데리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 아이들은 술렁였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교실 창문을 힐끔 보았다. 아이들이 창문 벽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관심은 되게 많네. 공작가가 대단하긴 한가 봐.'

    한숨이 나왔다.

    "아빠, 데리러 와 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칼렌의 마차 옆자리에 앉았다. 칼렌이 내게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 학교는 어땠지, 레티시아?"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재미있었어요."

    "수업은 들었어?"

    "저어, 오늘은 그냥 학교만 구경했어요."

    "그러고?"

    칼렌은 나른하게 물었다.

    "같은 반 애들이랑 차 마셨어요."

    "재미있었어?"

    "네, 처음 보는 친구들이랑 대화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난 칼렌을 반만 닮아가는 모양이다. 욱하는 건 칼렌을 닮아 가는데, 거짓말은 영 못한다. 칼렌은 거짓말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니까.

    "그랬어?"

    "네."

    "정말 그랬으면 지금 왜 울 것 같은 표정이지?"

    나의 몸이 굳었다. 한마디만 더하면 울 것 같아, 그냥 고개만 휘휘 저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바보같이 나와는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인 같은 반 애들에게 밉보여 버렸는걸.

    '공작가의 양녀로써 의젓하게 굴긴커녕 애들하고 원수만 지고 왔어.'

    단 하루 학교에 보내 놨더니 모든 걸 망쳐 놨다. 칼렌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해?

    "아무것도……."

    "아가."

    칼렌이 내게 몸을 숙였다.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지?"

    칼렌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히끅, 하고 놀랐다.

    칼렌은 내 등을 토닥토닥 살살 두드렸다.

    "착하지? 어서."

    "……그냥."

    나는 숨을 삼켰다. 칼렌의 눈치를 봤다.

    "저보고 토요일 모임에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원래 반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없을 때도 모여서 같이 노는 것 같았거든요."

    칼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나는 얼른 덧붙였다.

    "그런데 이유가 있어요. 그 모임은 애완동물을 데리고 오는 모임인 거 같더라고요."

    "애완동물 모임?"

    "네. 강아지나 고양이, 그런 작은 동물들요. 다 같이 모여서 공원 산책도 시키고 온실에서 차도 마시나 봐요. 하지만 지금 제가 키우는 애완동물이 없잖아요? 지금은 딱히 키우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어차피 못 가서 별로 아쉽진 않아요. 그러고 토요일은 가족들이랑 보내고 싶어요."

    힐끔, 나는 칼렌의 눈치를 보았다.

    "아빠 계속 바빠요? 토요일에도요?"

    "아니. 안 그래."

    칼렌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고 둘 다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둘 다요?"

    "친구도 만나고, 가족과도 시간 보내고. 하루는 길지 않느냐?"

    "……."

    "아, 맞다. 레티시아."

    칼렌이 내게 목에 걸치고 있던 머플러를 둘러 주며 속삭였다.

    "말하는 걸 잊었다. 아빠가 키우는 애완동물이 있거든."

    정말?

    "저택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아, 숲에서 키우거든."

    숲이라면 시온이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장소 중 하나다. 공작가 뒤편의 작고 어두운 숲은 수도 외곽으로 통해 있다.

    "내 애완동물을 빌려줄 테니 모임에 나가면 되겠구나. 걱정 마라. 공작가의 사람이 초대 없이 어딜 가는 건 무례가 아니야."

    "……."

    "다들 우리와 친해지고 싶어 하고, 옷자락 하나라도 스치려 아우성이거든. 감격해서 우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우는 건데요?

    "그게 이 왕국의 생태계지. 네가 가 주면 그 애들도 고마워할 거야."

    아니, 그건 칼렌이나 제이드 이야기고요.

    나는 마음속에 스멀스멀 퍼지는 불길한 예감을 무시했다.

    "아빠 그거 확실히 동물이죠? 네 발로 기는."

    "아아, 그럼. 꽤 귀여워."

    그럼 괜찮겠지.

    나는 애써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 야생동물이라도 하나 포획해오는 거 아냐? 하는 불안감은 남아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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