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18)
  • 34 화

    * * *

    겨울이 깊어졌다.

    칼렌과 제이드는 외출이 잦아졌다. 난 자연스레 집 지키기 담당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도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공부. 내게 글과 기초적인 상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매일 오전에 왔다 갔다.

    '선생님이랑 수업하는 건 재밌는데, 오후에는 심심해…….'

    시온은 그런 날 보고 1층의 가장 큰 거실에서 가정교사가 내준 숙제를 하라 했다.

    '난로 앞이 제일 좋아.'

    집이 따뜻한데도 난 늘 난로 앞을 찾아 기어들었다. 나가 노는 건 좋지만 이건 다른 문제라고.

    "집 전체에 마정석을 깔아서 겨울에도 언제나 따뜻하지요. 고용인들도 최고의 근무 환경이라 입을 모으는 점입니다."

    시온이 벽난로 앞에 푹신한 쿠션을 모아다 주었다.

    벽난로 앞은 가만히 있어도 나른해질 만큼 따뜻했다. 나는 엎드리거나 누워 숙제를 깨작이곤했다.

    오늘은 숙제는 저택의 풍경을 그리고 색칠하기.

    "여기는 무슨 색으로 칠하실 겁니까?"

    "으음, 하늘색이요."

    "밤의 저택이 아니라 낮의 저택이군요."

    시온은 친절하게 내 숙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 첨탑은 아주 잘 그리셨습니다. 공작님이 특히 아끼시는 건물이지요. 이따가 보여 드리면 어떠십니까?"

    "안 돼요. 아빠는 그림에도, 악기 연주에도 능하시다 했어요. 이런 형편없는 그림을 보면 웃으실 거예요."

    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가씨, 좀 서툰 모습도 아가씨가 하시면 완벽합니다."

    "와, 시온. 우리 아빠처럼 말할 때도 있네요."

    주종은 닮는다는 걸까?

    시온의 창백한 뺨이 살짝 붉어졌다. 잘생긴 동상 같은 시온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건 드문 일이다. 나는 칼렌이 왜 시온을 놀리는지 알 것 같았다.

    "저는 그저 아주 귀여운 그림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내가 삐뚤삐뚤 그린 풍경 그림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저, 시온은 사실 할 일이 많죠?"

    시온이 잘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는 이 저택 전체를 칼렌 대신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루에 몇 번이나 와서 숙제를 봐주거나 놀아 줄 만큼 한가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안다.

    "아뇨. 아가씨를 돌봐 드리는 건 저의 중요한 임무니까요."

    "하지만 그러다 저, 아빠한테 혼나요. 나 놀아 주는 건 시온 일이 아니라고."

    "그 반대입니다."

    시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

    "제가 주인님과 도련님 두 분이 안 계신 틈을 타 아가씨를 그러니까, 으음…… 독점, 이 아니고, 혼자 돌봐 드린 걸 알면 제게 화내실걸요."

    "왜 화를 내요?"

    가끔 이 집안의 두 부자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시온은 그 두 부자를 오래 모셔 왔으니 나보다 훨씬 잘 안다. 시온은 작게 웃었다.

    "두 분은 질투가 심하신 편이지요. 그리고 한번 좋아한 사람에 대해 애착이 강하시고요."

    "아……."

    "그래서 오늘 숙제는 그림 그리기가 전부인가요?"

    "아니요, 그림 한 장 그리기랑 동화책 한 권 혼자 읽기와 시 한 편 짓기요."

    "숙제가 많군요."

    "금방 끝나요. 하지만 시 짓기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영재 판정을 받았지만 사실 내가 받는 교육은 아직 기초 수준이었다.

    '시 짓기나 그림 그리기는 전생의 기억과 전혀 상관없는 영역이지…….'

    전생 어드밴티지가 없다고 할까? 난 글도 겨우 막 뗐으니까.

    그래서 숙제도 다 유치원 수준이다.

    "저는 시를 이해 못 하겠어요. 운율이 도대체 뭐죠?"

    물론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아는 단어는 같은 나이대 애들보다 많았다. 하지만 시가 번드르르한 단어 늘어놓기는 아니잖아?

    '귀족들은 도대체 왜 시 쓰기 같은 걸 배우는 걸까?'

    내가 지금 시를 써 봤자 햇볕은 쨍쨍 매미는 맴맴 수준의 어린이 시일 게 뻔하잖아.

    아니지, 어린이 시도 사실 어른이 쓰는 경우도 많잖아? 어린이 시도 무리인가?

    "저도 시 문학을 배웠는데. 마음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운율을 모르시겠다면 일상 속에 가장 좋아하는 소리나 모습들을 쓰세요. 물론,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열만 지켜서요."

    음, 내가 좋아하는 거라.

    "초콜릿 케이크?"

    시온은 웃음을 꾹 참았다.

    "네, 아주 좋습니다. 초콜릿 케이크의 달콤함을 찬양하는 시도 좋겠군요."

    "그런데 시온은 어릴 적에 학교에 다녔나요?"

    "전 신전 고아원 출신이라서요. 운 좋게 신관들의 교육 코스를 밟았습니다. 고대어나 문학, 노래도 배웠죠."

    ……그건 꽤 고급 지식 아닌가? 뜻밖이었다.

    으음, 집사는 그렇게 많은 공부가 필요한 직업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시온은 아는 것이 많을 것 같아요."

    "칭찬이신가요? 감사합니다."

    시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예의범절 숙제는 없으시고요?"

    "네. 이제 포크 사용법이나 인사법은 더 연습 안 해도 된대요."

    "이제 동화책도 혼자 잘 읽으시지요?"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이 동화 이미 다 읽은 거죠?"

    "아- 신관님들은 마법사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마법사가 나오는 동화는 어릴 적에 못 읽었습니다."

    신전 이야기를 할 때 시온의 표정이 씁쓸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동화책 읽는 것 도와드릴까요?"

    시온이 부드럽게 권유하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나 이제 혼자서 소리를 내 읽을 수도 있어요. 혹시 시온도 이걸 읽어 본 적 없으면, 내가 읽어 줄까요?"

    나는 오늘 숙제를 위해 골라 놓은 마법사가 나오는 동화책을 가리켰다.

    시온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요?"

    "아니, 정말 감사한 제안이지만, 그걸 주인님과 도련님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지……."

    "내 숙제를 도와주면 혼나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서요."

    시온은 미소 지은 채 내가 집은 동화책을 쓸었다.

    "나쁜 마법사와 착한 마법사 이야기. 아,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군요."

    "네. 선생님도 이 책은 꼭 읽으라 하셨어요."

    "……그렇군요. 이건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공작가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 나오는 두 마법사 중 하나가 흑마법사인가요?"

    "네, 맞습니다."

    공작가는 왕국 유일의 흑마법사를 배출하는 집안이다.

    "나쁜 마법사가 공작 가문은 아니겠죠?"

    "……아가씨."

    시온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이 아예 착한 일만 하시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 이 제목 속의 착한 마법사 전설은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동화 속의 착한 마법사가 공작 가문의 시초지요."

    나는 동화책을 폈다. 시온이 읽으라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옛적, 왕국에는 착한 마법사들과 나쁜 마법사들이 살았습니다. 나쁜 마법사들은 너무 욕심이 많아 왕국민을 노예로 삼으려 했어요."

    이야기는 간단했다. 못된 마법사들은 권력자. 그들은 평민들을 잡아다 실험하고 부려먹었다.

    마정석을 펑펑 사용하는 고대의 마법사들은 지금 마법사들 보다 더 강했다고 한다.

    못된 마법사들을 물리치기 위해 평민들과 귀족들 모두가 힘을 모았다. 일명 마법사 정벌 전쟁.

    "마법사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죽을 때까지 싸웠어요. 아주 큰 전쟁이었지요."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마법사들을 착한 마법사들이라 했다.

    "착한 마법사들을 이끄는 흑마법사의 이름은 르웰턴이라고 했어요."

    결국, 착한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왕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쁜 마법사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착한 마법사는 흑마법사. 그리고 나쁜 마법사는 이미 모두 죽고 사라진 백마법사. 왕국인이라면 뒷골목 거지도 다 아는 상식이다.

    "그래서 지금 마법사들은 모두 착한 마법사들이에요. 착한 마법사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감추고 좋은 일에만 마법을 쓴답니다. 착한 마법사 가문들은 모두 왕국의 친구예요. 나쁜 백마법사들은 모두 죽어 무덤 속에 있답니다. 끝."

    나는 책을 덮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칭찬했다.

    "대단하십니다, 아가씨. 이제 조금도 막힘없이 글을 읽으시는군요."

    "헤헷……."

    칭찬은 고래도 춤 추게 하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내 어깨는 으쓱이게 한다.

    "가정교사가 공작가의 이야기가 나오니까 꼭 읽으라고 했던 동화예요."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잠시 시온이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하다 대답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오늘 아가씨 덕분에 좋은 동화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로는 잘 아는 내용이지만 동화로 들으니 새롭군요. 배웠습니다."

    이전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칭찬이란 걸 들어 본 적 없는데, 이 집에선 모든 게 쉽다. 칭찬받는 것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도.

    하지만 나 같은 어린애한테 뭔가를 배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어른인 시온은 대단하다고 생각해.

    "고마워요, 시온. 하지만 이 동화……,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 그건 저도 조금……. 이 동화는……."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잔인해요."

    "약간 잔혹하군요."

    어쨌든 마법사가 엄청 죽은 거잖아? 그걸 이렇게 귀여운 그림이 잔뜩 그려진 동화책으로 만들다니.

    나는 착한 마법사가 나쁜 마법사를 얍얍 때리는 삽화가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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