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18)
  • 32 화

    나는 건물 안을 확인해 보았다.

    '아……. 안에 벽난로도 있어.'

    안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언제든 쉬어 갈 수 있도록 따뜻한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했는데 바들바들 떨렸다. 이번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기뻐서였다.

    "아, 제이드와 내 합작품이다. 네가 두고 온 친구들을 걱정했다면서? 특별한 선물을 해 주고 싶었지."

    제이드가 느긋이 마차에서 내려 말했다.

    "네가 이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싫은 표정을 짓기에."

    "……."

    "생각해 봤어. 뭘 하면 네가 찡그리지 않을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넌 아직 애지. 때로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들이 더 잘 아는 법이고."

    칼렌이 말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깨고 싶었지?"

    칼렌은 이미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거리를 나가면 서로 모른 척하자는 약속에 대해 말이다.

    "제, 제이드가 그런 말도 했어요?"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칼렌이 나직이 설명했다.

    "이 거리의 집들을 모두 사들여 두둑한 돈을 주어 보냈지. 다들 기뻐하더군. 그리고 집들을 하나로 합쳐서 큰 공간을 만들었다. 이 안엔, 오직 어린애들만 들어와 몸을 녹일 수 있어. 겨울 동안 언제든."

    "고맙습니다, 정말로……."

    나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부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아부요?"

    "아빠라고 불러 달라는 아부."

    "난 제이드도 좋고 오빠도 좋아."

    제이드가 말했다. 눈가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그 순간 내 마음의 마지막 방패가 무너졌다.

    혹시 이 집에서 나가게 될까 봐. 정말 친아빠처럼 많은 걸 바라게 될까 봐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아, 아빠……."

    "……."

    "감사합니다, 아빠. 그리고 오빠."

    나는 활짝 웃었다. 눈물 고인채 칼렌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다음엔 제이드.

    "저 지금 최고로 행복해요. 아빠의 딸이라서, 그리고 제이드의 동생이라서. 그래서 너무 행복해요."

    이 세계에서 내가 이런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다. 조금 무서운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좋아.

    이 사람들의 가족이 되고 싶다.

    "그 말, 잊지 마."

    제이드가 피식 웃었다. 칼렌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레로 살아도, 레티시아로 살아도 좋아. 하지만 이 거리에서 있었던 아픈 일들은 여기 레의 일부와 함께 버리고 가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이 상냥하게 덧붙였다.

    "아가씨가 두고 가신 '레' 라는 이름의 일부가 이 집이 되어 여기서 애들을 따뜻하게 해 줄 겁니다."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 건 주인도 집사도 마찬가지. 나는 눈물을 쓱쓱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다,시온."

    칼렌이 슬쩍 웃었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제이드가 말했다.

    "참, 월터라는 아이를 찾아봤는데 없더군. 사람을 시켜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 이 도시를 떠났다고 해."

    "……그랬군요."

    월터는 나보다 네 살 많았다.

    어디서 일하기로 한 걸까? 아니면 아랫마을로?

    '월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월터는 뒷골목 아이치고 외모도 체격도 좋은 애였다. 무엇보다 나보다 훨씬 튼튼했다.

    "찾아봐 줄까?"

    난 고개를 저었다.

    "월터는 어디서든 잘 살 애예요."

    나는 미소 지었다.

    그날, 살인마 제임스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던 월터. 그런 월터의 운명도 바뀌었다. 다시 만난다면 월터도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와 저녁식사 이후 칼렌은 내게 나직이 말했다.

    "내년에는 공작가에서 고아원 사업을 확대할 거다. 네가 살던 뒷골목의 아이들도 원하면 얼마든 들어올 수 있을 거야."

    나는 고집 센 내 친구들이 한 명이라도 더 그 고아원에 들어가길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레의 집이 생기고 내 겨울은 드디어 끝났으니까.

    * * *

    리언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었다. 세 번째였다. 이번 희생자는 칸텐 드 루블. 엘리제를 괴롭힌 놈 중 하나다.

    "이게 공작의 짓이라고 생각해?"

    기차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모자를 눌러쓴 리딘에게 물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그 아가씨는, 잘 지낼까? 우리 은인이잖아."

    신비한, 핑크빛 금발에 하얀 피부의 도자기 인형 같은 공작가의 소녀. 그녀가 리딘과 같은 뒷골목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 소녀 이야기는 그만해. 공작가에 가서 꽃도 두고 왔잖아. 그 아가씨가 그걸 발견할진 모르겠지만……."

    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생각나. 그 소녀가 아니었다면 우린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

    리언은 작은 아가씨, 레티시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욱신거렸다.

    연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가씨가 자란다면, 마치 기사처럼 충성을 바칠 수 있다면 그 아이에게 바치리라.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저 경애만 담아.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 아가씨를 뵙고 '닥터' 에 대해 말해야 하지 않을까?"

    리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리딘의 눈빛이 변했다.

    "퍼시를 살해하는 방법은 우리가 짠 게 아니잖아. 그건 닥터가 도와 준 거야. 닥터는, 그런 걸 설계해 주는 사람이고……."

    리언이 엘리제의 죽음으로 원한을 곱씹으며 하루하루 죽어 갈 때, 그때 '닥터' 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당신 상황을 이해합니다.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퍼시를 죽이는 걸 도와드리죠.〉

    젊다 못 해 어린 외모의 미남자.

    곱상한 얼굴에 안경, 그리고 은발 머리.

    어린 나이에 박사 지위를 가진 사내. 닥터 시벨. 그자는 가끔 학술원에 출강을 나오는 사내라 했다.

    "공작의 얼굴이 기억나?"

    "어떻게 잊겠어?"

    "지금 생각해 보면 닥터는 공작과 조금 닮은 것 같아."

    리언이 중얼거렸다.

    "사람 같지 않은 거?"

    "잘 모르겠어. 그냥 동류 같다는 느낌 말이야.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아."

    닥터 시벨이 설계해 주는 대로 따랐다. 그래서 아주 쉽게 퍼시를 죽일 수 있었다. 다만, 변수라면.

    '레티시아라는 그 작은 아가씨가 모든 걸 간파해 낼 줄은 몰랐지.'

    공작 일가는 변수 그 자체였다.

    "우린 이미 닥터의 말을 어겼어."

    리딘이 속삭였다.

    "닥터는 붉은 꽃을 공작가에 전달하라 했잖아."

    "하지만 우린 그렇게 안 했어. 그리고 다른 꽃을 배달했지."

    "경고하고 싶었어. 그 아가씨에 대해 닥터가 이미 알더라고-."

    일이 실패하고 나서 리언과 리딘은 닥터에게 일의 경위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라는 아이가 자신들이 범인임을 눈치챈 것. 공작 칼렌이 자신들을 보내 준 것.

    닥터는 아무 말없이 꽃 배달을 시켰다. 그러나 리딘과 리언은 그 말을 지키는 대신 공작가에 다른 꽃을 두고 왔다.

    리언은 마지막으로 공작가에 몰래 푸른 장미를 두고 왔다. 레티시아에 대한 경애와 사과와 감사를 담아. 동시에 경고를 담은 뜻이었다.

    "닥터에게 그 아가씨에 대해 발설한 건 너야."

    리딘이 속삭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공작이 알면 우린 죽어."

    리딘이 불안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제 우린 이 도시를 뜰 거야. 모두 없는 일이 되겠지."

    "이게 마지막 기차야. 어서 타자."

    리딘이 리언 몫의 짐까지 들고 일어났다. 리언은 미련이 생기는지 계속 도시 쪽을 힐끔거렸다.

    그때였다.

    "저 사람은……."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쑥한 귀족 복장의, 훤칠한 키에 안경을 쓴 미남자.

    그는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사과하고 있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덜렁거려서……."

    유순한 얼굴로 웃음기 서린 눈매를 한 채 말하던 사내가 리언과 리딘을 발견했다.

    "뒤돌아, 리언."

    리딘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황급히 뒤를 돌아 걸어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기차를 타려던 것 아닌가요?"

    어느새 등 뒤에 성큼 다가온 시벨이 상냥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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