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218)
  • 30 화

    "그게 무슨 말이지? 어서 말해봐라."

    칼렌은 나 이상으로 흥분해서 다그쳤다. 아니, 칼렌이 무슨 일에 이러는 거 처음 보는데.

    "아, 네. 그러니까."

    시벨은 허둥지둥 안경을 치켜들고 서류를 정리했다.

    "언어 능력에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계십니다. 표현력도 풍부하고, 교육 수준을 고려해볼 때 추리력, 상황 파악 능력, 순발력까지 모두 굉장히 뛰어나죠. 암기력도 보통 사람보다 빼어난 수준임은 물론, 숫자 계산은 배운 적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충격적일 정도로 수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즉, 아가씨는……."

    "……."

    "보기 드문 재능을 소유하셨습니다. 아가씨, 공부 많이 하셔야겠습니다. 공작님도 축하받으셔야겠군요."

    내 입은 점점 벌어져 다물 줄 몰랐다.

    아, 맞다. 그래도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으니, 나 썩어도 준치구나. 그 말을 들은 칼렌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역시. 내 딸은 천재라니까."

    "천재는 아니라는데요."

    "맞아. 영재면 천재나 마찬가지지. 거기다 귀여움까지 포함하면 확실한 천재야. 넌 대단하기도 하지."

    반올림 천재라니요. 도대체 그건 무슨 기적의 계산법인가요?

    "아깐 제가 바보라도 상관없다 하셨잖아요."

    나는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누르고 말했다. 솔직히 좋았다. 영재라니. 내 평생 상상도 못 해 본 칭찬이었다.

    "네가 바보라도 상관없지만, 똑똑한 데다 돈까지 많으면 사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거다."

    칼렌이 속삭였다.

    칼렌은 가끔 악마처럼 달콤하게 말할 줄 안다. 거기다 태도 변환도 무지하게 빠르지.

    "이제 초콜릿 케이크 먹으러 갈까?"

    "네!"

    "어서 글을 떼야겠구나. 네가 배워야 할 게 많다."

    칼렌의 표정은 몹시 뿌듯해 보였다. 그때 닥터 시벨이 황급히 만류했다.

    "고, 공작님, 바쁘신 건 알겠지만 테스트 결과가 나왔으니 아가씨와 상담을 해야죠."

    "……넌 이미 내 딸과 충분히 길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칼렌이 눈을 가늘게 만들고 말했다.

    "저어, 닥터가 할 말이 있다고 하시잖아요."

    시벨이 날 보고 고맙다는 듯 미소 지었다.

    "테스트 결과에 대한 상담은 안쪽 방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냐?"

    칼렌은 살벌하게 물었다. 시벨은 움찔했다.

    "상담자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보호자 없이 진행할 필요가 있어서요."

    "아녜요, 갈게요!"

    칼렌이 밖에서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방 한 칸 사이에 두고 누가 나한테 해코지를 할까? 나는 내려 달라며 칼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칼렌은 마지못해 나를 내려놓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시벨이 안쪽 방문을 열었다.

    안쪽 방은 수많은 서류와 인체모형, 정체 모를 기계들로 가득했다.

    "이게 다 뭐예요?"

    "아아, 제 개인 연구실입니다. 제가 이것저것 건드려 보는 연구물들이 많아서요."

    시벨은 용케 자리를 만들어 내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아가씨 같은 분들을 위한 영재들의 교육 코스가 있습니다만……."

    힐끔, 시벨은 문 쪽을 보았다.

    "공작님이 아가씨를 너무도 아끼시니, 아마도 교육 코스를 허락하시진 않을 것 같군요. 거긴 특수 기관이라 좀 먼 곳에 있으니까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계속 방 안을 힐끔거렸다.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그걸 뭐라고 하지. 위화감? 그런 것이 느껴진다고 할까?

    "아, 그리고 눈치채셨나요?"

    시벨이 싱긋 웃었다.

    "이 방 자체가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테스트? 아!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번 재미 삼아 마지막 문제를 풀어 보시겠습니까? 이 방 안에 숨겨진 문제를 찾으셨다면 말입니다. '구조' 를 눈치채셨다면요."

    시벨이 상냥하게 말했다.

    '방 안에 숨겨진 문제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본격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발에 차이는 게 너무 많아.'

    잡동사니들을 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나는 벽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아, 그렇구나.

    "방금 우리가 있었던 방과 이 방의 구조가 완전히 같군요! 다른 점은……."

    방 안을 가득 채운 서류와 기계들을 치우고 나면 아마 완벽하게 똑같은 두 방의 구조가 드러날 것이다.

    갈색 서재 책상, 손님용의 작은 의자, 똑같은 사이즈의 책장. 그리고 맞은편의 그림. 천장의 배기구, 벽에 걸린 램프 걸이까지.

    다른 그림 찾기다!

    '두드러지게 다른 점을 찾는다면……. 그림?'

    책장 맞은편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앞선 방에도 그림이 있었다. 책장을 좀 더 조사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쪽이 더 눈에 띄는데?

    '방금 바깥에 걸려 있던 그림은 풍경 그림이었어. 이 그림도 마찬가지로 풍경 그림이지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바깥에 있는 그림이 특이해서 기억이 나요. 풍경 그림인데, 숲 속 한가운데 난 사거리를 그린 그림이었죠. 하지만 이 그림은 같은 숲 속을 그렸지만, 사거리 대신…… 동그라미 모양을 이루고 있는 꽃이 그려져 있군요."

    동그란 원형 울타리를 따라 자라는 꽃들.

    '십자가와 원형. 먼저 지나온 방을 '아래' 라고 생각하면 십자가위에는 완벽하게 동그란 '원형' 이라.'

    십자가와 원, 십자가와 원…….

    "혹시 이 책장에 십자가와 원이 들어간 제목의 책이 있나요?"

    나는 민망해하며 물었다.

    "전 아직 글을 완벽히 읽지 못해요. 배우는 중이거든요."

    시벨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과연, 영재는 다르군요. 글보다 떼지 못한 아가씨가 이렇게 능숙하게 수수께끼를 추적한다라."

    시벨이 내 등 뒤에 서서 책을 한 권 뽑았다. 몸이 닿을 뻔했다.

    시벨, 보기보다 키가 크구나. 거의 칼렌만큼이나 큰 것 같았다.

    "이 책의 제목은〈십자가의 원형〉입니다."

    시벨이 책을 내게 건넸다.

    '잠깐, 이게 수수께끼의 끝인가? 시벨은 분명 '추적' 이라 했어.'

    나는 책이 뽑힌 자리를 유심히 보았다.

    "이 책이 정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책장의 책이 꽂혀 있던 위치에 기호가 하나 더 있네요."

    누가 일부러 그린 것 같은 원모양의 마크.

    '원이 두 개, 십자가가 하나.'

    만일 십자가가 더하기 표시라면? 두 개의 원을 더하거나 붙이란 뜻이라면?

    "그럼 제가 찾은 원 모양이 두 개. 나란히 그려진 동일한 크기의 원. 그런 문양은 무한을 뜻한다고 들은 적 있어요. 글은 몰라도 제가 주워들은 건 많거든요."

    뱀이 제 꼬리를 무는 듯한 구조. 무한을 뜻하는 기호. 모두 전생에 읽은 미스터리 소설에서 얻은 지식이지.

    "혹시 이 안에 무한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나요? 혹은 비슷한 제목이라도."

    시벨은 이제 얼굴 전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백색으로 반짝이는 책 한 권을 꺼냈다.

    "이 책의 제목은, 〈무한의 연인〉입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시벨이 건네준 책을 펼쳤다. 보통 책과는 달리 속이 텅 빈 그곳에는 '참 잘했어요' 라고 적힌 반짝이는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와. 예쁘다. 고마워요! 제가 정답을 맞혔군요."

    뿌듯했다.

    시벨과 칼렌의 칭찬으로 들떠서인지 난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 기분이 들었다.

    "참고로 〈십자가의 원형〉도 정답이랍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내실 줄이야. 더 파고들면 이어지는 수수께끼가 몇 개 있습니다만, 공작님의 인내심이 경각에 달하실 테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정말 재미있었다. 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재는 다르군요. 정말 똑똑해요, 아가씨."

    이렇게 쉽게 칭찬받아도 되나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음. 솔직히 어깨가 으쓱였다.

    "방금 찾아내신 카드를 뒤집으면 제 연구실 주소가 있습니다."

    나는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이거, 명함?'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명함이었다. 나는 닥터 시벨의 명함을 잘 챙겼다.

    "아가씨처럼 영리한 아이들은 남과 느끼는 것과 아는 것이 커가며 점점 달라질 겁니다. 저 또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고요."

    "선생님은 천재셨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스물이 되기도 전에 여러 박사 학위를 땄죠. 저는 아가씨와 같은 이들을 돕는 교사입니다. 길을 잃을 것 같을 때 꼭 찾아와 주세요. 연구실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고맙습니다."

    나는 가정교사에게 배운 대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시벨이 속삭이듯 말했다.

    "참, 그리고 공작님은 아가씨에게 뭘 기대하시는 게 아니고 아가씨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하시는 겁니다."

    폐부까지 가쁜 숨이 찼다. 시벨이 그냥 닥터는 아니구나. 내 속을 어떻게 알았지?

    나는 뺨이 붉어졌다. 아, 그래서 칼렌은 설렜던 건가? 그냥 내가 자랑스러워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벨은 허둥지둥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를 따라 나갔다.

    "대화가 너무 길어지는군. 수상한데?"

    칼렌이 시벨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조금 전의 총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시벨은 질겁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께 오늘 본 테스트에 대해 조언드린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아가씨, 제 명함이, 아이고."

    시벨은 급하게 움직이다 스텝이 꼬였다. 또 발끝을 책상에 부딪쳤다.

    이러다 저 선생님 발이 남아나지 않겠어.

    "방금 명함 주셨어요."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이제 보니 닥터가 아니라 희극배우구나."

    칼렌은 키득키득 웃었다.

    "닥터 시벨이 공작님이 절 자랑스러워하신다는 말을 해 주셨어요."

    나는 우물쭈물 말했다. 그리고 칼렌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저도 공작님이 자랑스러워요."

    나는 조금 소심하게 작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해요."

    "알았다, 아가."

    갑자기 칼렌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젠 어색하지 않게 아빠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네."

    내 뺨이 붉어졌다. 아빠 호칭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워.

    "이제 우린 간다. 보수는 내 집사가 보내 줄 거다."

    "예……. 아, 알겠습니다."

    덜렁이 시벨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닥터."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칼렌이 장갑을 찾아 끼는 사이, 나는 코트를 입었다.

    "또 오세요, 아가씨."

    문이 닫히기 전까지 시벨은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마주 미소 짓고 콩콩 계단을 내려갔다.

    '카페 간다!'

    * * *

    그들이 방 안에서 나가자 시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들은 대로 흥미로운 아가씨로군."

    그는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진짜 정답에 근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는 아까 그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문제를 풀던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십자가의 원형〉, 〈무한의 사랑〉 두 책을 동시에 빼내고 텅 빈 책장 틈에 손을 밀어 넣는다.

    그러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진짜 정답은 '참 잘했어요 카드' 가 아니라 이쪽이었는데."

    그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싱싱하게 향을 풍기는 붉은 나팔꽃이 가득했다. 황금빛 선이 들어간 붉은 나팔꽃이었다.

    "아, 맞다. 이쪽도 잊으면 안 되죠."

    시벨은 빙긋 웃으며 책장을 밀었다. 책장 너머로 또 하나의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책장 너머에는 거대한 시험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약품에 절여진 한 남자의 시체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수수께끼는 이거. 진짜 닥터 시벨은 어디 있을까였죠."

    그는 시체가 갇힌 시험관 유리를 톡톡 쳤다.

    "정답은 다 맞히되 진짜 정답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상상력이 문제군. 좀 더 잔인한 일을 많이 겪으면 상상력이 생겨서 완벽하게 자라나겠어."

    시벨은 속삭였다. 그는 시체를 보며 말을 던졌다.

    "잘 자요, 진짜 닥터 시벨. 당분간 당신 신분을 잘 써 주죠. 지금까지도 아주 유용했답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미남자의 얼굴에는 아까의 나사 풀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새겨진 미소만이 가득했다.

    "레티시아라. 엄청난 여자로 크겠군요. 기대됩니다."

    그가 시체를 향해 중얼거렸다.

    죽은 지 한참 된 진짜 닥터 시벨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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