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18)
  • 29 화

    "네에……. 전, 레티시아예요."

    나는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시벨은 그런 나를 보고 쿡쿡 웃었다.

    "왜 웃어요?"

    나는 힘없이 물었다.

    "아뇨, 너무 귀여우셔서요. 주인 잃은 강아지같이……."

    "저 강아지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들어 닥터 시벨을 보았다.

    "닥터면 박사님이에요?"

    "네, 그렇죠."

    "박사님들은 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많은 사람들일 줄 알았어요."

    "아아, 전 이제 막 성년이 되었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천재라는 거지요. 어린 나이에 수많은 학위를 따는 사람들. 공작님은 아가씨가 저와 같은 사람일까 봐 확인해 보려 데려오신 겁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아가씨를 도울 수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친절에 감사하지만, 저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닥터, 그러니까 시벨의 입가의 웃음이 지어졌다.

    "정말 귀여우시네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귀족 가문에는 이런 일이 가끔 있답니다."

    "이런 일이 라디오?"

    "팔불출 부모가 제 아이가 천재라고 믿고 저에게 데려오는 일이요."

    칼렌이 팔불출이라고? 그럴 리가. 그 오만하고 도도한 사람이?

    "뭐, 때로 자식이 천재라고 믿었다가 낙심하는 부모들이 있지요. 하지만 그런 부모들은 자식을 이용해 한몫 잡으려 마음먹은 부류들이라 공작님과는 전혀 다른 경우랍니다."

    시벨이 달래듯 말했다. 내 마음이 한 번 욱신했다.

    "만일 아가씨가 정말 천재라면 제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네."

    실패할 걸 알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나는 계속 시무룩해졌다.

    "글을 아직 다 모르신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구술로 하겠습니다. 그냥 재미 삼아 제가 내는 문제들을 풀어 보시겠습니까? 어디 보자, 여기 테스트 표가 있었는데……."

    닥터 시벨은 급히 일어나 책상을 뒤졌다.

    "아야."

    그러다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그는 울상이 되어 정강이를 문질렀다.

    "괜찮아요?"

    "아아, 네. 늘 이러네요. 피는 안 납니다."

    시벨이 순둥하게 웃었다. 시벨이 꽤 미남이라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좀 덜렁거리는 어른이네.'

    나는 그를 빤히 보며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시작하죠. 하하……."

    그리고 닥터 시벨은 신기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이 미로를 선 몇 번을 그어 풀 수 있으신가요?"

    어려운 미로를 보여 주고, 숫자를 보여 주고, 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앞뒤 관계나 문맥에 관해 묻고.

    '……그러고 보니 전생이나 현생이나 나, 배운 게 별로 없잖아.'

    어떤 건 대답할 만했지만 어떤 건 정말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퍼즐이나 스도쿠 비슷한 게임도 있었다. 이런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전생에 엄청 했거든.

    하지만 그뿐. 어려서 죽은 데다 학교에 거의 나가질 못했으니 많이 배웠을 리가 없다.

    "으음, 그러니까……. 공주님이 미로에서 나가지 못한 이유는 첫 번째 기사가 길을 망가뜨려서 아니에요? 그리고 이 길은 이쪽으로 막혀 있고……."

    그래도 풀다 보니 시벨의 수수께끼는 꽤 재미있어서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시벨은 내게 말했다.

    "테스트 결과를 종합해 봐야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다 보면 곧 공작님이 오실 겁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보나 마나 천재 아니다겠지.'

    천재는, 한 번 본 글자를 다 기억하고, 또 기상천외한 것들을 개발하고…….

    으음. 열 자리 열한 자리 숫자도 줄줄 외워서 덧셈 뺄셈을 머릿속으로 해내고…….

    아무튼 그런 거잖아. 그러니 나는 아니다. 난 닥터 시벨의 말을 떠올렸다.

    '자식이 천재인 줄 알았다 실망하는 부모도 있다고?'

    나는 나와 칼렌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나는 칼렌에게 붉은 모자 사건의 살인마를 잡을 단서를 주었다. 그리고 칼렌은 나를 양녀로 들였다.

    '혹시 칼렌은 내가 앞으로도 자신의 '일' 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도움이 안 되면?

    '역시 칼렌이 실망하려나?'

    쫓겨나게 되려나? 아냐, 쫓겨나진 않아도 집안에서 구박덩이가 될지도 몰라.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허리도 아프고 등과 다리도 아팠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결과가 오늘 바로 나올 건 없잖아.'

    갑자기 좀 우울해졌다. 그래서 칼렌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내 눈가는 젖어 있었다.

    "아가?"

    칼렌이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터졌다.

    "왜 그래? 설마 닥터가 무슨 말을 했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훌쩍였다.

    "죄송해요. 저는 천재가 아니에요."

    "뭐?"

    칼렌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늘 닥터 시벨의 질문에 세 번 중 한 번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암기력도 평범한 수준인걸요. 아무 도움이 안 될지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칼렌은 내 뺨을 쥐고 내 눈을 보았다. 얼떨결에 부리 입이 된 나는 발개진 눈으로 칼렌을 보았다.

    "그렇지만 천재가 아니면 실망하실 것 같아서……."

    울 일 아냐.

    나는 울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래서인지 숨이 헐떡거렸다. 내 몸이 휙 공중으로 올라갔다.

    칼렌이 나를 안아 올린 채 눈을 마주했다.

    "쉬이, 착하지. 아가."

    내 숨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딸들은 아빠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한다더니. 정말 맞는구나."

    "……."

    "기대가 아니라 염려였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많이 태어나. 제이드나 나처럼 월반하거나 학위를 일찍 따는 정도는 놀라운 일도 아니지."

    "전 두 사람과 달라요."

    진짜 자식이 아니니까. 더 우울해졌다.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러나 가끔, 진짜 천재가 태어날 때가 있지. 그들은 보통 자살하거나 우울증에 빠진다."

    자살? 내 입이 벌어졌다. 칼렌이 말을 이었다.

    "때로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는 건 불행이거든. 그 정도는 아니라지만, 제이드도 어릴 적에 가벼운 무기력증을 앓았지."

    "……."

    "그래서, 네가 천재라면 미리 예방책이 필요하다 생각한 거야. 그리고 내가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건,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처럼 영리하고 귀여운 아이의 부모라면 누군들 기쁘지 않을까."

    "흐흑……."

    나는 코를 훌쩍였다.

    "영리한 것도 몰라요. 진짜로요."

    "영리하지 않아도 돼. 바보여도 돼."

    "바보를 어디다 써요? 바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잖아요."

    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마치 거지 시절, 전생의 기억이 없던 나 같은 애를 바보라 하는 거겠지.

    하지만 칼렌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못 해도 된다."

    "그럼 다 커서 뭐 하고 살아요?"

    "우리 집에 썩어 나는 돈을 쓰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된다. 그런 어른이 되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알았지, 아가? 내 딸이란 건 그런 의미야."

    그런 거야? 나는 입을 벌렸다.

    역시 칼렌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다.

    "공작님이 달래는 방법은 좀 이상해요."

    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돈 쓰는 직업이라니 그게 뭐야.

    상속받을 돈도 없는 양녀가 가문 돈을 펑펑 쓰면 어떻게 될지 뻔하다.

    칼렌이야 봐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가문은 제이드가 이을 것이고, (아마도) 친척들도 있을 테니 모두가 나를 욕할 거다.

    "이제 다 울었나?"

    칼렌이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나직이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나중에 이불 차면서 후회하게 될 거 같아.'

    좀 진정하고 나니 내가 왜 울었나 싶다.

    "그럼 이제, 카페에 갈까?"

    "카페 진짜 가는 거죠?"

    "그럼. 약속했잖아."

    달콤한 케이크. 반짝이는 설탕 장식이 올라간 아이스크림.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카페 이야기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마치 돈가스 먹으러 가자고 하고 치과 가는 것 같은……. 그런 거짓말.

    "거기 가서 먹고 싶은 건 뭐든 다 사 줄게."

    "초콜릿 케이크요."

    칼렌이 잠시 침묵하다가 내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다음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그래. 아가. 닥터 시벨이 나오면 이야기만 좀 하고. 금방 끝날 거다. 정말 결과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네."

    "녀석이 정말 네게 무례하게 군 게 아니지?"

    "아녜요. 정말로. 테스트 자체는 재미있었는걸요."

    그때 마침 손에 서류를 잔뜩 든 시벨이 걸어왔다.

    "공작님, 오셨군요. 아가씨, 우셨나요?"

    시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벙한 표정이었다.

    "결과가 나왔나?"

    "네, 말씀드리자면 길지만……."

    "간략히 끝내. 아가가 간식을 먹을 시간이라."

    "아. 네.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씨는……."

    보나 마나 평범한 아이입니다, 하겠지.

    그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특별한 대책이 필요할 정도의 심각한 천재과는 아니십니다. 하지만 몇 가지 분야에서 대단히 뛰어난 지능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 정도면 소위 영재급으로 분류하는 재능입니다."

    뭐라고? 내가 영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