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18)
  • 28 화

    "전 그냥 찍은 것뿐이에요. 저도 이렇게까지 맞아떨어질 줄은……."

    나는 급히 말했다.

    "거짓말."

    칼렌이 딱 잘랐다.

    "우연도 두 번이면 필연이지."

    칼렌이 내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넌,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

    "아무래도 네가……."

    꿀꺽. 나는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천재인 거 같구나."

    "……네?"

    제이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영재 판정을 받았지만 이 아이는 어떤 부분에서 저와 아버지 이상이에요. 종류가 다른 영리함이라고 할까요? 그간 교육도 받은 적 없는 아이가 이 정도라면……."

    "그런 거 아녜요. 정말로."

    나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저었다. 천재라니. 가당치도 않다.

    나 그냥 다 모른 척할 걸 그랬나? 으으, 하지만 엘리제가 너무 불쌍한 걸.

    "혹시 읽은 적 없는 책의 글귀들이 떠오르니? 한번 읽은 문자들이 다 기억나거나 본 적 없는 도형들을 외우고 있지 않아?"

    제이드가 내게 재차 물었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면 길바닥에서 거지로 살았겠어요? 거기다 글도 몰랐다고요."

    마침 거리를 지나가며 마차 밖으로 내가 살던 뒷골목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조금 울적해진다. 아직도 이 거리를 지나가면 아프다.

    '많이 춥겠지. 올해 겨울도.'

    제이드가 곁눈질로 내 표정을 살폈다.

    "저는 정말 평범해요."

    혹시 내가 칼렌을 기대하게 만든 걸까?

    "한번 검사를 해 봐야겠다. 제이드가 어릴 적에 만나던 박사들이 있어. 그들이 네가 재능이 있는지 아닌지 알아봐 줄 거다."

    "힝……."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추리한건 전생에 읽은 책들 덕분이라니까요.'

    이걸 말할 수도 없고. 칼렌은 그런 나를 보고 픽 웃었다.

    "역시 내 딸이군. 넌 크게 될 거다."

    칼렌은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애꿎은 곰 인형만 꼭 끌어안았다. 검사를 하면 당연하게도 천재가 아니라고 판정이 날 것이다. 그럼 딸 하지 말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게 또다시 내 심장을 쿡쿡 찔렀다.

    "복덩이가 따로 없군. 아주 재미있게 됐어."

    내 마음과 달리, 칼렌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서자 시온이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께서 같이 오셨군요. 그런데 많이 늦으셨습니다."

    "아가가 배가 고프니 어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다 준비해 뒀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나는 힘없이 칼렌의 품에 안겨있었다. 시온이 내 낯을 살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시온."

    제이드가 나른하게 말했다. 칼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딸이 천재라는 거지."

    이러다 진짜 일 커지는 거 아니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씻고 나자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곰돌이를 안은 채,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들었다. 그 때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문이 스르륵 열렸다. 제이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제이드?"

    "네가 괜찮나 해서 보러 왔어."

    제이드가 나를 보고 나직이 물었다.

    "전 괜찮아요."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왜 마차를 타고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우울해 보이는 거지?"

    제이드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나는 곰 인형 귀를 만지작대며 잠시 말을 골랐다.

    "사거리 뒷골목에서 살았잖아요, 저. 거리에서 살던 시절의 추위가 생각나서요. 그냥 몸에 새겨져 있나 봐요."

    그 말을 하는데도 손발이 욱신댔다. 과거의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지금껏 동상에 걸리지 않은 게 기적이다.

    "그게 다야?"

    "……친구들 생각도 나고요. 하지만 정말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서로 잊는 건 규칙인걸요."

    맞아. 그렇게 하자.

    하지만 계속 심장이 쿡쿡 찔렸다. 제이드는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 나갔다. 나는 가만히 내 머리에 손을 댔다.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보았다.

    '오늘 몸에 칼렌의 손이 닿았을 때 환상을 봤어.'

    전생의 책 내용을 떠올린 것과는 또 다르다.

    '도대체 왜?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하지만 왜, 언제 떠오르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했다.

    * * *

    그 후 며칠간 칼렌은 내가 천재라는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칼렌이 그 이야기를 완전히 잊은 줄 알았다.

    어느 날 오후, 칼렌은 웬일인지 외출하지 않았다. 제이드가 학술원에 가서 저택엔 우리 둘 뿐이었다.

    "아가, 밖에 놀러 갈까?"

    나는 벽난로 앞에서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요?"

    "마리아네가 귀띔해 주길 네가 저번에 간 카페를 좋아했다고 하더구나."

    카페……. 카페라면 그 달콤한 디저트가 가득 있던 곳? 내 입안에 침이 고였다.

    저택의 요리사가 구워 준 파이랑 쿠키도 좋지만 화려한 모습의 반짝이는 케이크는 거기밖에 없었다.

    "정말 거기 갈 거예요?"

    "아아, 그래. 바깥에 볼일도 있고. 준비하고 오렴."

    "빨리 준비하고 올게요!"

    나는 급하게 코트와 모자를 가지러 갔다.

    "아가씨, 뛰지 마시고 그런 건 아랫사람들을 시키세요."

    시온이 급하게 나를 따라 뛰어왔다. 아, 맞다. 또 잊어버렸다.

    나를 보고 지나가던 하녀들이 슬그머니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침착한 태도, 침착한 태도.

    하지만 칼렌의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해? 외출 기회는 흔치 않은걸.

    나는 목 부분에 보송한 털이 달린 케이프를 어깨에 걸치고 모자를 썼다.

    "아주 예쁘구나."

    칼렌이 나를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어, 손잡고 가면 안 돼요?"

    칼렌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픽 웃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갑자기 꼭 끌어안았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 아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칼렌은 나를 몇 번 둥기둥기 하고 내려놓았다.

    으, 둥기둥기는 기분 좋아.

    하지만 내겐 흑심이 있었다. 칼렌의 손을 잡아서 일어날 일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헤헤, 손."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한다. 칼렌의 큰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칼렌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역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 며칠 난 틈만 생기면 칼렌의 맨손을 잡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정말 이 능력이 뭔지 모르겠군.'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빠르게 시내를 달렸다. 그러나 마차가 멈춘 곳은 이전에 마리아네가 데려간 카페가 아니었다.

    [닥터 시벨 연……소]

    이제는 나도 글을 어느 정도 읽을 줄 안다. 닥터. 닥터? 글자를 읽은 내 눈이 동그래졌다.

    "여긴 어디예요?"

    "닥터 시벨의 연구소. 잠시만 여기서 짧은 시험을 해 볼 거다."

    "저를요?"

    아, 천재 테스트. 그제야 감이 왔다. 나는 울상이 되었다. 칼렌이 다독이듯 말했다.

    "널 위한 검사다, 아가. 금방 끝날 거야."

    "그렇지만……."

    저번 생에도, 이번 생에도 난 평범한 애였다. 오히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기 전엔…….

    '나, 바보에 가까웠지…….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그러니 내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름은 닥터였지만, 나를 맞아준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다. 연령을 짐작할 수 없는, 몹시 젊어 보이는 안경 낀 사내 한 명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이분이 말씀하신 아가씨입니까?"

    "아아, 그래. 신사적으로 행동해라. 내 딸에게 조금이라도 무례하게 굴면 큰일 날 줄 알아. 그리고 난 잠시 자리를 비우겠지만 경호원이 밖에 서 있을 거다."

    그러나 닥터 시벨은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별히 모시겠습니다."

    "어디 가세요?"

    나는 칼렌의 옷자락을 급히 잡았다. 칼렌은 몸을 숙여 내 눈을 보았다.

    "이 사람과 잠깐만 대화를 나누고 있을래? 금방 돌아오마."

    "그렇지만……."

    "괜찮아. 금방 돌아올 거야."

    싫은데. 나는 마지못해 칼렌의 옷자락을 놓았다. 칼렌이 나가고, 시벨이란 사람은 나를 의자에 앉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시벨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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