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화
"죄를 지은 건 접니다. 리딘은 풀어 주세요. 저를 흑마법의 실험체로 쓰시든, 죽이시든, 경찰에 넘기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난 실험체가 필요 없다. 헛소문을 들었구나. 그건 그렇고, 꽤 머리를 잘 썼구나."
칼렌이 자신의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리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마지막으로 단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아가씨는 제가 이 장소에서 리딘과 만나기로 한 걸 어떻게 아신 거죠? 그것만은 저도 의문이군요."
으으, 제이드와 칼렌의 시선이 가시방석 같아. 나는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요. 저도 뒷골목 출신인걸요. 당신에게 공범자가 있다면……. 그 공범자는 둘 중 하나겠죠. 경찰이 갈 때까지 섬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먼저 도망쳐 어디선가 리언을 만나기로 했겠죠. 레녹 섬은 제가 처음 가 보는 장소지만 그 근처에 있는 다리는 알아요."
"……피넬 구름다리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리는 강의 물살을 견뎌 헤엄쳐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요. 그리고 그 다리 아래 뚫린 구멍은 지하도로 통해 있죠."
"아아, 그리고 이 위치가 그 지하도에서 나오는 장소다?"
"뒷골목 아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리하시군요."
리언이 창백하게 질린 채 말했다.
"그 작은 단서를 가지고 여기까지 '추리'했다고?"
제이드가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네, 맞아요."
환상 덕분이지만. 그리고 나머지는 전생에 읽은 추리 소설들 덕분이다.
"그리고 궁금했어요. 죽은 여동생의 약혼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오빠는 무슨 사연일까, 하고."
이해 가는 사연이라 더 안타까웠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는 물끄러미 칼렌을 보았다.
'평소처럼 가차 없이 죽일까?'
칼렌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사연을 한번 들어 보라한 거니까.
"사실 난 오늘 누군가 퍼시를 죽였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젝스와 리언, 용의자인 둘을 추후 상세히 조사해 범인을 추려 낼 생각이었지. 내가 나중에 범인을 찾아갈 수 있게 말이다."
"리딘은 몰라도 리언 선배는 아버지의 '조건' 에 부합하지요."
제이드가 나른하게 말했다. 리언과 리딘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못 알아듣는 눈치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제이드?"
제이드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입술이 움직였다.
"난 공감이 가는데."
"……네가?"
"네, 저도 이제 오빠니까요. 누군가 내 여동생의 몸에 요만큼이라도 손을 댄다면……."
오싹. 갑자기 등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 느낌은?'
배 속이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
그러나 그 느낌은 이내 사라졌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굳이 살짝만 상상해도 지금 당장 화풀이로 이 똑같이 생긴 둘 중 한 녀석은 죽여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까요."
리언과 리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기서 더 창백해질 수 있다니. 나는 그들이 딱해졌다.
"아무튼 요는, 나는 공감합니다. 난 이번엔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뜻밖에 칼렌은 나를 보았다.
"레티시아, 네 생각은 어떠냐?"
"저요?"
칼렌이 리언을 가리켰다.
"너, 혹시 이놈의 편을 들고 싶은 건가?"
"네?"
그럼 안 되는……, 건가?
"만일 그런 거라면 난 이 녀석을 살려 주고 싶지 않은데."
칼렌이 입꼬리를 올렸다.
"난 속이 좁은 아빠라 말이다."
"아,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그냥 죽이는 쪽으로 투표할게요."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이게 투표할 문제였어? 그보다 내가 편드는 게 무슨 상관인데?
'혹시 칼렌은 아이 같은 질투라도 하는 건가?'
나 말고 아무도 편들지 마. 이런 심리라든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소녀 시절의 어린 엘리제.'
그 환상을 안 봤으면 모를까, 가엾은 여자. 가슴이 살살 아리다.
"공작님."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굴도모르는 사람이지만, 엘리제가 불쌍해요."
내 눈을 보더니 칼렌은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왜 웃지?
"저는 그냥 공작님이 후회하지 않도록 행동하셨으면 해요."
난 칼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다크 히어로. 이 작품의 우울한 영웅. 그에게 오점을 남겨 주고 싶지 않다. 리딘과 리언은 그가 죽이던 범죄자들과 다르다.
"그래. 사실 난 너한테 고맙다고 하고 싶다, 아가."
칼렌이 속삭였다.
"네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놓칠뻔했구나."
"아……."
역시 칼렌에게도 약간은 이해심이 있었다. 분명 엘리제의 사연을 듣고 나니 마음이 변한 것이리라.
이들을 죽이지 말고 경찰에 데려가란 말을 하려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꿀 먹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래, 리언. 퍼시의 질 나쁜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나? 그날 여름 별장에 있었던 놈들 말이다."
칼렌이 몹시 상냥하게 말했다.
"……네?"
리언이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기억하겠지?"
"……꿈에서도 잊을 수 있을 리가요."
"그래. 내게 그 나쁜 놈들 소개 좀 해 주겠나?"
마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말투였다. 그러니까. 퍼시의 그 친구들……. 엘리제를 괴롭힌 사람들? 먹잇감을 소개해달라고?
"그놈들 이름을 대면 너희는 풀어 주마. 내 딸 덕분인 줄 알아."
칼렌이 속삭였다.
제이드는 리언의 옆에 털썩 앉았다. 꼼짝도 못 하는 리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근하게 말을 건다.
"선배."
"어, 응?"
"다음번에 절 마주치면 선배는 저한테 인사해도 좋아요. 전 선배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거든요."
"……어?"
리언은 귀신에라도 홀린 표정이었다. 제이드는 천사의 미소를 짓고 속삭였다.
"근데 제 여동생한테 아는 척하면 나한테 죽어요. 그리고 다 좋은데, 여동생의 원수를 너무 편하게 죽였어요. 나 같으면 고통스럽게 했을 텐데. 아주 천천히."
제이드가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응?'
나만 입을 딱 벌릴 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 부자를 과소평가했다.
"찜찜한 거 하나를 해치우느니 쓰레기 여럿이 낫지. 걱정 마라. 쓰레기 정리는 내가 전문가거든. 잘못한 게 있으면 벌을 받아야지."
칼렌이 감미롭게 말했다.
맞다. 칼렌의 법칙.
'칼렌은 살인자와 강간범을 동급으로 치지.'
칼렌은 사람의 몸에서 마력을 흡수한다. 그리고 마력을 먹는 사람들을 '먹이'라 부른다.
그는 단 세 가지 경우에만 먹이를 먹는다.
첫 번째, 살인범을 먹는다.
두 번째, 막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먹는다.
세 번째, 무고한 여인을 건드린 놈들을 처리한다. 세 번째는 살인 이상의 중죄니까.
'나도 엘리제를 괴롭힌 사람들이 죽어 싸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리언과 리딘은 꿈을 꾸는 표정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 * *
밖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 진짜 살았어?"
"말도 안 돼."
리언과 리딘은 다 썩어 가는 창고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 나물 었다.
"정말 우리를 풀어 주시겠다고요?"
리언이 리딘의 손을 꼭 쥔 채 우리를 힐끔거렸다.
"그래. 다만, 한번 피 맛을 본 놈들은 변하기 마련이거든. 너희들에게 내 표식을 남겨 둘 터이니, 한 번 더 사고 치면 가장 먼저 잡으러 갈 줄 알아."
리언과 리딘은 핼쑥해져 온몸을 살폈다. 표식이라도 찾는 모양이었다.
"그게 눈으로 찾는다고 찾아지는 줄 압니까?"
제이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도 리딘과 리언의 몸을 살피다 기분이 머쓱해졌다.
칼렌이 남긴 표식이라면 흑마법이겠지? 눈에 보이는 건 아닌가 보다.
"이리 와. 아가."
칼렌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칼렌에게 다가갔다. 칼렌은 나를 안아 올렸다. 제이드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아, 참."
칼렌이 나를 안은 채 뒤를 돌았다.
"잘 먹었다."
……뭐를? 리언과 리딘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다.
"뭘……, 말입니까?"
리언이 눈을 끔뻑였다.
"우리가 퍼시를 발견했을 때 말이다. 막 죽은 상태였거든."
칼렌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내 눈도 커졌다.
"아아, 퍼시 선배가 그런 쓰레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군요.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아버지가 드신 게 찜찜했는데 말이죠."
"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리언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탁. 내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저쪽으로 가서 3초 세고, 열 발짝만 걸어서 소리를 질러 두 날파리를 부르렴. 그리고 넌 뒤돌아 있어. 시체는 우리가 살필테니.〉
분명, 칼렌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칼렌이 먹이를 먹는 두 번째 법칙.'
우연히 죽은 시체를 발견하면 마력을 흡수한다.
그러니까 죽어 가던 퍼시는 뭐랄까, 강변에 흘러들어 온 연어 같은 것이었다. 그냥 주워 먹으면 되는 거.
어버버 하는 사이 칼렌은 나를 무릎에 앉혔다.
"내 아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항상 즐거운 일만 있겠구나. 쓰레기 청소는 언제나 즐겁지."
칼렌이 속삭였다.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알겠다, 레티시아."
"네?"
"네 정체에 대해서."
내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칼렌을 보았다.
내 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