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18)
  • 26 화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흉흉한 눈으로 마차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리언을 놔줘!"

    그가 나직하게 외쳤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괴한이 고개를 들었다. 리언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쌍둥이 형제. 역시 맞아.'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내가 본 환상은……. 리언에 대한 기억이었어.'

    엘리제로 추정되는 아이와 뛰어노는 리언. 처음에는 환상이라 리언이 두 명으로 보인다 생각했다. 찬찬히 사건에 대해 떠올려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건 리언과 그의 쌍둥이, 어린 엘리제가 놀던 모습을 본 환상이었다. 그래서 환상 속에서 어린 리언이 두 명이었던 것이다.

    쌍둥이는 똑같이 생겼으니까.

    "내 딸을 놔라."

    칼렌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놓으면 천천히 죽여주지. 고문 없이 말이다."

    칼렌이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리언의 쌍둥이의 몸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먼저 리언을 내보내 줘. 안 그러면 이 여자애를……."

    "이 여자애를 뭘?"

    "……."

    "내 딸의 뺨에 흉터를 남기려고, 아니면 목을 베려고? 아니면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게 하려고?"

    칼렌이 서서히 두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꼼짝 못 할 것 같으냐?"

    퍽! 다음 순간, 리언의 쌍둥이는 무언가 보이지 않은 힘에 얻어맞은 듯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갔다.

    "리딘!"

    리언이 외쳤다.

    나는 리딘이라 불린 소년을 때린 것의 잔상을 똑똑히 보았다.

    새까만 마력 덩어리.

    이전에 붉은 모자 살인 사건에서 윌리엄을 묶고 있던 것과 같았다. 그것이 채찍처럼 리딘의 뺨을 쳤다.

    "으윽!"

    리딘은 흙바닥 위를 굴렀다. 뱀 같은 마력이 리딘의 몸을 칭칭 휘감는다. 흑마법이었다.

    이어 제이드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리언의 목에 들이댔다. 리언은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제이드가 그 상태 그대로 눈만 돌려 칼렌을 보았다.

    "아버지, 바로 죽이겠습니다."

    제이드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나는 급히 외쳤다.

    "잠깐! 잠깐만요!"

    제이드와 칼렌이 동시에 인형 같은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요!"

    "……."

    "부탁이에요."

    나는 간절히 말했다.

    "그러지."

    칼렌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마차 문을 활짝 열고 바닥에 뛰어내려 신음하는 리딘의 뒷덜미를 잡았다.

    "하지만 이놈이 감히 우리 아가에게 칼을 들이댔으니 일단 두 손을 자르고."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그럼 죽이겠단 거나 다름없잖아! 여기서 두 손을 자르면 죽는다고

    "나 괜찮아요! 스치지도 않았어. 정말이에요!"

    나는 두 손을 마구 흔들어 보였다. 오히려 그 바람에 다친 어깨가 살짝 욱신거렸다.

    칼렌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사슬이 리딘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이드가 리언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제야 나는 리딘의 몸이 물에 쫄딱 젖어 있는 걸 눈치챘다. 마치 강이라도 헤엄쳐 온 것처럼.

    그에게선 축축한 냄새가 났다.

    "아아, 그랬군요."

    제이드가 나른하게 중얼댔다.

    "두 사람이었어. 언제부터 바뀌어 있었던 겁니까?"

    "……."

    "……."

    "그리고 둘 중 퍼시를 죽인 건 누구?"

    리언과 리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나 더."

    칼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가는 이 모든 걸 어떻게 다 알았을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걸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 아가는 날 조종하는 재주가 있구나."

    칼렌이 톡, 하고 혀를 찼다. 그 순간 내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할 순 없었어.'

    내 생각이 맞는다면 말이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듣는 취미는 없지만, 아가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칼렌이 손짓하자 제이드가 리언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끌어냈다.

    강가 근처의 뒷골목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창고가 있었다.

    리언과 리딘 쌍둥이는 칼렌의 손끝에 따라 움직이는 검은 기운에 꽁꽁 묶여 창고 중앙에 앉혀졌다.

    사슬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그건 새까만 뱀이었다.

    '칼렌이 마법으로 불러낸 건가?'

    칼렌은 리언의 턱을 쥐고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 입은 풀어 주마, 만일 혀를 깨물면 나머지 한쪽을 죽을 때까지 고문할 거다."

    "아버지, 그런 말을 하실 땐 아가의 귀를 막아야죠."

    제이드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품 안에 단도를 넣었다.

    "……으으."

    나는 제이드의 옷깃을 꼭 쥐었다. 제이드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 내 딸이 원하는 대로 심문을 시작해 볼까?"

    칼렌이 나른하게 중얼댔다.

    "왜, 어떻게 그런 짓을 했지?"

    "저는……."

    창백하게 질린 리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는 살인 방법을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주 단순한 바꿔치기 트릭.'

    리언은 장미를 자르러 갔을 때이니 한 번 쌍둥이 형 '리딘'과 뒤바뀌었다.

    리딘이 우리와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지키는 사이, 리언은 잠복해 있다가 퍼시를 죽였다.

    "퍼시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죽었어요."

    나는 작게 말했다.

    "약을 먹였어요?"

    "……그랬다면 아가씨께서 눈치채셨겠죠. 이토록 영민한 아가씨니까요. 약물을 묻힌 수건으로 입을 막아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게 했답니다. 퍼시를 유인하는 건 쉬웠어요. 퍼시는 엘리제에게 늘 파란 물건을 선물하곤 했거든요. 엘리제의 유품 이야기로 퍼시의 마음을 자극했죠."

    엘리제의 유품 중에는 파란 물건이 가득했다, 라고 리언은 말했었다.

    칼렌은 계속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마지막에 거울 신호를 보내러 가는 몇 초, 그 몇 초 사이 또 뒤바뀌었군요."

    "네. 그때 저와 리딘이 다시 바뀌었죠."

    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만히 리언을 보았다. 그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리며.

    "후회하지 않아요. 퍼시, 그놈은 엘리제를 우롱했어요."

    리언이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우리 가문은 워낙 가난해서 어릴 적 쌍둥이로 태어난 리딘을 방계 가문에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죠."

    리언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리딘이 입양간 가문이 망했습니다. 리딘은 거리의 아이가 되었죠. 아가씨가 뒷골목 출신이란 건 놀랍지만……. 아마 그때 만나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 둘 다 10대 초반이 되어서야 재회했죠."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설마…….

    〈우리 열다섯 살 때였나. 리언이 어느 날 다른 사람처럼 쾌활해졌잖아? 그때는 뭘 잘못 먹었나 했는데 어느 순간 지금의 성격이 되었지.〉

    젝스의 말. 그렇다면 혹시……?

    "……리언 님, 혹시 지금껏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산 거예요?"

    "맞아요. 신분을 공유했어요. 우린 쌍둥이 중에서도 닮은 얼굴이었거든요."

    리언은 내 질문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술원 학비는 비싸니까요. 리딘에게 귀족의 생활을 돌려주고 싶었죠."

    "같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연습했겠군요."

    나는 중얼거렸다.

    "아아, 가끔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던 이유는 그거였군."

    제이드는 중얼거렸다. 리언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퍼시를 왜 죽인 거죠?"

    제이드가 물었다. 이득. 리언이 이를 갈았다.

    "퍼시가 엘리제를 죽인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

    "엘리제는 커 가며 점점 놀랄 정도로 예뻐졌어요. 그랬더니 퍼시의 집안에 약혼 파기에 대한 위약금을 내줄 터이니 청혼을 받아 달라 제안하는 사내들마저 생겼죠. 작위와 재산을 갖춘 사람들요. 그걸 퍼시가 알고……."

    "뻔하군. 돈밖에 없던 퍼시라는 놈이 서투르게 일을 친 거군."

    칼렌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리언이 고통을 참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게 다였나요?"

    나는 조용하게 물었다. 리언은 알 수 없는 것을 본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가씨는 정말 신비한 분이시군요. 이 작은 몸 안에 마치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흐읍, 내 폐부에 숨이 들어갔다.

    다행히 칼렌과 제이드가 뭐라 말하기 전에 리언이 말을 이었다.

    "작은 아가씨의 말이 맞아요.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죠. 퍼시는 엘리제를 여름 별장에서 건드렸어요. 그 별장에는 퍼시의 질 나쁜 친구들도 몇 명 있었죠. 놈들이 퍼시를 부추겼죠. 퍼시는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처럼 우울해지거든요."

    "……역겹군."

    제이드가 평했다. 그의 얼굴에는 경멸이 떠올라 있었다.

    "문제는-"

    리언은 이를 악물었다.

    "퍼시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자 그 별장에 있던 다른 놈들도 엘리제를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것도 여러 놈이……."

    악마 같은 놈들. 나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엘리제는 자살했나요?"

    리언은 우울하게 나를 보았다.

    "아가씨, 귀족 집안 사이에서 미혼자가 '폐렴으로 죽었다' 라는 말은 대부분 자살이란 뜻이랍니다. 그 애는 죽기 전에 우리에게 모든 진상을 털어놓고 울었죠. 엘리제는 손목을 그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퍼시를 죽이고 싶었군요."

    이 또한 이미 알았다. 엘리제의 얼굴도 몰랐지만 새삼 마음이 아팠다. 칼렌이 이어서 물었다.

    "그래서 복수하기 위해 죽인 거다? 이놈은?"

    칼렌이 리딘을 가리켰다.

    "여동생과 같이 자란 것도 아니지 않나?"

    "리딘과 저, 엘리제는…… 일생에 단 한 번이지만 일주일 동안 별장에서 남매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게 유일하게 우리가 남매로 보낸 시간이죠. 그 기억이 지금껏 우리를 살렸습니다."

    내 손이 떨렸다. 분명히 그게 내가 엿본 기억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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