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18)
  • 25 화

    * * *

    경찰이 도착하고, 정신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경찰들이 퍼시의 시체를 실어 갔다.

    "안됐군요. 미래가 창창한 청년인데. 손목을 단칼에 끊어 자진했습니다. 상처가 깊어 소리도 없이 죽었을 겁니다. 출혈 때문에 몇 분 살아 있지 못했을 거예요."

    "퍼시는 검술이 특기였죠. 그 실력으로 정맥과 동맥을 한꺼번에 그은 겁니다."

    젝스가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요즘 이상한 일에 많이 휘말리시는군요, 공작님."

    "이 도시에 워낙 이상한 일이 많은 걸 어쩌겠나? 그저 우연일 뿐이네."

    칼렌의 말에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의 낯이 익었다. 이전에 의상실 앞에서 붉은 머리 여인이 심장 마비로 죽었을 때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은 사람이었다.

    "자네 이름이 뭐였지?"

    "아. 쉘던 경사입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 쉘던 경사. 증언이 다 끝났으면 가도 되겠나?"

    "예. 물론입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쉘던이란 이름의 경찰이 공손히 인사했다.

    "집에 가자, 레티시아."

    칼렌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칼렌의 손을 잡았다. 내 눈은 계속 젝스를 보고 있었다.

    "흐흑, 그러면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흐느껴 울던 리언이 다가와 말했다. 리언은 마음이 참 여린 사람 같았다. 나는 칼렌의 옷깃을 잡았다.

    "공작님, 리언 님이 너무 불쌍해요."

    "그래?"

    칼렌은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보았다. 다른 경찰과 말을 마친 제이드도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저어, 리언 님의 죽은 여동생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아파요. 우리가 데려다주면 안 될까요? 가는 길에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

    "여동생의 약혼자마저 이렇게 되니 그 마음이 어떨까요? 그리고 젝스 님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둘이 같이 있으면 분명, 퍼시 님의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한 일에 대해 서로를 탓하게 될 거예요."

    나는 칼렌의 품에 파고들어 몸을 덜덜 떨었다.

    "너무 슬퍼요."

    칼렌은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우리 아가는 착하기도 하지."

    제이드가 내게 몸을 굽혔다. 그리고 칼렌에게 달라붙은 내 눈을 보았다.

    "겁을 먹었구나, 아가."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한 대로 해 주실 수 있지요?"

    "아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리 와요, 리언 선배."

    제이드가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리언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네?"

    어어, 하는 사이 제이드는 리언의 등을 떠밀어 배에 태웠다.

    '어쩌면 이게 리언을 구할 방법이야. 젝스와 단둘이 가는 것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말이다. 젝스는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끼익, 끼익.

    하인이 노를 젓기 시작했고, 불쌍한 젝스가 점점 작아져 갔다.

    돌아가는 배에서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푸른 장미가 다시 붉게 물들던 레녹 언덕. 그곳을 떠나 강 건너편으로 오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평소처럼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수도의 건물들이 보였다.

    강둑에는 이미 칼렌이 여기까지 타고 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저희는 좀 떨어진 곳에 대 놓은 공작님과 아가씨가 타고 오신 마차를 타고 가겠습니다."

    하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리언이 그들을 보며 바쁘게 눈을 굴렸다.

    "저는 이제 알아서 귀가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리언의 낯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공작가의 친절이 몹시 불편한 듯했다.

    "아녜요! 지금 당장도 기절하실 만큼 창백한걸요. 제이드, 어서 리언 님이 마차에 타는 걸 도와주세요. 이렇게 된 거 목적지까지 모셔다드려야죠."

    "어서 타지, 리언이라고 했나?"

    칼렌은 리언을 마차 안에 밀어 넣었다.

    "우리 집은 아이의 어리광을 다 들어주는 것이 교육 방침이라서 말이다. 딸이 원한다면 마차에 누굴 잠시 태워 주는 호의 정도는 일도 아니지."

    "잠깐……."

    리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칼렌은 마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칼렌은 '무슨 재미있는 일을 알고 있니?' 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리언은 불안한 듯 마차 안의 우리를 훑어보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정리했다.

    '그거면 앞뒤가 맞아.'

    내 추리는 간단하다. 리언은 오늘 아주 간단한 함정을 통해 퍼시를 죽였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사연이야.'

    왜? 왜 그런 방법을 써서 퍼시를 죽였지? 혹시 그 이유 또한 내가 추측한 게 맞는다면.

    나는 칼렌에게 이유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기분이 찜찜할 것 같으니까.'

    칼렌이 정의의 살인마인 건 알지만 그래도 개개인의 사연을 다 들어주는 건 아니거든. 그것도 원작에 나온 내용.

    '소설의 결말은 모르지만 조금 우울한 소설이었지.'

    소설 속의 칼렌은 그다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 리언이 낯익었던 거야.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제 거의 도착할 때가 됐는데.'

    마차는 강변을 따라 흐르듯 달리고 있었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골목. 빈민가였다.

    "아, 공작님!"

    나는 칼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왜 그러니?"

    "곰돌이의 목에 묶여 있던 리본이 창문 밖으로 떨어졌어요."

    '곰돌이'는 칼렌이 선물해 준 곰인형의 이름이다.

    "원래 리본이 묶여 있었나?"

    "아침에 마리아 네가 제 머리에 단 리본과 맞춰서 달아 주셨는데."

    칼렌은 마차 벽을 두드려 마차를 세웠다.

    "딸이 오는 길에 리본을 흘렸는데 좀 찾아오겠느냐?"

    칼렌은 마부에게 은화를 주며 말했다. 마부는 잠시 말을 진정시키더니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리언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날 본다.

    "역시 저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그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리언의 행동은 모두 내 예상대로였다.

    "이쪽은 인적이 드물어 위험해요."

    "괜찮습니다, 정말로."

    난 리언의 대답을 듣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이 골목에서 내려야 할 '이유' 가 있겠지.'

    나는 리언을 붙잡았다.

    "저어, 리언 님. 가시기 전에 하나 여쭤볼 게 있어요."

    나는 내 치마를 손으로 꼭 쥐며 살짝 눈치를 봤다.

    "제게요?"

    "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리언 님, 혹시 예전에 저를 본 적 있으신가요?"

    "네? 그럴 리가요. 이렇게 귀여운 분을 보고 잊을 리가 있나요."

    리언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누구세요?"

    "네?"

    내 질문에 세 사람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저, 리언 님을 이전에 뵌 적이 있어요. 아주 오래전에요."

    "그게 무슨 말이니, 레티시아?"

    제이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하나만 묻겠어요."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물었다.

    "기차역의 시계탑은 무슨 색이죠?"

    그 말에 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금색이지요."

    사실이다. 기차역의 가장 큰 시계탑, 그것은 찬란한 금색이었다.

    하지만, 아까 레녹 섬에서 리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학술원에 온 첫날의 심경이 아직도 기억난다니까요……. 기차역에서 내렸을 때의 설레는 마음, 기차역의 파란 시계탑의 종소리와 비둘기들. )

    나는 그 말을 되짚어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는 기차역의 시계탑은 파란색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제가 그랬나요?"

    리언이 흠칫 놀랐다.

    "아깐 술도 마시고 했으니 착각하고 말실수를 했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파란색인 것도 맞는 걸요. 다른 색도 아니고, 파란색으로 착각할 순 없어요."

    "네?"

    리언은 점점 더 수수께끼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리언의 '말실수'덕분에 내 수수께끼 풀기는 편해졌다.

    "기차역의 시계탑은 밤에만 파란색이 되어요. 그리고 거리의 아이들은 그 시계탑을 집회 장소로 쓰죠. '파란색 시계탑에서 만나자', 그건 밤에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뜻이에요."

    사실이었다.

    기차역의 시계탑은 금색. 작지만 정말 예쁜 시계탑이었다. 그리고 그 시계에는 특수한 염료가 발라져 있어, 한밤중에는 파란색으로 빛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낮에 기차를 구경 가자 꼬셔서 기차역에 잠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 분명 이 시계탑. 저번엔 파란색이었는데…….〉

    시계탑은 대낮에는 금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꼭 마법 같았다.

    '그때 결국 역무원에게 들켜 크게 혼나긴 했지만 말이지.'

    그리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밤에 기차역에 가지 않는다. 제국의 기차는 저녁 6시 이전에 모두 끊기고, 밤에는 기차역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집회 장소로 삼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랫마을에 사는 애들. 주로 소매치기들이었다.

    "저, 밤의 시계탑 집회에서 리언 님을 한 번 뵈었어요."

    나는 싱긋 웃었다.

    "저도 리언 님과 비슷한 곳 출신이거든요. 리언 님, 아랫마을 출신이시지요? 그래서, 오늘 겪은 일에 너무 걱정이 돼서……."

    "……."

    "아, 하지만 시골 출신이라 하셨지요?"

    리언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어떻게 된 거죠? 어려워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리언 님이 두 분이신 것도 아니고."

    칼렌의 표정이 변했다.

    "두 사람이라."

    그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제이드의 표정도 비슷했다.

    "저는……."

    리언이 불안하게 손을 움직였다. 제이드가 품 안에 손을 가져갔다.

    벌컥!

    그 순간 마차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다음 순간, 내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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