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18)
  • 23 화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어느새 파란 장미 다발을 손에 쥔 리언이 다가와 있었다. 울었는지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장미를 좀 나눠 드릴까요? 가시는 대강 손봤습니다."

    무덤에 바칠 장미를 나눠 주는 것이 꺼림칙했는지 리언이 조심스레 나를 보았다. 나는 미소 지었다.

    "한 송이만 주세요. 잘 간직할게요."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것이 예의의 기본이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표정을 보니 이야기를 들으셨나 보군요. 맞아요. 사실 오늘 여기 오자고 한 건 엘리제 때문입니다……. 죽은 제 여동생이 파란 장미를 꼭 한번 구경해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아, 정말 우울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퍼시와 젝스는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어제 짐 정리를 하다가 여동생의 짐을 발견했거든요. 파란 물건이 가득했답니다. 파란색을 좋아했으니까요."

    퍼시는 묵묵히 리언의 말을 들었다.

    "여러모로 정말 고마워요. 엘리제를 생각해 다시 약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고맙고요."

    "그런 말 마. 우리 집안이야말로 돈밖에 없는 가문인데. 명문가 출신인 데다, 고결한 엘리제 같은 이가 첫사랑이라는 건 내게 큰 의미야."

    그렇게 말하곤 퍼시는 감정을 추스르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나야말로 고마운 것뿐인걸요. 퍼시의 가문은 약혼식 때 우리 가문에게 지원한 보석과 돈들도 돌려 달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돈으로 우리 가문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눈치를 보던 젝스가 입을 열었다.

    "이 뒤에 다 같이 엘리제를 만나러 갈까?"

    "그럼 정말 좋죠. 만일 퍼시가 장미를 가져다준다면 엘리제가 얼마나 기뻐할지……."

    젝스도 괜히 코끝이 붉어지는지 시큰한 콧날을 매만졌다.

    '이렇게 남 앞에서 훌쩍일 정도로 슬픈 일인 거겠지. 안됐다.'

    한 편으론 세 명의 우정이 훈훈해 보였다. 리언이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돌렸다.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 해요. 아가씨, 수도 생활에 대해 궁금한 건 없나요?"

    "사실, 수도에서 가 본 곳이 거의 없는걸요."

    나는 수줍게 대답했다.

    "좋은 곳이 많답니다. 전 시골에서 자라 수도가 정말 별세계죠. 학술원에 온 첫날의 심경이 아직도 기억난다니까요. 붉게 물든 노을 속의 타일, 그리고 기차역에서 내렸을 때의 설레는 마음, 기차역의 파란 시계탑의 종소리와 비둘기들. 수도에서 소년기를 보낸 건 영광스러운 일이죠."

    으음, 내가 자란 수도 뒷골목은 안 그랬는데.

    '하지만 나도 기차역의 파란 시계탑은 정말 예쁜 것 같아.'

    "리언은 옛날이야기처럼 말을 하네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퍼시 일행이 일어나 강변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사이 나는 무릎에 숄을 덮고 자리 위에 발랑 드러누웠다. 햇살이 얼굴 위로 살랑살랑. 엄청 기분 좋았다.

    "이대로 낮잠 자고 싶다……."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재미있어?"

    제이드가 물었다.

    "피크닉 엄청 좋아요. 벌써 또 오고 싶어요."

    제이드가 피식 웃었다.

    "모처럼 데려온 보람이 있군."

    나는 헤헤 웃었다. 잠이 왔다.

    이대로 햇빛에 잘 탄 빵처럼 노릇해지고 싶다…….

    "잘래?"

    "저 깨워 주셔야 해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라곤 다섯뿐인 작은 섬이잖아. 나 두고 가면 어떻게 해?

    아직은 지금의 일상이 너무 꿈같아서 작은 실수로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 여기서 제이드와 헤어지고 다시 거리에서 살게 된다든가.

    "당연하지."

    제이드가 내 머리 위로 모자를 푹 덮어 주었다. 나는 잠시 짧은 낮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얼마나 잤지?'

    눈을 비비고 벌떡 일어나 묻을 보니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 여자들인데?"

    강가에 친구들과 서 있던 퍼시가 배를 보며 중얼댔다. 나는 배에 탄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칼렌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님!"

    "아버지라고?"

    제이드가 말했다. 나는 어느새 강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파란색, 빨간색, 흰색. 색색의 양산들. 그리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포실포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조그만 레녹 섬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배가 멈추고, 미남자 한 명이 배에서 내렸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공작님, 다음번에 또 만나요."

    "꼭 한번 우리 가문 무도회에 와 주세요."

    안 봐도 저 배에 탄 유일한 남자가 누굴지 뻔했다. 내 양아빠, 칼렌. 그가 아니라면 저 언니들이 이렇게 단체로 황홀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을 리 없다.

    '역시 주인공! 엄청난 인기구나.'

    그녀들이 탄 배가 출발하고 칼렌이 내게 다가왔다.

    "아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니?"

    "네. 어떻게 오셨어요?"

    "당연히 널 보러 왔지. 아침에 서운해 했지 않으냐?"

    칼렌이 나를 휙 들어 올렸다.

    그 정도로 어리진 않지만 이렇게 들어 올리는 장난은 언제나 환영이다. 나는 까르르 웃었다.

    "그냥 핑계 대고 저 언니들이랑 배 타고 싶었던 것 아녜요?"

    "아냐. 난 핑계 같은 거 안 대."

    칼렌이 내 뺨을 쭉 당겼다. 읏. 이런 장난은 싫어.

    "날 한달음에 달려오게 할 수 있는 애는 우리 집 애뿐이지."

    나는 내려 달라는 뜻으로 칼렌의 팔을 당겼다. 칼렌이 나를 바닥에 내려 주자 귀신 보듯 나를 보고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공작님께서……."

    퍼시가 중얼댔다. 내게 칼렌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제이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이드."

    "네, 아버지."

    "내 딸과 샤프롱도 없이 감히 한자리에서 노닥대던 이 날파리들은 누구냐?"

    순식간에 날파리 세 마리가 된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기다, 내 어린 딸 앞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라……."

    그들은 벌떡 일어났다.

    "시, 실례했습니다. 단지 저희는 차를 한잔하려다가……."

    "네, 네에. 아무런 짓도 안 했습니다."

    칼렌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들을 보았다.

    "자기소개."

    짧은 명령이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저는!"

    퍼시, 리언, 젝스는 앞다투어 자기소개를 했다. 제이드가 짧게 덧붙였다.

    "제 학교 생도회 선배입니다. 우연히 만난 참이었고요."

    "그래서 날파리냐, 아니냐?"

    "살충제를 써야 할 부류는 아닙니다."

    나긋한 말투의 대화지만 점점 무서워지는 이유는 뭘까?

    "아, 농담이다. 딸이 너무 예뻐 그러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칼렌은 마지막에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도 농담 같지 않았다.

    이미 저 사람들 얼음 됐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신 겁니까? 국정 회의는 꽤 길 텐데. 설마 남매끼리의 오붓한 시간이 샘나서 그러신 건 아니지요?"

    "폐하가 요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시는지, 일찍 끝내자고 하셔서."

    "그게 정말 폐하의 뜻인지 궁금해지네요."

    제이드가 흘리듯 말했다. 정작 칼렌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사이에 앉았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구나."

    칼렌이 제이드의 선배들을 보며 말하자, 그들의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리 온, 아가."

    칼렌이 나를 불렀다.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인형을 들어 안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지?"

    "어린 아가씨께 수도 생활에 관해 이야기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슈퍼스타를 만난 팬들의 반응이 이럴까? 젝스는 더듬더듬 말했다.

    '겁먹은 것 같으면서도 이 사람들 즐거워 보이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퍼시만이 칼렌과의 대화를 즐기지 못 했다.

    '퍼시라는 사람 몸이 안 좋은가?'

    아니나 다를까 퍼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어, 바람을 쐬고 조금만 술을 깨고 오겠습니다."

    퍼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뭐지? 그 표정은. 할 말 있으면 해 봐."

    "저어, 사실 공작가의 마도구 사업에 관심이 있는데요. 제 졸업논문 소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도회에 계실 때 일을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역시 리언과 젝스는 칼렌의 팬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그들이 물었다.

    "레티시아, 너도 궁금한가?"

    칼렌이 날 힐끗 보며 물었다.

    "으음- 공작가에 대한 건 다 궁금해요."

    나는 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칼렌이 픽 웃었다.

    "그래, 그럼 말해줄까?"

    그 후로는 의외로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칼렌의 말은 어려운 게 많아 다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칼렌이 대외적으로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어느새 조금 쌀쌀한 시간이 되었다. 햇빛이 한층 약해지고 있었다. 제이드가 나를 보고 다정하게 물었다.

    "집에 갈까?"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인들이 배를 가지고 올 겁니다."

    "아, 저희 하인들도 부를게요. 강가에서 제가 거울 신호를 주기로 했거든요."

    리언이 일어났다. 그는 뛰어가더니 거의 바로 돌아왔다.

    "하인들이 신호를 받았어?"

    젝스가 물었다.

    "네."

    그때 첨벙, 하는 물소리가 났다.

    나는 인형을 안은 채 귀를 쫑긋 세웠다.

    "물새가 참 많군요."

    젝스가 한가하게 말했다.

    "퍼시가 꽤 오래 걸리는데, 많이 취했나 봐."

    "지금 가 봐도 될까요? 퍼시가 감정 기복이 있어서……."

    아, 맞다. 파란 장미!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님께서 파란 장미를 구경하셨으면 좋겠어요. 굉장히 예뻐요."

    "그럴까?"

    이번엔 내가 칼렌에게 장미 덤불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겠다.

    나는 신이 나서 칼렌을 끌어당겼다.

    "빨리요!"

    그리고 장미 덤불에서 내가 발견한 건 예상외의 것이었다.

    새파란 장미 위. 그 위쪽으로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그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퍼시?"

    제이드가 중얼거렸다.

    '죽었어…….'

    장미 덤불 위에 쓰러진 퍼시의 손목에서는 끊임없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막아 비명을 삼켰다.

    '마치, 장미를 원래 색으로 되돌리려는 것 같아.'

    파란 장미들은 붉은 피가 맺혀 서서히 원래의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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