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18)
  • 21 화

    "친구?"

    하지만 제이드보다는 두세 살 위로 보이는데.

    "선배.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냐. 같이 뭘 좀 하고 있을 뿐이지."

    "뭘요?"

    "생도회. 그러니까, 행사 같은걸 계획하는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돼."

    으음, 전교 학생회 같은 건가? 그럼 가까운 사이……일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그런 건 공부 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보통 성적 혹은 가문 순이지."

    "제이드는 공부 잘해요?"

    "1년 월반할 정도로는."

    헤에, 그럼 엘리트 아닌가? 그런데 공부는 열심히 안 하는 것 같던데. 그가 공부하는 것을 딱히 본 적이 없었다. 매일 나와만 놀아줬는 걸.

    "그런데 학술원은 매일 가야 하는 거 아녜요?"

    "보통은 매일 출석해야지. 출석 점수도 중요하니까."

    "그럼 제이드는 보통 아니에요?"

    "아, 시험을 잘 보면 돼. 출석 점수를 상회할 정도로 아주 많이."

    쉽게 말하지만, 전혀 쉬워 보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래도 돼요?"

    "우리 집은 왕국에 몇 없는 순수 혈통 마법사 집안이거든. 마법의 탑으로 마법 수련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면돼."

    "그리고 저택에서 놀고?"

    그거 거짓말 아닌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요즘은 주로 너랑 노니까 너도 공범이야."

    그거 말이 되는데?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삐걱, 삐걱. 배가 흔들리며 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귀족들 다니는 학교는 학비가 엄청 비싸겠지.'

    글자를 배우는 것만 해도 기뻤지만 언젠가 나도 학술원에 가볼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공작가에 살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야.'

    학교에 대해 생기기 시작한 솔깃한 흥미를 나는 애써 눌렀다.

    너무 바라지 말자. 욕심내면 안 돼.

    나는 그런 마음을 감추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이드가 나쁜 거 가르쳐 주는 것 같아요. 요령부터 가르쳐 주잖아요."

    "나쁘고 빼어난 건 착하고 성실한 것만큼이나 좋은 거야."

    "흠……. 그럼 전 그냥 적당한 거 할래요. 너무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거. 저는 이제 겨우 글을 배우는 단계인걸요. 그것도 벅차요."

    "글만 배우면 많이 똑똑해질걸. 이제 단어도 몇 개 쓸 줄 안다며?"

    "네."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선생님이 글을 배우는 게 몹시 빠르다고 칭찬해 주셨다. 안 그래도 제이드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제 내 이름도 쓸 줄 알아요. 가끔 틀리긴 하지만……."

    제이드가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단어랑 오라버니라는 글자도 쓸 줄 알아요. 그리고요, 두 사람 이름 쓰는 법도 배웠어요. 그래야지 제이드에게 나중에 편지도 써 주죠."

    가정교사 선생님이 그랬다. 귀족들은 친한 사람끼리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다고. 그 뒤로 나는 가장 친한 제이드에게 언젠가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말을 들은 제이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무언가를 참는 것 같았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넌 정말 재미있어."

    뭐지? 난 살짝 놀림받은 기분이 되었다.

    "놀리지 마요."

    "알겠어."

    제이드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뭐, 바보 취급받는 건 별로지만 요즘 제이드가 자주 웃어서 좋다.

    "아가."

    제이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 레티시아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제이드도 칼렌도, 또 마리아네도 가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보고 싶은 사람은 없어?"

    그 말에 내 동작이 굳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예전에 같이 길에서 지내던 월터라는 친구가 있긴 해요. 전에 저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그래? 그 친구 외에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료 배급식량을 타거나, 구걸에 성공을 한 날이면 빵을 나눠 먹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리는 딱 거기까지로 서로 정해뒀다.

    빵 한 조각. 거기까지.

    "괜찮아요. 거리 밖으로 나가면서로 아는 척하지 말자고 모두들 약속했거든요."

    "약속?"

    "네, 약속이요. 누군가 아파서 죽어 가더라도, 구걸하다가 얻어맞더라도, 구빈원에 잡혀가더라도. 운이 좋아 좋은 곳에 가게 되어도 서로 찾지도, 아는 체도 하지 말자고요. 그건 모두들 아는 사실이에요."

    그건 뒷골목 아이들의 당연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역병으로 그 애들이 죽어 갈 때도 울지 않았다.

    칼렌을 처음 만나고 사흘간 내가 아파서 드러누웠을 때도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우리도 우리만의 의리가 있었다. 서로의 몸이 멀쩡한 한, 서로를 돕는다. 이게 기본이다.

    성질 나쁜 아이들이 나를 괴롭힌 적도 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거리 밖으로 나가면 모든 걸 잊는 것도 규칙이다.

    "나는 운이 좋아요.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될 텐데. 겨울은 아주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공작님과 제이드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언 발을 녹이며 기운 담요 속에서 자는 건 끔찍한 일이거든요."

    제이드는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자던 골목은 따뜻하다며?"

    나는 굳었다. 그건……, 면접에서 잘 보이려고 했던 거짓말인데.

    "그……, 그래도 저 건강해요. 정말이에요. 한겨울 빼고는 따뜻하기도 했고."

    제이드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게 몸을 숙였다.

    "다 그렇다 쳐도 당연한 건 고마운 게 아니야. 이제 내 집은 네 집이기도 해."

    "……아닌데. 당연한 걸수록 고마운 건데."

    이 말은 전생의 엄마가 가르쳐준 거.

    "그래?"

    "그럼요."

    "그러면 나도 너한테 자주 고마워할게. 일단 우리 집에 와 줘서 고마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내 천천히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행복이라는 걸 뭐라고 딱 짚 어말 할 수 있다면 이런 순간 아닐까? 이 사람이 친오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어서 다행이다.

    따뜻한 감정. 이런 감정들을 모두 엽서처럼 적어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앞으로 다시 힘들게 살게 되더라도, 행복함만 되새기며 살 수 있을 텐데. 그때 흘러가던 나룻배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하인이 노를 들고 정중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먼저 배에서 내려 나를 안아서 뭍에 내려 주었다.

    데려온 하인 두 명이 배를 대고 자리를 준비했다. 그 사이 나는 장미밭을 구경했다.

    "와, 냄새 좋아. 엄청 예뻐요. 정말 장미가 파래."

    난생처음 보는 새파란 장미들이 강기슭을 타고 가득 자라 있었다. 신비한 광경이었다.

    내가 살던 하늘은 늘 네모졌다.

    전생에는 좁은 병실에서 평생을 보냈고, 이번 생에선 좁은 뒷골목이 집이었으니까.

    이런 구경거리는 처음이야. 물도 파랗고 엄청 예뻐!

    "이거 보세요, 제이드! 와! 이 섬을 빌린 기분이에요."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서 가져온 곰인형을 꽉 안은 채 여기저기 쏘다녔다.

    "저쪽까지 가 봐요."

    "좀 진정해. 너 아직 환자야."

    제이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슬며시 입술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진짜, 그렇게 쫑쫑대며 쏘다니지 마. 무리하면 금세 피곤해져. 하루 종일 놀 거라며."

    "그럼요. 그럴 거예요."

    나는 야심차게 말했다.

    "가시를 만지면 손 다치니까 만지지는 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없긴 하네요."

    주변은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파란 장미가 피는 시기에, 여기서 두 번 정도 돌연사한 시체가 발견된 적이 있었거든. 그 뒤로 장미밭의 저주니 뭐니 하는 말이 퍼졌지."

    "……여기서요?"

    "응. 이 덤불 위에서 말이야."

    나는 멈칫했다.

    하긴, 이 나라에서 그런 일은 흔한 일이다. 살인이 일어난 곳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좀 으스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이 장미가 파래지는 건, 뭍 근처의 바닥에 매장된 마정석들에서 나오는 기운이 일시적으로 장미를 변색시키는 거야."

    "아하."

    "그게 밝혀지기 전까진 파란 장미의 독 때문에 사람들이 미쳐 죽는다느니, 그런 미신이 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비 떼가 장미밭 사이로 날아들 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공작님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국정 회의에 참석하시는 날이니까. 한직이라도 회의엔 나가셔야 하지."

    나는 아쉽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날 두고 가는 공작님도 아쉬워 보였으니까.

    그때였다.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사람들이 왔군."

    제이드가 침통하게 말했다.

    "점심을 다 차렸습니다."

    하인이 우리를 불렀다. 맞다. 피크닉 하면 도시락이지. 하인들이 깔아 놓은 돗자리로 가자, 샴페인과 딸기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든 멀쑥한 청년 셋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는 제이드의 뒤에 숨었다. 그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젊은 귀족 남자들은 무서워.'

    내가 뒷골목에서 살 때, 아주 못된 젊은 귀족 중에는 장난 삼아 아이들을 때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난 아직도 젊은 귀족 남자들이 무서웠다.

    "제이드, 정말 오랜만이군."

    "요즘 학교는 안 오는 건가?"

    청년들은 제이드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제이드의 표정은 어느새 급속도로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여긴 무슨 일로?"

    "아아, 오늘은 여기가 한산할 것 같아 동생을 데리고 꽃구경을 왔지요."

    나는 제이드의 말을 들으며 그의 옷깃을 꼭 잡았다. 으음, 제이드가 날 소개해 줘야 하는 거, 맞지?

    그건 이제 겨우 막 예절 교육을 받기 시작한 나도 알았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럴 맘이 없어 보였다.

    "그렇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이제 즐기시죠. 각자 알아서 말입니다."

    제이드는 그야말로 철벽에 가까웠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제이드의 등 뒤에서 눈만 깜빡였다.

    "이 친구, 하하. 여전히 딱딱하네. 어린 레이디에게 인사할 기회는 줘야지."

    성격 좋아 보이는 갈색 머리 청년…… 아니지, 소년은 웃었다.

    제이드는 귀찮다는 걸 감추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 등을 살짝 밀었다. 앞으로 나가 인사하란 뜻이겠지?

    "제 여동생입니다."

    제이드가 쌀쌀맞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레티시아입니다."

    어쩐지 조금 부끄럽다. 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흐읍. 그들이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와, 엄청 귀여워."

    "공작가에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었다고?"

    소년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 리언이라 합니다."

    순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다가와 내게 부드럽게 인사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아.'

    나는 그 사내를 본 순간 어딘지 모를 낯익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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