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18)
  • 19 화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보드라운 무언가가 내 뺨을 문지르는 걸 느꼈다.

    '……응?'

    눈을 반짝 떠 보니 내 뺨을 간질인 것이 보였다. 곰 인형의 도톰한 발이었다.

    "곰 인형이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느라 다쳤던 어깨가 쑤셔 으으,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인형을 여기저기 살폈다.

    '귀여워! 폭신해! 예뻐…….'

    포근하고 보드라운 갈색 빵 색깔의 곰 인형이다. 내 품에 쏙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런데 양쪽 눈은 각각 파란색과 빨간색이었다.

    "왜 눈 색이 다르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말랑한 솜을 만지작거렸다. 누구의 선물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칼렌이 약속한 곰 인형 선물!'

    곰 인형을 뒤로 돌려 등을 보니 등에는 메시지가 적힌 카드가 한 장 매달려 있었다.

    혹시 칼렌이 써 준 건가?

    나는 슬리퍼를 신고 내려갔다.

    아, 시온이 잠옷 입고 돌아다니지 말랬는데. 오늘만 어겨야지.

    "시온에게 카드 읽어 달라고 해야지."

    시온은 저택에서 제일 일찍 일어나니까. 나는 한 손에 카드를 들고 한 손에 곰 인형을 든 채 달려갔다.

    "시온!"

    아침 준비로 분주하던 시온이 나를 보고 눈이 커졌다. 그는 급히 다가와 내게 무릎을 굽히고 눈을 보았다.

    "아가씨! 뛰지 마십시오. 상처가 도집니다."

    나는 헤헤, 웃었다.

    "나 안 아파요. 그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 애가 머리맡에 있었어요."

    나는 곰 인형을 내밀어 보여 주었다.

    "아아, 이건 칼렌 주인님의 선물이군요. 제작에 꽤 시간이 걸렸지요."

    "저어, 이 카드도 같이 있었는데. 혹시 읽어 줄 수 있어요, 시온?"

    나는 시온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읽는 시온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이건 공작님의 진짜 선물이군요."

    "진짜 선물요?"

    "네. 예전부터 주시겠다 마음먹었던 선물이랍니다. 제가 읽어드릴 수도 있지만, 공작님이 일어나시면 읽어 달라고 말씀하시면 어떠실까요?"

    그럼 공작님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시온은 그렇게 덧붙였다.

    "무슨 내용인데요?"

    "공작님께서 지어 주신 아가씨의 새 성함이랍니다."

    내 이름?

    '엄마가 지어 준 이름이 없어지는 건 싫은데.'

    게다가 귀족들은 보통 나보다 세 배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내가 외울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왜. 네가 읽어 봐, 시온."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잠옷 차림에 가운을 걸친 칼렌이 서 있었다. 그러자 시온이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인님."

    "어서. 제대로 읽어 봐."

    결국 시온은 한숨을 들이쉬더니 가면 같은 얼굴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 공주님. 내 이름은 곰 인형이야. 내게 새 이름을 지어줘."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가면 같은 표정의 시온이 아가 같은 말투를 쓰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반면 칼렌은 몹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시온. 진정성 있게 읽어야지."

    시온은 그대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목소리를 한 톤 올려 실감 나게 카드를 읽기 시작했다. 마치 구연동화 같았다.

    "난 이제부터 공주님의 곰돌이 친구야. 내가 공주님에게 선물로 새 이름을 줄게.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새 이름은 '레티시아' 야."

    "……."

    "레티시아는 천 개의 달이 뜬 하늘이란 뜻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악몽으로부터 레티시아 아가씨를 지켜 줄게. 내 두 눈은 아가씨의 달빛을 장식해 줄 보석이야. 소중히 간직해 줘."

    숨이 턱 멎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는 달이 천 개나 떠오른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상상되었다.

    아아, 그랬다. 내 이름은 레. 월(月)요일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었다.

    칼렌은 내 원래의 이름인 '레'를 이름 안에 남겨 주었다. 길거리에서 살아온 내 과거를, 기억해도 된다 했다. 그는 그저 월요일에 태어난 수많은 아이 중의 하나인 내게 달을 주었다.

    간질간질한 것이 심장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시온이 몸을 굽히고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읽어 줘서 고마워요, 시온."

    시온이 헛기침했다. 칼렌도 이어 말했다.

    "재미있었다. 시온."

    "……정말 짓궂으시군요. 설마 이 카드 내용, 직접 쓰셨습니까?"

    "비밀."

    칼렌은 나를 향해 몸을 굽혔다.

    "레티시아."

    "네."

    나는 얼굴이 빨개져 대답했다.

    레티시아. 내 이름이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름이 마음에 드니?"

    "네, 너무 예뻐요……."

    "네게 아주 어울리는 이름으로 하려 고심했지. 우리 첫 만남이 몽환적이었으니. 마음에 든다니 기쁘구나."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레티시아. 레티시아.

    나는 입안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이제 나는, 칼렌의 양녀, 레티시아다.

    "덧붙여서, 네가 생일을 모르니 이제부터는 오늘을 생일로 챙기면 좋겠구나. 이름을 받은 날도 의미가 있는 날 아니냐? 거기다, 죽다 살아났으니."

    "……의사가 나 죽을 정도로 다치진 않았다 했어요."

    "뭐, 순간 죽나 생각은 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이 옆에서 곤혹스럽다는 얼굴로 칼렌을 보았다. 아무튼, 생일까지 생기다니. 오늘은 정말 평생 잊지 못 할 아침이 될 것 같다.

    "생일 축하한다. 내 딸, 레티시아."

    나는 참지 못 하고 칼렌을 한 번 꼭 끌어안았다 놓았다. 칼렌의 뺨이 살짝 붉어지더니 눈을 깜빡였다.

    "제이드에게 가서 자랑할래요."

    "……그래라."

    나는 왠지 멍해 보이는 칼렌을 두고 타타타 제이드에게 달려갔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제이드의 침대에 기어 올라갔다.

    "제이드!

    제이드가 눈을 비비며 나를 보았다.

    "제이드! 나 이름이 생겼어요."

    "이름?"

    "네. 레티시아.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나는 곰 인형을 들어 자랑하며, 칼렌이 써 준 카드 내용에 관해 설명했다.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그래, 아주 예쁜 이름이네. 잘 어울린다, 레티시아. 아버지가 미리 말씀을 해 주지 않으셔서, 첫 생일 선물을 빼앗겼구나. 곰 인형에 박힌 것도 멋진 보석이네."

    "……보석요?"

    그리고 난 제이드가 무심하게 알려 준 사실로 곰 인형의 두 눈이 각각 3캐럿짜리 보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빨간 쪽은 루비, 파란 쪽은 사파이어라고 했다.

    나는 그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곰 인형을 무릎에 얹고 칼렌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칼렌이 아무리 자신을 구해 준 일로 고마워해도, 장난감 가게 매입이나 보석 구입은 아니다 싶었다.

    "저, 공작님. 할 말이 있어요. 단순한 곰 인형이라면 모를까, 보석은 필요 없어요. 이건 너무 비싸요. 그러다가 제가 주제를 모르는 어른으로 자랄지도 몰라요. 아주아주 사치스러운 사람이 되면요?"

    하지만 칼렌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래도 돼. 사치스럽고 버릇없게 자라도록. 가능하면 남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면 남들이 절 싫어할 거예요."

    "그것도 좋지. 남들이 싫어하는 아이가 되면, 영영 이 집에서만 살아야겠구나. 공작가에서만 살 수 있는 아주 버릇없는 아이가 되도록 해. 그게 내 양육 방침이다. 그리고 영영 내 딸을 하면 되겠구나."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날 아침식사에서 뻔뻔하게 말하던 칼렌이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보석이 없어도 계속 이 집 딸 하면 안 돼요?"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칼렌은 아까와 비슷하게 조용해졌다. 하지만 제이드가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이것만 받도록 해."

    칼렌이 속삭였다.

    "비싼 장난감은 이걸로 끝내마."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온이 내 깜짝 생일 케이크를 가져왔다.

    '딸기가 잔뜩 올라간 엄청 큰 케이크! 하얗고 예뻐!'

    나는 박수를 쳤다.

    "공작님이 저 모르게 주방에 따로 명령해서 준비하신 케이크입니다. 아가씨의 첫 생일 케이크군요."

    문이 열리고 평소 식사 시중을 드는 하인들도 들어와 박수를 쳤다.

    "첫 생일을 축하합니다, 아가씨."

    "축하해, 레티시아."

    제이드도 말해주었다. 칼렌도 다시 한 번 날 축하해준다.

    "축하한다."

    그날은, 내가 이름이자 생일을 받고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

    "아, 그럼 이제 생일을 맞이했으니 열 살이구나."

    "어……. 그런가요?"

    그것도 그랬다.

    "아홉 살 나이는 정확한 거냐?"

    "아마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가 6살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3 해 전이니까……."

    "그럼 오늘부터 넌 내 딸인 열 살 레티시아. 축하한다."

    "축하합니다!"

    어느새 하인들과 하녀들도 들어와 박수를 쳤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열 살 생일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