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화
* * *
"와, 풍선!"
칼렌을 따라 들어간 마차 안에는 풍선이 몇 개나 묶여 있었다.
누구의 선물인지 뻔했다. 난 활짝 웃음 지었다.
"고마워요, 제이드."
와. 이번 풍선은 알록달록해. 금색에 은색, 분홍색도 있다.
"다 예뻐요. 모두 제 것이죠?"
"응."
나는 행복하게 풍선을 만졌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칼렌이 툭 던졌다.
"네가 원하면 장난감 가게에도 들렀다 갈 수 있어."
내가 아는 칼렌은, 겉과 속이 조금 다른 사람이다. 여유 있는 태도와 달리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를 사람.
'혹시 아픈 아이에겐 친절한 성격인가, 칼렌?'
그런데 오늘은 계속 생소했다.
내게 계속 관심을 보이고, 또 뭔가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요?"
"아아, 안 그래도 네게 장난감을 사주려 했거든. 저번에 네가 장난감 가게를 구경하던 걸 보고 말이지."
"아……."
"애타는 눈으로 진열창을 보았지. 귀엽더구나."
맞다. 의상실에서 풍선을 찾아 뛰쳐나온 날, 울적한 얼굴로 진열창을 보고 있었다. 그걸 기억해 준 거구나.
하지만 난 이 와중에 장난감 가게에 가자고 조르는 아이는 되고 싶지 않았다.
"다음번에요."
나는 수줍게 말했다. 칼렌과 같이 장난감 가게에 간다면 어떨까?
그 순간 예전에 보았던 축제 전의 왕국 거리의 풍경이 떠올랐다. 예쁜 케이프 코트를 입은 소녀들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장난감 가게에 들어갔다.
그걸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왜냐면 나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만약 칼렌이 기분 좋고 한가한 날이면 나도 그렇게…….
헤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뺨이 붉어졌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장난감 가게에 가도 돼."
"네, 나중에……."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가게를 사 뒀거든."
"……네?"
나는 칼렌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아니, 뭐라고요?
"가게를 왜 사요?"
"말했잖아. 난 여자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장난감 선물을 사 본 적도 없어서 말이야. 그냥 귀찮아서 사 버렸어."
"시온, 이 말 진짜예요?"
나는 시온을 보고 물었다. 시온이 곤란한 듯 웃었다.
"저는 분명히 말렸습니다, 아가씨. 사실은 주인님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시온."
"왜요, 뭔데요?"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시온을 보았다. 시온이 헛기침을 했다.
"사실은, 그저께 주인님이 아가씨가 일어나면 주시겠다고 선물을 사러 장난감 가게에 가셨답니다. 하지만 뭘 고르셔야 할지 모른다며 어색해하시다가 그만……."
"그만 장난감 가게를 사 버리셨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선금을 맡겨 놓으려 하셨답니다. 아가씨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니, 돈을 맡겨놓고 다음번에 와서 다 골라 가라고 하시려고요. 그러나 그 금액이 장난감 가게를 살 만한 금액이었을 뿐이지요."
"그게 정말이에요?"
내 말에 칼렌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 냉정한 칼렌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잠깐. 장난감을 사 본 적 없으시다니. 그럼 제이드의 선물도 사주신 적 없단 말이에요?"
그 말에 칼렌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마리아네의 등쌀에 제이드에게 장난감을 사 준 적이 있긴 하지. 곰 인형이었나? 병정 모양 인형이었나?"
"병정 옷을 입은 곰 인형이었죠."
제이드가 옆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맞아. 그때 제이드는 내게 그랬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취급하며 사소한 배려를 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합리적인 부자 관계를 가지도록 하죠' , 라고."
"아, 그랬죠. 말 나온 김에 생일선물을 포함, 귀찮은 날들을 챙기는 건 서로 생략하자고 말이죠. 어차피 제 선물을 고르는 건 집사였지만요."
"……눈치채고 계셨던 겁니까, 도련님?"
시온이 침통한 소리를 냈다.
"매년 제게 검이나 책, 희귀한 박제 같은 쓸모 있는 걸 선물로 주셨잖아요. 아버지가 그런 센스 있는 선물을 고를 수 있을 리 없죠."
"……도대체 너희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이 부자 관계는 왜 이렇게 썰렁하지? 결론적으로, 지금껏 칼렌은 제이드의 생일 선물도 챙기지 않았단 말이다.
"제이드, 대신 박제 방에 출입을 허가해 줬잖아. 그리고 그때 네가 갖고 싶어 하는 독사도 사 줬어."
"수명이 다해서 지금은 죽고 말았지만 말이죠. 하지만 키메라 연구는 그만하라 하셨잖아요."
"아, 그건 가문에서도 대대로 실패한 연구니까 그렇지."
시온이 나를 보며 달래듯 말했다.
"칼렌 주인님께서는 아이에게 선물을 사 주는 일에 서투십니다."
칼렌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동물 모양이 갖고 싶으면 내가 왕궁 숲에서 사냥해 온 불곰 박제도 있는데 왜 작은 곰 모양 따위가 필요한 거야?"
나는 웃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 그렇구나. 칼렌은, 부모님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거다.
칼렌은 어리광을 부리고 자라지 못했으니까.
"저기, 곰 인형은 무서운 꿈을 꾸는 밤에 친구가 되어 준다고 했어요."
어릴 적부터 병실에 살았던 내게 전생의 엄마가 곰 인형을 사다 주며 해 줬던 말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 인형을 소중히 간직했었다.
"악몽 유령이 나타나면 곰 인형이 무찔러 준대요."
"그건 미신이야."
"뭐, 미신은 모르겠고……. 공작님은 가지신 곰 인형이 없으니까 무서운 밤이 되면 저를 잡고 있으셔도 돼요. 제 방에 오셔도 용서해 드릴게요."
나는 단호하게 미신이라고 말하는 칼렌에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자 다시금 마차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뭐야. 왜 그래?
칼렌은 갑자기 나를 빤히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 나 환자인데……."
"콱 깨물고 싶어 지네."
"아. 무슨 느낌인지 알겠는데 아이에게 대놓고 말하는 건 그만둬 주시죠, 아버지."
"그렇습니다."
웬일인지 제이드와 시온이 동시에 진지한 얼굴로 칼렌을 보았다. 뭐지? 칼렌의 '깨물고 싶다' 라는 말은 좀 무서운데요? 시온이 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씨, 갖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원하시는 건 뭐든지 제가 장난감 가게에서 가져다 드리죠. 몸이 나으실 때까지 당분간 외출은 무리니까요."
사다 주는 게 아니라 가져다주는 거라니.
"장난감 가게를 샀다는 건 못 물러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에게 너무 많은 돈을 쓴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정말로요?"
"뭐, 네가 다 크면 너 줄게."
"하지만 저는 정말 장난감 가게 같은 건 필요 없는걸요. 그냥 인형 하나만 골라서 사다 주시면 안 될까요? 첫 인형을 사 주시면 정말로 기쁠 것 같아요."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꺼냈다.
"한 번만 더 말해 봐."
"네?"
"인형부터."
"어……. 공작님이 사 주시는 인형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칼렌은 왠지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다 이마에 쪽 키스했다.
"다시 공작님이 된 건 아쉽지만. 좋아. 최고로 좋은 걸로 사다 주마."
그제야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가게는 꼭 환불하셔야 해요."
칼렌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차는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새하얗고 아름다운 저택. 이제 내가 사는 집이다.
* * *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침대에 반 감금되었다.
"절대 안정, 신관과 의사가 오기 전까진 침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시온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안 아픈데.'
정말 나 죽을 뻔했던 거 맞지? 혼수상태로 며칠이 지났건만, 신관들 덕분에 내 몸은 통증을 못 느끼는 상태였다. 계속 집 안에만 있자니 좀이 쑤셔 왔다.
결국 나는 한밤이 되어 슬쩍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으, 역시 몸이 무거워.'
조금만 걸어도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를 조금만 걸으려 했는데 포기하고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을 봤다.
'달, 예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미너스의 달이 뜨는 날이었지. 가장 큰 달이 뜨는 날.
〈앞으로도 종종 네 의견을 들어봐야겠구나.〉
칼렌은 그렇게 말했지만 내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제 내가 아는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여기까지.
'앞으로 도움이 못 될 텐데.'
거기다 칼렌은 날 의심했다고 했지.
'아주아주 나쁜 놈이라니. 그건 도대체 누굴까?'
내가 읽은 책은 칼렌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만 나와있었다. 그런데 붉은 꽃을 보내는 사내라니.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닉네임이다.
그러고 보니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이번 사건의 범인, 여장 점쟁이는 가난한 시골 출신이야. 그런 자가 어떻게 그렇게 귀한 독약을 손에 넣었을까?'
아무리 이 세계가 범죄자가 넘쳐나는 세계라고 해도 향도 맛도 없는 독을 구하는 게 쉬웠을 리가 없다.
'칼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문득 칼렌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그 방은 멀고도 멀어 보였다.
〈아빠라고 불러라.〉
물론 아빠가 있었으면 했다. 혼자는 외로우니까. 가족이 있는 건 내게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아직은 불안해.'
너무 좋은 일이 많이 생겨 버리면 무섭다. 아빠라고까지 불렀다가 일이 잘 안되면 어쩌지? 나중에 나를 귀찮아하면? 만일 생각보다 도움 안 되니 나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
'이 집에 계속 있고 싶다.'
그것만이 내 지금 유일한 욕심이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 * *
"꽃을 팔던 소년도 처리했습니다. 눈에 띄는 곳에 시체를 놓았고요. 그 애가 우리 얼굴을 아니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요. 점쟁이의 호객꾼 노릇을 한 아이잖습니까?"
창가를 등지고 선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선명한 은발만이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미너스의 달이 뜨는 날이구나,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다 같은 달빛 아래 있는 날이니 세상에서 제일 평등한 날이라고 하는 날이지. 그렇지 않나, 아인스?"
남자는 싱긋 웃었다. 아인스라 불린 소년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점쟁이 놈에겐 귀한 독약이 과분했습니다. 추한 놈이었죠. 좀 더 도와줄 범죄자들을 선별하시기 바랍니다."
"난 내 컨설팅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도와주지. 범죄 설계가 내 일이니까."
남자가 편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칼렌, 공작가에 새 양녀가 들어왔다고?"
"그렇습니다. 아홉 살이라고 합니다."
"아홉 살이라. 누군가에게 꽃을 받기엔 이른 나이구나. 그럼 내가 보낸 빨간 꽃이 그 아가씨가 받은 첫 꽃이었겠군. 앞으로 만날 일이 기대돼."
남자는 흥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손등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는 확연한 붉은색의 꽃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