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화
발개진 나의 뺨을 보고 칼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멍해 보이지? 혹시 많이 아픈가? 분명히, 의사 말로는 의식을 회복하면 목숨에 지장은 없다 했는데. 놈들이 또 거짓말을 한 건가?"
"아뇨, 아니에요. 그냥……. 어, 공작님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긴장이 풀려서요."
나는 의사들을 위해 급히 말했다.
"괜찮다면 되었다. 그리고 내게 질문할 게 있을 텐데."
"네?"
칼렌이 내게 물어볼 말이 많은 것이 아닌가? 나는 눈을 또르르 굴렸다.
"내가 누굴 죽였는지, 거기서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칼렌을 보았다.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니까 공작님께서 공격한 거겠죠. 무고한 사람을 이유 없이 습격하실 리가 없잖아요?"
나는 칼렌의 철칙을 잘 안다.
그는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면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반응은 뭐야?
갑자기 방 안이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칼렌은 물론, 시온까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칼렌이 먼저 피식 웃었다.
"넌 도대체 어디에서 온 아이냐? 믿을 수가 없구나."
칼렌이 중얼거렸다.
"내가 무섭지 않으냐?"
"무섭……지만, 어, 제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길 기대하신 건가요?"
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 말에 칼렌은 웃음기를 지우고 날 보았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이건 물을 수밖에 없구나. 제이드 말로는 네 가 점쟁이의 집, 그날 밤 일이 일어난 그 장소로 데려다 달라했다고 하더군. 내가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
"다그치는 게 아니야. 말해 봐."
나는 긴장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꿈을 꾸었다고 했잖아요.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공작님이 너무 걱정되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점쟁이의 집을 어떻게 알았냐 물으신다면 그건 서류 때문이었어요."
"서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저어, 공작님이 제 방에 남겨 두고 가신 종이를 보았어요."
"종이? 아, 그래. 붉은 머리 여인들의 행적을 담은 보고서. 그것 말이군. 하지만……."
칼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날 밤 칼렌은 내 방에 중요한 단서를 담은 서류를 내버려 둔 채 외출했다.
'그렇지만 좀 의외긴 했어. 항상 철저한 칼렌이 왜 내 방에 사건에 대한 단서를 두고 갔을까?'
그날따라 마음이 급하거나, 아니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가씨는 글자를 모르시지 않습니까?"
시온의 말에 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혹에 찬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그렇지만 전 형태나 모양을 잘 외워요. 그리고 전 뒷골목 출신이에요. 제가 살던 뒷골목 근처는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날 밤 사건이 일어난 점쟁이의 집도 원래 알던 곳이었거든요. 그곳- 레드 헤드 포춘 텔러는 제가 살던 골목에서 겨우 두 골목 떨어진 곳이에요."
"원래 알던 장소다?"
"네. 그리고 그곳을 둘러싼 소문도 알아요. 그 집에는 키 크고 음침한, 여자 점쟁이가 살았어요. 그리고 그 여자는 신기를 유지하려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결국 정체는 여장 남자였지만.
나는 뒷말은 삼켰다.
"글자는 거의 몰라도 제가 살던 거리 근처의 간판 같은 건 거의 외우고 있어요. 종이 세 장에 제게 익숙한 글자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 걸 보았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제가 말한 대로 '그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방문한 장소' 가 그 점쟁이의 집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칼렌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내 긴장감이 커졌다.
"그래서…… 공작님이 그곳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그 점쟁이가 공작님을 잡아먹으면 어떻게 해요?"
"뭐?"
칼렌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제가 점쟁이 이야기를 꺼내서 거기에 가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혔어요. 그래서 제이드를 깨워서 나가자고 졸랐죠."
그때 칼렌과 시온의 표정은 비슷했다. 감탄, 놀라움. 의외라는 표정.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구나. 널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적에 가까운 말이라서 말이다."
칼렌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네가 '추리' 를 했다는 거지. 내가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걸 눈치챈 것도 포함해서."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아가씨는 몹시 영리한 분이신듯하군요. 감도 좋으시고요."
시온이 나직이 말했다. 칼렌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좋아. 공부만 더 하면 아찔할 정도로 영리하게 자라겠구나. 하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돌발 행동은 안 돼."
그러고는 이내 이렇게 말했다.
"……네."
휴우, 다행이다. 칼렌이 내 말을 믿는 것 같다.
"그럼 이 일은 이걸로 정리하자꾸나. 그리고 아가."
"네?"
"앞으로도 종종 네 의견을 들어봐야겠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물어보마."
"네."
영리한 아이라니. 그건 오해인데. 뭐,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남겨 두기로 하자.
'전생에 모험 소설이나 추리 소설 같은 걸 잔뜩 읽어 둔 게 날 살렸군.'
거기 주인공들이 추리하는 방식을 흉내 내어 말했다. 다행히 먹혔다. 급한 게 해결되고 나니 침대에 떨어진 붉은 꽃에 시선이 닿았다.
'칼렌은 내가 저택에 온 날 주머니에 넣고 온 꽃을 보고 놀란 표정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내게 이 꽃을 가져왔다. 이 꽃이 뭐길래?
"저어, 그런데 이 꽃은 도대체 뭔가요? 이 꽃을 볼 때마다 공작님의 표정이 이상해지시는걸요."
내 질문에 칼렌은 침묵했다. 시온도 조용해졌다.
'어……, 나 뭐 잘못 물어본 건가?'
칼렌은 나와 눈을 맞췄다.
"그건 나쁜 놈이 남기고 간 꽃이다. 아주아주 나쁜 놈이지."
"얼마나 나쁜 사람인데요?"
"그건 나도 몰라. 어떤 놈인지 모르거든."
"네?"
내 눈이 동그래졌다. 칼렌은 짧게 설명했다.
몇 건의 살인 사건. 그 사건의 단서처럼 떨어져 있던 붉은 꽃이 이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선 칼렌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어, 그럼…….'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누가 내게 꽃을 남기고 간 거지?'
갑자기 소름이 오싹 돋았다.
설마. 그리고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칼렌이 날 양녀로 삼은 이유는…….'
단순히 행운이 아니었다. 내가 이 꽃을 가져와서 날 입양한 건가? 나는 정말로 이 꽃에 대해서 모르는데. 의심받고 있었다거나,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었다거나……?
"저……."
그 사실보다 더 충격으로 다가온 건 혹시 그럼 이제 날 양녀로 둘 필요가 없어지나,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칼렌도, 제이드도, 시온도 다 너무 좋아졌는데.
'하지만 정말 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걸. 심지어 원작에도 이런 내용은 안 나왔다고.'
나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숨기기 어려웠다.
"눈치가 정말 빠른 애구나, 너는."
칼렌이 내 머리를 넘겼다.
"처음엔 널 의심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넌 너무 영리하거든. 내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와서 도움을 주니까. 두 번째는, 널 보호하려 했다. 이 꽃과 연루된 이상 너도 '그놈'의 표적일 수 있거든. 곁에 두고 지켜보려 했지."
"저를 의심하세요?"
"이젠 안 해. 넌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리고 좀 의심스러워도 상관없어. 이 세상 부녀 관계는 다양하지 않으냐?"
"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좋아, 이제는."
"……!"
나는 흠칫 놀랐다. 칼렌이 나를 아주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그날, 칼렌은 내게 긴 이야기를 했다.
"……난 나쁜 놈들을 혼내 주는 일을 한다. 경찰이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이건 칼렌의 절대 비밀 아니었나? 이걸 칼렌이 내게 말해 줄 줄은 몰랐다. 나는 얼어붙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번엔 큰 도움이 되었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시온과 제이드뿐이지. 하지만 말이다, 넌 이제 내 양녀이니 알 자격이 있지."
"네에……."
가슴이 뭉클했다.
"뭔가 느껴지는 것 없나?"
"네?"
뭘 느껴야 하지?
"넌 이제 정말 이 집 딸이야. 내 비밀을 알아 버린 이상, 못 벗어난다는 거지."
쫓겨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 그 말은 무섭지 않았다.
"비밀 꼭 지킬게요. 무덤까지 가져갈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렌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하나 더. 중요하게 물을 것이 있다, 아가."
흐읍. 또 뭐지? 미처 생각해두지 못한 질문이 나올까 봐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칼렌을 보았다.
"왜 내가 공작님이지?"
"네?"
"제대로 불러야지. 내가 너한테 누구냐?"
응? 뭐야 이 분위기는……?
'갑자기 이건 무슨 화제 전환인데?'
나는 점점 달아오르는 뺨을 느꼈다.
"아……, 아버……, 님?"
"……그거 말고."
"아버지."
"왜, 이전엔 그렇게 부르지 않았잖아?"
내가 쓰러질 때를 말하는 것이다.
"……아빠."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 얼굴이 타는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웠다. 정말 그를 아빠로 생각하게 될까 봐.
아직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지거나, 정말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거나 바라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좋아. 이제 아빠라고 부르도록 노력하도록."
그러나 칼렌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제이드는 어디 있지?"
"아. 옆방에서 좀 잔다고 했어요."
"제이드 도련님이 어젯밤도 아가씨 곁에서 밤을 새우셨습니다."
"넌 공작가 사람들을 홀리는 재주가 있구나."
칼렌이 피식 웃었다.
"제이드를 불러와라."
"네."
"집에 가자, 아가."
집. 그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칼렌은 나를 안아 올렸다. 나도 멀쩡한 오른손으로 칼렌의 목에 팔을 감았다.
드디어 집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