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18)

16 화

'내가 칼렌을 구한 일이 진짜 큰일이었구나.'

나는 손을 달싹였다. 제이드가 내 이마를 쓸어 올렸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그런데 먼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묻고 싶어. 내 아버지가 마취 화살을 맞았다면 별일 아니었을 텐데 넌 그걸 대신 맞았지."

"하지만 마취 화살이라고 해도 가슴 같은 곳에 맞으면 큰일 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덕분에 모두 살았잖아요?"

제이드는 눈을 깜빡였다.

"넌 참 신기하고 대단해. 작은 몸인데 내가 본 누구보다 용감하군."

칭찬. 제이드 나름으론 최고의 칭찬일 것이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눈을 내리깔았다.

"전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녜요. 다만, 공작님이 다치면 제이드도 상처 받잖아요. 그건 싫었어요."

나는 소심하게 말을 꺼냈다. 제이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사탕발림일지라도 달콤해서 좋군."

그러니까, 뭐가요? 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칼렌도 제이드도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너무 이해하려 들지 말자.

"널 믿지 않아 미안해. 진작 네가 가자는 대로 갔어야 하는데. 이건 내가 빚진 걸로 하지."

믿지 않아서 미안해? 아. 점쟁이의 집에서 내게 화를 낸 것? 순간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러고 보니 점쟁이의 집에 내가 들이닥친 걸 뭐라고 변명하지?'

제이드는 다행히 아직 추궁하지 않고 있다. 원작에서 읽었어요, 이딴 핑계는 절대 안 되잖아?

"그래서 말인데."

"제이드, 저 배고파요. 졸리고요."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아, 그래. 먼저 식사를 준비하지."

곧 간호사들이 들어와 얼굴을 닦도록 도와주고 따뜻한 음식을 떠먹여 주었다.

"아버지는 잠깐 집에 가 계셔. 오시라고 사람을 보낼게."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정말로 괜찮아요. 굳이 뵙지 않아도 돼요."

지금 추궁받으면 난 기절할지도 몰라.

'거기다 나 칼렌이 살인하는 걸 본 셈이라고!'

입막음을 위해 칼렌 손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

"……괜찮다고?"

"네. 제이드가 돌봐 줘서 정말 기뻐요. 하지만 공작님은 바쁘시니까 병문안을 오지 못하신다고 해도 이해해요."

"……너 지금 아버지가 네가 여기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어……. 한 번은 병문안을 오셨겠지요."

제이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동시에 내 눈도 동그랗게 변했다.

"그럼요?"

"바보 같은 소리 마. 매일 오셨으니. 지금은 잠깐 외출하신 거야."

병문안을 와 줄 정도면 많이 화난 건 아니겠지?

'모, 목숨은 건질 거야.'

……아마도.

제이드의 표정은 더 묘해졌다.

도대체 뭐야? 내가 쓰러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고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오시면 이야기하자."

제이드가 덧붙인 말에 내가슴은 철렁 떨어졌다.

'다친 충격 때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할까?'

내 전생에서 〈기억이 안 납니다.〉 작전은 무적의 효과를 발휘하는 기술이었다. 청문회나, 그런 데서 말이다.

'하지만 칼렌에게 통할 리가 없지.'

무자비한 다크 히어로님이신데.

'생각하자. 생각해.'

나는 필사적으로 약으로 멍한 머릿속을 굴렸다. 제이드가 좀 더 자라고 자리를 비켜 줘서 다행이었다.

* * *

"이게 무슨……?"

시온은 말을 잇지 못 했다.

"도대체 이 나라 경찰들은 월급도둑이냐? 하는 게 뭐야?"

칼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사건 현장을 잠시 비운 사이 이렇게 되어 있었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으니까요."

그들은 며칠 전 잡혀 칼렌의 손에 처단당한 살인마 여장 점쟁이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사건 현장에는 화사한 붉은 나팔꽃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황금색 마크가 있는 붉은 나팔꽃."

칼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만."

그는 천천히 꽃 무덤으로 다가갔다.

새하얀 사람의 손이 꽃 무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시체다."

칼렌이 속삭였다.

"경찰들에게 다시 들어오라고 해, 시온."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몇 시간 후, 경찰은 칼렌에게 사건을 간략히 보고했다.

"조사 결과, 길에서 꽃을 파는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칼렌의 동작이 멎었다.

"이 점쟁이랑 연관이 있나?"

"아이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꽃 파는 소년이 귀부인들에게 약을 소개해 준다며 호객을 했다고 합니다."

"이 점쟁이의 호객꾼이었다는 거군."

칼렌이 이를 갈았다.

"그건 그렇고 누구에게 보내는 꽃인지 모르겠군요."

경찰은 생각 없이 중얼댔다.

"뭐라고?"

"시체를 감추기 위한 거라고 해도, 지나칠 정도로 많은 꽃이 방안을 메우고 있잖습니까."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칼렌의 동작이 멎었다.

"혹시 시체의 신분에 대해 증언을 해 준 애들이 이 뒷골목에 사는 아이들이냐?"

"네. 그렇습니다. 이 소년이 종종 남은 꽃을 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공작님?"

칼렌의 표정이 흔들렸다.

첫날, 레는 이 꽃을 누군가 주었다고 했다.

〈아침에 누군가가 꽃을 두고 갔어요. 하지만 친구들일지도 몰라요. 꽃이 생기면 종종 나눠 줬거든요. 아. 꽃 파는 오빠가 있는데 그 오빠가 애들에게 가끔 남는 꽃을 줬어요.〉

그럼 이 소년이 죽었다는건…….

"시온, 가자."

칼렌은 등을 돌렸다. 그는 급하게 마차에 올랐다.

"레를 확인해야 해. 당장!"

* * *

급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서 울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긴 코트를 입은 칼렌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에 약간 흐트러진 표정의 시온이 서 있었다.

'둘 다 왜 이래?'

나는 칼렌을 보고도 인사할 생각도 못 했다.

'역시 엄청 화났나 봐.'

어쩌지? 먼저 말해야 하나? 칼렌의 비밀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못 챘어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칼렌이 무사한 건 다행인데…….

"아가."

칼렌이 내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칼렌이 나를 끌어안았다.

'어?'

왜 칼렌이 이런 표정이지? 마치 안도한 사람처럼……. 칼렌이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마주 보았다.

"아빠 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바깥에 일이 생겨서 말이지. 그래, 무사하구나."

날 이상하게 보기는 칼렌 뒤에 선 시온도 마찬가지다.

'내가 깨어나서 안심하는 거겠지?'

혼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다정한 느낌이다.

"많이 걱정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준비해 둔 말들이 다 날아간 것이 느껴졌다.

괜히 눈가가 먹먹했다.

그간 길거리에서 아프면 아픈 대로, 배가 고프면 고픈 대로 혼자 앓았다. 친구들이 있었지만 아플 때 스스로를 돌보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누가 날 걱정해 주는 게 이렇게 좋다니.'

나는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오는 이상한 감정을 꾹 눌렀다. 그 감정에 중독될 것 같았다.

"제게 물을 것이 있지 않으세요?"

나는 칼렌의 눈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공작님 몰래 밤에 외출도 했고-."

"아, 그래. 먼저."

칼렌이 품에서 꽃을 한 송이 꺼냈다. 또 그 이름 모를 빨간 꽃이다. 싱싱하고 좋은 향이 났다.

"이 꽃, 본 적 있지?"

"네."

"이 꽃에 대해 정말 아는 것이 없나?"

왜 저런 걸 묻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예쁜 꽃이긴 한데.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저택에 처음 올 때 가져온 꽃 아닌가요?"

그러자 칼렌이 맥없이 웃었다.

"그걸로 됐다. 미안하구나."

도대체 뭐지?

"아, 그래. 그리고 네게 할 말이 많아. 먼저……."

"……."

"날 구해 줘서 고맙구나. 하지만 다음엔 그러지 마라."

칼렌이 내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심장이 조여 왔다. 아, 그렇구나. 칼렌은 나를 추궁하기 전에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난 네 보호자야. 넌 내 양딸이고. 아버지는 자식을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 가주는 가문의 일원의 일신을 결정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 절대로, 날 위해 희생하지 마. 내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든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칼렌이 다칠 것을 아는데 어떻게 그래.

"대답."

"알겠어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그건 그거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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