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18)
  • 15 화

    * *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스산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누군가가 우는 소리, 중얼대는 소리였다.

    정신이 계속 또렷해지지 않아 나는 본의 아니게 그 소리의 내용을 엿들었다.

    "이렇게……. 가는군요."

    "아아, 아이들의 얼굴이……. 집에…… 보고 싶습니다."

    "누가 뽑힐지는…… 몰라도……. 서로 원망하지 않고 보내줍시다."

    "제발 깨어나셔야 할 텐데……."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가 몽롱했다. 눈꺼풀이 엄청 무거워. 눈을 뜨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뿌연 시야의 초점이 맞으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침대 주변을 둘러싼 투명한 커튼이었다.

    그 커튼 밖으로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슬픈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긴 어디지?

    '맞아, 나 칼렌을 구했지. 화살이 날아왔어.'

    내가 쓰러지기 전의 상황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여긴 저세상? 나 또 죽은 거야?

    심장이 쿵 떨어졌다.

    '목소리가 안 나와.'

    입안이 끔찍하게 건조했다. 뭐라 말을 하려는데 소리 없는 기침 같은 것만 나왔다.

    흐으, 죽겠다.

    그러다 누군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제이드다. 제이드가 침대에 뺨을 대고 자고 있었다. 제이드가 있다는 건, 난 산 사람이라는 거다. 안심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자는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

    "흐응……."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천천히, 깊은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이 떠졌다. 제이드의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공주님. 눈을 떴구나."

    제이드가 턱을 괴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정말 오래 기다렸어."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아 방긋 웃었다.

    '나 살았어요.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죠? 칼렌도 죽을 뻔한 독화살을 맞고 살았다고요.'

    목소리가 나온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웃는 걸 본 제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이드? 왜 그러지?

    "괜찮아. 천천히."

    제이드가 물을 주었다. 조금 홀짝이고 숨을 토하듯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 이상해.

    "여긴 어디예요?"

    "병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칼렌은?

    "저어, 공작님은……?"

    "무사하셔. 넌 일주일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어."

    "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제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확 걷었다.

    "아이가 깨어났다."

    커튼 너머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것도 일곱 명이나.

    나는 히익, 하고 소리를 냈다.

    그리고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보더니 놀라서 외쳤다.

    "눈을 뜨셨어!"

    "세상에. 진짜지?"

    "우린 이제 살았다!"

    그들은 중얼대다가 자기들끼리 손을 맞잡기도 하고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나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이벤트라도 준비한 건가?

    그 와중에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소공자님께서는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계셨는지……?"

    "알 것 없어."

    제이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이드, 주변 사람들 몰래 내 침대에 침입해 있었던 거야? 좀 오싹하잖아.

    '진짜 모르겠다. 공작 가문 사람들 성격.'

    내가 앉으려 하자 제이드가 달려와 나를 도와주었다.

    '내 어깨…….'

    욱신, 하는 통증에 나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아프지 않았다. 난 어깨를 힐끔 살폈다. 얇은 잠옷 아래 붕대가 감겨있었다.

    "저분들은 누구예요?"

    "아. 의사야."

    나는 눈을 말똥이며 그가 계속 설명하길 기다렸다.

    "처음에 의사들이 어깨에 화살을 맞은 널 보고, 무사할 것이고 곧 의식을 찾을 것이라 했어. 화살에서 독성분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말이지."

    "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화살에 마취약이 발라져 있었어. 넌 너무 작아서 아주 적은 마취약만으로도 위독해졌지. 처음부터 약에 중독된 걸 밝혀내지 못한 이유는, 그 약이 검출이 잘되지 않은 성분이었거든."

    내 입이 벌어졌다.

    "저, 정말 다행이에요."

    "화살 맞은 게 뭐가 다행인데?"

    제이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게, 마취가 잘못되면 평생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니까. 운이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긍정적 생각이요."

    나는 내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둘러댔다.

    "그래. 운이 좋긴 했지."

    제이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왜 살았다는 거지?

    그사이에도 의사들의 기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손을 뻗었다 말았다 움찔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눈치. 제이드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무튼, 네가 일주일이나 깨어나지 않자 의사들의 거짓말에 우리는 굉장히 화가 났지."

    "아, 내 아버지 성격이 이상한 건 알지? '누가 나 대신 희생하는 건 질색이다.'라든가 '그러니까, 내 양딸이 잘못되면 난 미쳐서 아무한테나 화풀이를 할 거다' 라고 말씀하시더군. 나중에는 미친 듯이 복도를 서성이며 다니시고……."

    "그거 절 걱정해 주셨다는 말 아니에요?"

    역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

    "뭐, 아무튼. 아버지와 내가 의논한 끝에 오늘도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제비뽑기를 하려 했어. 저 무능한 의사 중 한 명을 무작위로 뽑아 본보기로 벌을 주자고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그 벌이라는 말을 해석하면…….

    '저 중 하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의사들은 무슨 죄인데? 제이드는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 사람들은 수도 최고의 명의로 이름난 일곱 명이라는 것과, 내가 다친 다음 날 그들을 바로 초빙…… 했다는 것이다.

    '초빙이라는 글자가 왜 자꾸 납치처럼 들리지?'

    이거 환청일까?

    "……그, 그런 일을 왕실이 용인하나요?"

    "왕실에서 저 사람들을 모으는 걸 도와줬는데?"

    도대체, 이 나라는 얼마나 공작가에 휘둘리고 있는 걸까? 이 나라의 미래는 괜찮은 걸까? 그런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저어."

    드디어 손을 움찔대던 의사 중에 한 명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였다.

    "아가씨를 검진해도 될는지요?"

    "아, 그렇지."

    제이드는 못마땅한 듯 의사들을 바라보다 허락해 주었다. 내 몸은 내 건데 왜 제이드가 허락하지? 나는 입술이 비죽 나왔다.

    의사들은 맥을 짚고 내 눈과 입안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검진한 의사가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어깨는 이대로 두시다 오후에 다시 상태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네. 정말 아가씨는 왕국 최고의 행운아십니다. 까딱 잘못되면 어찌 되었을지……."

    그리고 의사들은 간절한 눈으로 제이드를 보았다.

    "그럼 저희는……."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구나. 이미 제비까지 만들었는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의사들은 만세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 나가 봐도 좋아. 잠시 대기하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면 귀가해도 좋다."

    제이드의 말에 의사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갔다.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 주세요. 답답해요. 내가 쓰러진 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내가 행운아인데요?"

    나는 제이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제이드가 내 눈을 보았다.

    "먼저, 우리가 들어갔던 점쟁이의 집을 기억해?"

    "네."

    "그 집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장치 되어 있었어. 네가 맞은 석궁 장치는 그중 하나였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궁으로 된 함정은 두 가지였어. 문 근처에 있는 석궁 발사장치와 그 측면 벽에 있는 장치."

    "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원래 칼렌이 맞았어야 할 화살은 문 근처에 있는 함정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맞은 화살은…….

    "그 석궁 발사 장치의 작동 방법은 그 자식, 그 미친 점쟁이 놈이 끼고 있는 반지를 조작하는 것이었어. 녀석은 아버지에게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되는대로 그걸 작동시켰지. 오른쪽으로 반지를 돌렸으면 문간의 장치에서 화살이 발사되었을 것이고, 그럼 넌 죽었을 거야. 거기엔 맹독을 바른 화살이 있었거든. 하지만 반지는 반대쪽으로 돌아갔고, 맹독 화살이 아닌 다른 화살이 네게 쏘아졌지."

    "……네."

    나는 이해했다.

    원래 쏘아져야 했을 화살. 칼렌이 원래 맞았어야 할 화살이 그 맹독 화살이었다.

    "측면 벽의 석궁 발사 장치에는 마취제를 바른 화살이 장치되어있었어. 그놈은 정말 쓰레기였어. 녀석은, 마취제를 바른 화살을 '여성용' 이라 표현했어."

    소름이 오싹 돋았다. 여성용이라니? 곧 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 화살에 여자가 맞으면 천천히 데리고 놀다 죽이려고 했다 했지. 사내는 맹독 화살로 바로 죽이면 되지만, 여자는 바로 죽이는 것이 '아깝다.' 면서 말이야."

    아, 정말 싫다. 속이 이상해질 것 같다.

    "도대체 그자는 누구였나요?"

    "붉은 머리 여인들의 심장 마비 사건의 진범. 그자가 점을 보러 찾아온 여자들에게 독을 먹인 것이 맞아. 그것도 무색무취의 독을 말이야."

    "맛도 냄새도 안나는 독이요?"

    "그래. 그것도 며칠 있다가 효과를 나타내는 독을."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제이드는 내게 범인의 동기를 설명했다. 내가 알던 것과 같았다.

    '범인이 죽인 여자들의 공통점은 빨간 머리. 범인의 엄마랑 똑같은 머리색이었지.'

    범인은 친엄마에게 집착하는……. 그거, 변태였다.

    그는 모친의 심한 집착 아래서 자랐다. 그래서 엄마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미워했다.

    그런 반복되는 감정 속에서 그는 문득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여자로 변장하고, 엄마처럼 붉은 머리 가발을 썼다. 그리고 점쟁이 흉내를 내며 여인들을 유인했다. 그리곤 그 여자들을 죽였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위해.

    그게 이번 사건의 범인이었다.

    알고 들어도 무섭다. 이 세계의 범죄자들이란.

    "무서워요……."

    "이젠 괜찮아. 아버지가 그 자를 충분히 벌줬으니까."

    그러니까, 죽였다는 뜻이지? 난 그자가 어떻게 죽었을지 상상해 보다가 멈췄다. 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프진 않아?"

    "네. 별로 안 아파요. 처음엔 죽나 싶었는데, 별로 상처가 크지 않은가 봐요."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아니, 어깨의 살점이 아예 떨어져 나갔어. 뼈가 보일 정도였는걸. 뼈에도 금이 갔고 말이야.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어."

    "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그럼…… 다 낫긴 하는 건가?

    "신관들이 네 몸에 고통을 없애는 마법을 일주일간 퍼부었어. 당분간 아프진 않을 거야. 지금도 옆방에서 대기 중이야."

    이 세계에서 고위 신관, 신성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엄청 귀한 존재 아닌가?

    "절 위해 그렇게까지 하셨다고요?"

    "아아, 좀 쉬고 싶다느니, 신전에 돌아가서 자고 싶다느니 해서 마리아네 고모에게 크게 혼쭐이 난 후로 다들 조용히 대기 중이지. 걱정 마, 그들의 생명력을 쥐어짜서라도 네 고통을 덜어 주는 마법을 쏟아붓게 할 테니까 말이야."

    "……그건 너무 민폐……."

    제이드가 더없이 상냥하게 말했다.

    "나중에 기부금으로 갚으면 돼."

    이게 부자들의 세계일까? 아니다. 이건 부자라기보단…….

    '악당들의 사고방식…….'

    하하, 웃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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