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
칼렌의 부친인 선대 르웰턴 공작, 죽은 전 공작은 자신을 능가하는 마법사인 칼렌을 질투했다.
〈넌 괴물이야. 우리 가문의 저주받은 혈통의 결정체지!〉
칼렌은 전 공작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배가 고팠다. 마력을 흡수하고 싶었다.
너무 배가 고플 땐 동물이라도 괜찮았다.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원하게 되었다.
〈나도 계약하지 못한 마신을 소환했다고?〉
아버지는 질투했다가 두려워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칼렌을 사랑해 준 건, 어머니뿐이었다.
〈괜찮아. 칼렌. 엄마가 있어. 널 항상 사랑한다. 엄마가 힘이 없어서 미안해.〉
어린 칼렌이 짐승처럼 얻어맞고 웅크리고 있으면 모친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때로 칼렌 대신 아버지에게 맞을 때도 있었다.
〈미안해. 칼렌. 엄마가 미안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치 지금처럼.
칼렌은 어린 레를 품에 안고 그때의 기억을 되새겼다.
"왜……?"
길거리의 거지 소녀.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입양한 아이. '레' 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그 아이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칼렌 자신이 살인하는 걸 봤는데도, 그를 혐오하기는커녕 그를 구했다.
'어머니.'
잊고 있었던 이름이 칼렌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이의 위로 어머니의 잔영이 비쳤다.
레가 칼렌에게 달려들며 칼렌은 비켜섰다. 화살은 칼렌의 몸을 비켜 갔지만 레의 어깨는 관통했다.
그러나 그녀가 쓰러진 걸 보는 순간 칼렌은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제이드와 시온의 외침 때문이었다.
"이봐! 일어나!"
"아가씨!"
칼렌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들을 보았다.
"시온."
칼렌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건 잡아 둬라."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점쟁이를 보며 칼렌이 지시했다. 그는 이번엔 제이드에게 지시했다.
"제이드."
칼렌이 속삭였다.
"출혈을 막을 거다. 순간적인 통증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 아이의 입에 뭐든지 물려. 의식을 잃었어도 혀를 깨물 수 있으니."
제이드는 소매를 찢었다. 천 뭉치를 아이의 입에 물린다.
칼렌의 손에서 흑마법의 기적이 피어났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검은 나비들이 그녀의 상처 부위로 스며들었다.
이내 출혈이 점점 멎었다.
"먼저 이 애를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겠다."
"이 근처에 있는 공작가의 호텔이 좋겠습니다. 바로 지척입니다."
시온이 말했다.
레는 호텔의 한 방으로 옮겨졌다. 공작가 소유의 호텔은 최고급 시설을 갖추고 있기에 의사가 상주해 있었다. 의사는 달려와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시온은 외과 의사를 데리러 가기 위해 직접 말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침실에서 치료받는 그녀를 제이드는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칼렌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자세한 것은 외과 의사가 도착해 봐야 알겠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으십니다. 독화살도 아니었고 심장을 피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야지."
칼렌이 중얼거렸다.
"만일 이 애가 죽으면 내가 이 도시의 모든 의사의 씨를 말려놓을 터이니."
흠칫.
의사가 놀랐다. 그는 고개를 조아렸다.
"외과의가 도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펴 드리겠습니다."
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침대 곁에 앉았다. 창백한 얼굴로 기절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라 생각했다. 네가 붉은 꽃의 그놈의 표적이거나 아니면 스파이라고. 그러니 오늘 밤 네가 준 맹랑한 정보도 함정 아니면, 정말 우연이라 생각했지."
아빠, 그렇게 저를 불렀다.
"하지만 이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날 대신해서 다치다니. 정말이지-."
칼렌은 나른하게 중얼댔다.
"이게 함정이라도 정을 주고 싶어지는 함정이구나. 도대체 너는 누구냐?"
칼렌은 아이의 인형 같은 뺨을 만졌다.
"먼저 살아남아라. 네가 한 말을 책임져야지. 나를 아빠라 불렀으면 부녀간의 인연이 생긴 거니까."
그는 아이의 오른손을 제 손으로 움켜쥐었다. 다치지 않은 쪽의 손이었다.
아이의 손이 너무 작았다. 같은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아, 네가 다른 사람의 흔적이 묻은 애라도 상관없어. 빼앗아서 내 아이로 만들면 되니까. 아, 그렇지, 네가 깨어나면 먼저 교육 방침을 바꿔야겠구나."
칼렌이 속삭였다.
"내가 널 한번 키워 봐야겠다. 눈앞에서 내가 화살을 맞든 칼에 맞든 신경 쓰지 않은 도도하고 이기적인 아이로 키워야겠어. 일단 온실 속에 가두면 되겠구나. 그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거든."
"……."
"어서 일어나렴."
* * *
시온이 데려온 외과 의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목숨엔 지장이 없을 것이란 소견이었다.
호텔에는 급히 간이 수술실이 차려졌다. 외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급 수술에 들어가고 나서야 칼렌은 밖으로 나왔다.
제이드는 시온의 설득에 호텔방으로 들어가 쉬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버티다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온은 동요하는 칼렌과 제이드가 몹시 낯설었다.
"신전에도 사람을 보냈나?"
칼렌이 시온을 향해 물었다.
"치료는 의사들이 해야겠지만, 고위 신관들이 고통을 제거하는 마법을 쓸 줄 알 텐데. 그들도 불러."
"오늘은 대부분의 고위 신관들이 왕궁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은 왕궁에서 신전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 마리아네 님도 거기 계시고요. 안 그래도 내일 날이 밝으면 어떻게든 사람을 구하……."
칼렌이 피식 웃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국왕에게 가서 전해라. 지금 당장 모든 신관을 보내라고."
칼렌이 속삭였다.
"만약 내 딸이 통증으로 인해 아파서 쇼크사하면."
"……."
"내가 왕궁으로 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왕족에게 똑같은 고통을 줄 것이라 말해라. 그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거다."
시온은 칼렌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그는 놀란 듯 칼렌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 *
'차라리 박제를 만들까?'
죽은 포포처럼 말이다.
제이드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레', 입양된 동생을 보았다.
〈제이드, 이 고양이는 말이다. 네가 죽으면 같이 죽는 동물이다. 키메라란 그런 거지. 그러니까 이 애를 잘 키우면 너도 살 수 있을 거야.〉
포포는 어릴 적에 그가 키우던 키메라 고양이었다. 가벼운 우울증을 앓던 제이드를 위해 칼렌이 데리고 온 동물이었다.
'알고 보니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지.'
어린 제이드는 잘 먹고 잘 돌아다니는 고양이 포포가 신기했다.
포포를 돌보는 동안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어느 날, 포포가 죽을병이 들어서야 알았다. 자신이 죽으면 포포는 죽는다는 칼렌의 말은 거짓말이었다는 걸.
속은 건 화났지만 그즈음엔 그 작고 따뜻한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프니까 더 포포를 닮았네.'
포포는 날개가 달리고 눈이 반짝이는 예쁜 고양이었다.
'하지만 닮은 게 다가 아냐. 넌 좀 달라.'
레가 대화하고 웃는 걸 다시 보고 싶었다.
'아, 맞아.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니까.'
작고 어린 몸. 마법사이기는커녕 보통 아이보다 배운 것도 없고 연약하고 마른 몸.
이 작은 몸으로 어떻게 저도 못한 일을 했을까?
화살 앞에서 제 아비를 감싼 일이 떠올랐다. 이 소녀는 의문점 그 자체였다. 마치 '왜' 라는 질문으로 포장한 반짝이는 사탕 같았다.
'왜 나는 이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을까? 왜 이 아이는 다쳐 가면서까지 아버지를 구한 거지? 아버지의 친딸도 아니잖아? 도대체……, 이 애는 어디에서 온 누구지?'
제이드 또한 혈육인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드 또한 결국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만일 자신이 레처럼 작았다면.
더 배운 게 없었다면. 맹목적이었다면 아버지를 대신해 다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해 봐도, 결론은 간단했다.
아니다.
그러니, 이 아이는 자신보다 더 대단한 용기를 가진 애였다.
'내가 이상해.'
제이드는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이 아파.'
생소했다.
맞아. 포포가 죽은 날. 친모가 그를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 죽은 날 이후 오랜만에 느껴 보는 쿡쿡대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