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화
오늘 밤 괴한의 화살에 맞은 칼렌이 어찌 될지 나는 알고 있다.
칼렌은 독에 중독되어 중태가 된다.
'그리고 칼렌은 한 달간 혼수상태가 돼.'
강력한 독. 강한 육체의 마법사인 칼렌도 꼼짝 못 하게 할 독이었다.
그리고 칼렌이 독에 당해 혼수상태인 동안, 제이드도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제이드는 이번 일로 사람에게 실망하게 될 거야. 아주 많이.'
이때다 하고 사방에서 달려들어 공작가의 상황을 이용하려 들었으니까.
'왜 이제야 기억이 났을까?'
내가 읽은 마지막 에피소드. 어쩌면 내가 아는 마지막 미래. 그리고 내가 아는 가장 큰 위기가 이 에피소드였다.
나는 보고서를 읽는 칼렌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공, 공작님!"
"왜?"
칼렌이 나를 힐끔 보았다.
'내가 힌트를 줘서 칼렌이 오늘 다치면?'
그건 내 탓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제발 가지 마세요오……."
나는 흐느끼며 칼렌에게 매달렸다. 난 필사적이었다.
"너무 아파요. 옆에 있어 주세요. 무서워요, 공작님."
나를 버릇없는 아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심기를 거슬러 이제 미움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없어.
며칠이라도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생활을 한 것으로 만족하니까. 내일부터 칼렌이 나를 무시한다고 해도, 그래도 좋아.
이 집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보답하고 싶었다.
"오늘 밤만요, 네?"
내가 알게 된 사실을 자세히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믿어 줄 리 없잖아.'
그랬다간 정말 의심을 산다.
"누가 공작님을 다치게 하는 꿈을 꿨어요. 화살을 맞아서 피가 났어요. 제 꿈은 정말 잘 맞아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너무 불안해요."
주르륵주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렌과 제이드, 시온 모두 못 박힌 듯 나만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지?'
다들 화났나? 나, 혼나는 건가? 칼렌이 천천히 나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맞을지도 몰라.'
칼렌이 부드럽게 내 턱을 치켜들었다.
"정말 잘 모르겠구나. 수수께끼가 따로 없어. 처음엔 무슨 의도인가 했는데. 이젠 가지 말라고 우니까."
"……."
"뭔가 아는 게 있는 거냐? 어서 말해 봐. 화내지 않을 테니까."
칼렌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나는 흡, 숨을 들이켰다. 눈가를 쓱쓱 닦고 고개를 젓는다.
"정말로 그것뿐이에요. 그냥 예감이 안 좋아요."
"흐음. 그래."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칼렌의 표정은 묘했다. 혼란. 그리고 약간은 불편한 표정.
하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어색해 보인다면 모를까.
유들유들한 모습은 어디 가고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상냥하기도 하고,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다.
"네……. 정말로."
"내가 수수께끼에 약하긴 한가보다. 이젠 정말 흥미가 생기거든. 네가 누군지. 방금 네가 한 이야기 모두 그냥 네 생각인지."
칼렌이 뭔가 눈치챈 건가? 설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칼렌은 시온을 향해 손짓했다.
"시온, 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을 가져와라."
"네."
시온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빠른 동작으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한 번 휘청하기까지 했다.
나, 혼나지 않은 건가?
"화 안 내요?"
"화 안 내."
칼렌이 말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어. 오늘 밤은 저택에 있지. 일단 누워. 네 상태가 안정되는 게 먼저인 것 같으니."
제이드가 망설이다 다가와 부드럽게 내 머리를 넘겼다.
"울지 마, 울보야."
"흑, 네."
그 말을 듣는데 안심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고마워요, 정말. 나보다 어른스러운 사람들이라서 고마워요. 내게 이렇게 대해 줄 여유가 있어서 고마워요.
'동정심? 아니면 변덕인가?'
그런 거든, 뭐든 좋았다. 곧 시온이 들어왔다.
"아가씨, 어서 약을 드십시오."
"아뇨, 안 먹을래요. 이제 괜찮아요. 공작님만 옆에 계셔 주신다면, 그걸로 되었어요."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제이드가 시온이 내민 약을 받아 들었다. 방금 데운 따끈한 약은 컵에 담겨 있었다.
"먹어.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잖아? 속을 다스리지 않으면 배속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몰라. 위가 망가지면 배를 가르고 수술해야 해. 그래도 좋아?"
"……수술요?"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싫다. 이번 생애까지 수술을 받거나 아프고 싶진 않다.
"그래. 어서 마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 쓰다.
내가 약을 다 마시자 시온이 냅킨으로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나는 아주 어린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혼자 할 수 있는데……."
"혼자 잘 수는 없고?"
"안 돼요! 오늘은 공작님 옆에 있을 거예요!"
나는 펄쩍 뛰었다. 칼렌이 풋, 웃는 게 느껴졌다. 내가 본 미소중 가장 진심 같은 미소였다.
"넌 진짜 귀엽구나. 이걸 어찌할까? 내 피가 흐르는 아이도 아닌데……."
"저도 신기하긴 하군요."
제이드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이 분위기는?'
되레 이번엔 내가 어색해졌다.
시온이 주는 사탕을 받아먹고 발을 꼼지락거렸다.
"누우세요, 아가씨."
시온이 다정하게 말했다.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졸려요."
누우면 잠들 수도 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엔 안심할 수 없다.
"어서."
칼렌이 말했다.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시온이 이불을 내 턱 밑까지 덮어 준다. 나는 조금 부루퉁해져서 둘을 보았다.
"안 잘 거예요."
"자야 빨리 나아."
난 칼렌을 빤히 보았다. 칼렌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내 침대 옆자리에 드러누웠다.
"이제 됐지?"
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이드가 불편하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제이드, 이리 와."
칼렌이 말했다. 제이드는 조금 어색하게 내 왼쪽에 누웠다. 우리는 나란히 셋이 한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다.
시온이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을 터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종을 쳐주세요."
"그래, 나가 봐."
시온은 정중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천장을 보았다.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지?
"졸리면 어서 자."
제이드가 속삭였다.
"원래 약을 먹으면 좀 졸린 게 정상이야."
"자기 싫어요, 안 잘, 건데…… 하암……."
하품이 나왔다. 약 때문이구나.
속았어.
점점 정신이 나른해진다.
"어디, 안 갈 거죠? 나 잠들었다고 두고 가지 말아요."
"알겠어."
칼렌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가족 같다…….'
전생의 가족들에 대한 건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날 많이 사랑해 주었다는 건 확실히 기억났다. 몇 안 되는 기억 속의 그들은 나를 위해 늘 울거나 웃고 있었다.
'……칼렌은 무서워. 하지만, 나한테 계속 친절하게 대해 준다면…….'
눈이 계속 감겼다.
'정말 가족이 생길 수도 있을까?'
양녀는 어디까지 가족일까? 마음속으로는 몰래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위치일까?
"옆에 있어 주세요."
나는 졸음을 견디지 못 하고 속삭였다.
"약속이에요."
그리고 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내일 어떻게든 경찰에 쪽지를 보내자. 익명 투고 같은 걸로, 칼렌이 직접 이 사건을 조사하게 만들면 안 돼. 경찰이 진짜 범인을, 점쟁이를 잡게 만들어야 해. 방법은…… 음, 마리아네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떼를 쓰거나, 어떻게든 외출해서…….'
내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 *
"자아."
칼렌이 속삭였다.
"사냥을 시작해 보자."
"아가씨가 깨면 우시겠군요."
"그것도 오늘 밤 판가름 나겠지. 함정인지 아닌지."
칼렌이 속삭였다.
"오늘 밤 내가 무사히 돌아오거나 단서를 찾으면 레는 그냥 기적의 아이인 거다. 그 반대라면……."
시온이 칼렌에게 로드를 건네주며 대답했다.
"스파이겠지요."
"아아, 그래."
둘 중에 하나. 항상 그의 생각은 틀림이 없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 * *
문득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옆자리가 텅 비어 있는 걸 느꼈다. 방 한 편의 의자에는 담요를 덮은 제이드가 자고 있었다.
"칼렌?"
내 눈동자가 떨렸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제이드! 일어나요!"
"으음, 왜?"
제이드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공작님은요?"
"새벽까지 같이 있다가 나갔어. 알아볼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나는 창밖을 보았다. 막 동이 트는 시간.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럼 그렇지. 이 못된 공작님이 말을 들을 리가 없지.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제이드. 마, 말 탈 줄 알죠?"
나는 간신히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당연하지."
제이드의 표정은 한결 말짱해져 있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나중에 사례로 뭐든지 할게요. 꼭이요."
제이드는 그 말에 홀린 듯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냥 절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제발……."
나는 간절히 말했다. 제이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어났다.
귀찮다는 표정이지만 움직임이 빨랐다.
"일단 알았어."
"마구간으로 가요! 급해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구간으로 뛰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마구간지기도 부르지 않고 자신의 말을 직접 꺼냈다. 새까만 흑마였다.
'원래 말이 이렇게 큰가?'
나는 겁먹었다.
제이드는 받침대도 없이 바로 등자에 한 발을 얹고 뛰어올라갔다. 꼭 마법 같았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아."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제이드는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마구 내 뺨을 때렸다.
몸이 위아래로 마구 요동쳤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를 뒤에서 안은 제이드가 뭐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처음엔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몇 번 외치고 나서야 나는 제이드의 말을 알아들었다.
"괜찮아?"
"네, 네에!"
"그런데 빈민가엔 왜 가자는 거야?"
말 못 할 사정에 나도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절대 잠들지 말걸.
마침 내가 찾던 위치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세 번째 골목!"
내가 살던 골목. 그 근처의 빨간 지붕 집 지하가 점쟁이의 집이었다. 나는 제이드의 손을 잡고 마구 외쳤다.
"어서 내려 줘요! 제이드!"
히힝!
제이드가 말고삐를 당겼다. 말의 울음소리가 새벽을 갈랐다.
말도, 나도 제이드도 온통 땀투성이였다. 동이 터 오는 아래 우리는 급히 말에서 내렸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칼렌은, 없나?'
그 순간이었다. 건물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사람의 비명 같기도, 뭔가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쿵! 쿵!
무언가 부딪히는 큰 소리가 지하에서 울리고 있었다.
왼팔이 다시 아파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