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화
"아가?"
칼렌의 목소리였다.
"정신 차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시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잠깐 졸았나 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늘이 며칠이죠?"
나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시온에게 물었다.
"8월 9일입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아까부터 울렁거리던 속과 욱신대던 왼팔. 내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내가 살해당하는 날이라는 것을.
'르웰턴 공작가의 나날들 7화, 점쟁이 살인 사건.'
분명히, 원작 내용이 똑똑히 기억났다.
'덕분에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어.'
붉은 머리의 여인들이 심장 마비로 죽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칼렌과 왕실, 그리고 경찰은 아직 사건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을 뿐이지만, 아마도.
"점쟁이……."
"뭐?"
칼렌이 내게 몸을 숙였다. 범인은 점쟁이였다.
'공통점이 없는 여인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어……. 그 사람들이 모두 심장 마비로 죽었어. 붉은 머리라는 것이 유일한 공통점. 하지만 이거 우연이 아니야.'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요 며칠 안에 그녀들은 같은 장소에 다녀왔어. 점쟁이의 집. 그게 단서야. 그게 진짜 주목해야 할 공통점.'
토할 것 같았다. 눈앞이 노래졌다.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점쟁이. 내가 만난 그 여자가 범인이었어. 아까 낮에 골목길에서 그 여자에게 끌려갔다면……. 그럼 난 오늘 죽었겠지. 원작대로.'
나는 칼렌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고, 공작님."
칼렌이 놀라 물었다.
"왜 그러지?"
"아까 말씀하신, 여인들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건이요."
"그래."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제이드와 시온 모두 놀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그게 살인이라거나 누가 사주한 거라면, 음. 그 사람들이 공통으로 뭔가 한 것이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칼렌은 몸을 숙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더 자세히 말해 봐."
"예를 들면 동시에 같은 장소에 다녀왔다거나, 그런 거요."
"왜 그런 말을 하지?"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빈민가에 살던 시절의 기억이 나서요."
"……."
"빈민가에는 귀족 나리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아요. 내기 권투장, 카드 게임 장소, 그리고 이상한 상점들요. 반면에 귀족 아가씨나, 마님들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빈민가에 온대요."
"그게 뭐지?"
"점쟁이를 만나러요."
나는 속삭였다. 왕국 사람들은 점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빈민가엔 용한 점쟁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공통점이 굳이 있다면, 그 아가씨들은 점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어요. 제 상상력으로 도저히 그 이상 공통점이 떠오르지 않는걸요. 다양한 신분의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거라곤……."
"……."
"그도 그럴 것이, 식당이나 옷가게, 또 상점은 각기 신분에 맞는 곳에 가요. 하지만 점집은 용할수록 빈민가에 모여 있대요. 제가 듣기론 그래요."
"……그래."
칼렌이 속삭였다. 그는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거 재미있는 상상이구나."
칼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왼팔의 환상통이 점점 심해졌다.
"욱."
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시온이 내게 장갑을 낀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가씨, 천천히 토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참지 마시고요. 그래야 편해집니다."
그러니까, 시온은 지금 자신의 손바닥 위에 토하라고 하고 있는 거다.
'너무 친절하잖아요, 시온.'
그러느니 차라리 죽지. 제이드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체한 것 같은데. 안색이 너무 창백해."
어? 이상하다. 눈앞이 왜 가물가물하지? 나는 핑 도는 머리를 느꼈다.
'다행이다, 공작가에 있을 수 있어서.'
이 집 안은 안전하다.
'나, 여기 거둬져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공중에 뜨는 몸을 느꼈다. 묘한 우드 향.
칼렌이었다.
그가 나를 안아 올린 것이다. 칼렌은, 맨손이었다.
'안 돼……!'
나는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 * *
이런 상태를 뭐라고 하더라? 그래, 쇼크 상황. 의식을 잃은 동안, 나는 계속 꿈을 꾸었다. 빈민가의 거지 소녀, '내' 가 죽는 순간의 꿈을.
〈아주 예쁜 머리색이야. 왼팔부터 시작하자.〉
톱을 든 여자가 다가오며 내게 속삭였다.
싫어. 무서워. 나는 꿈속에서도 비명을 질렀다. 왼팔이 잘리고도 나는 계속 의식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다가와 내 오른 다리를…… 피가, 계속 났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나는 그렇게 애원했던 것 같다.
'싫어, 살려 줘!'
그리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무슨 빨간 머리 패티시냐? 미친년. 너는 살점 단위로 다져 줘야겠구나.〉
검은색의 긴 코트를 입은 사내.
싸늘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 채 성큼성큼 들어온 남자. 칼렌이었다.
〈가엾게도, 빨리 끝내고 의사를 불러 주마.〉
내가 갇힌 우리를 향해 그가 속삭였다. 다음 순간 내 눈동자가 커졌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 화살은, 칼렌의 등을 관통했다. 그건 모두 오늘 밤에 일어날 일이었다.
'맞아, 분명해. 이 에피소드가 내가 읽은 마지막 에피소드였어.'
전생의 나는 여기까지 책을 읽고 나서 죽었다. 이 책을 읽다가 쓰러졌고, 수술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못 했다.
퍼즐 조각이 맞아 들어가듯 확실해졌다.
'그래, 여기까지였어.'
꿈속의 환상 위로 병실 안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병든 15세의 소녀. 내 손에서 책이 툭 떨어졌다.
'책의 표지가 보이지 않아…….'
* * *
'흡!'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이마엔 큰 손이 올라와 있었다. 칼렌의 손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공작님?"
"괜찮나?"
곧 칼렌의 손이 치워지고 차가운 물수건이 얹어졌다. 방금 대야에서 꺼낸 물수건을 얹어 준건 소매를 걷어 올린 시온이었다.
"정신이 좀 들어?"
방 한 편 의자에 앉아 있던 제이드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기절했어, 너."
"아……."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밖은 벌써 새까만 밤이었다. 시온이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 주며 나직이 말했다.
"계속 잠꼬대를 하시더군요."
"뭐라고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대답은 제이드가 대신했다.
"살려 달라고, 아프다고 중얼거렸어. 혹시 너 예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런 거 아녜요."
"말해 봐."
나는 고개를 크게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악몽 꿨어요. 아주 무서운 꿈을요."
시온은 내 낯을 살피더니 제이드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제이드 도련님은 이제 주무시러 가시죠."
"알겠다."
제이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제이드가 은근히 나를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멍했다.
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온이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하인이 서류를 시온에게 건네는 것이 보였다.
'저 서류는……!'
그리고 그는 내 침대맡에 앉은 칼렌에게 다가왔다.
"부탁하신 조사 자료가 도착했습니다."
"벌써? 생각보다 빠르군."
시온이 건넨 종이는 딱 석 장이었다. 분명, 내가 떠올린 기억이 맞는다면, 저건…….
'저건 심장 마비로 죽은 붉은 머리 여인들의 행적을 담은 보고서야…….'
책 속에서는 저 서류를 받는 장소가 내 방이 아니라, 칼렌의 서재였다.
시온은 그녀들의 행적을 조사해달라 경찰과 정보 길드에 요청을 보냈다. 회신은 고작 몇 시간 만에 빠르게 도착한다.
'모두 오늘 밤에 일어나는 일이었구나.'
하물며, 나는 방금 모든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 칼렌에게 점쟁이에 대해 말해 버렸다.
'그럼 칼렌이 오늘 밤 점쟁이를 만나러 가면 다친단 말이야?'
목이 바짝 탔다.
시간 단위로 정리된 죽은 여인들의 행적. 칼렌은 서류를 훑어보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단서를 찾아낼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심장 마비로 죽은 여인들은 모두 점집에서 〈묘약〉을 처방받아 마셨어.'
그 약은 얼굴을 아주 예쁘게 만들어 준다는 약이었다. 물론 그건 새빨간 거짓말.
체온이 올라가서 뺨이 붉어지고 피부가 좋아지긴 하지만 그건 모두 일시적인 증상이었다.
점쟁이는 그녀들을 속였다. 그녀들이 마신 약은 잠복기가 긴, 쇼크를 일으키는 독약이었다.
'칼렌이 오늘 밤 외출하면 안 돼.'
오늘 밤 일어나는 일은 내가 사지를 잘리는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칼렌이 중상을 입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