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화
칼렌이 몸을 숙여 맥을 짚어 보았다. 잠시 후, 칼렌이 고개를 들었다.
"죽었어."
칼렌이 속삭였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주, 죽었다고요……?"
역시 이 도시는 무서운 곳이었다.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상처도 없는데요."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외상 없이도 사람은 비명횡사할 수 있단다. 심장 마비라든가 말이야. 넌 정말 똑똑하구나, 아가."
칼렌이 속삭였다.
휘청거리는 나를 마부가 부축해 마차에 태웠다.
아아, 그렇다. 이게 내가 사는 세계였다. 더군다나 내가 사는 왕국 수도는 범죄율도 세계 최고, 의문사율도 세계 최고라고 했다. 그것 또한 책 속에 서술되어 있던 설명이었다.
"사람이 죽었다!"
"세상에! 젊은 여자야!"
"꺅!"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의상실 직원들이 나와서 지르는 비명이 머리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칼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반면 나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경찰입니다. 방금 여자분이 쓰러지는 걸 목격하셨다고요? 성함이……?"
"칼렌 드 르웰턴 공작이네."
"아, 공작님이시군요!"
경찰이 즉시 예를 갖췄다.
"그럼 형식적으로나마 몇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경찰은 칼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죽은 여인의 이름은 베넷 알레임이라 합니다. 수산물 시장의 점포를 몇 개 소유한 사내의 딸이죠. 면식이 있는 여인인데, 가엾게도. 지병은 없었던 것 같은데 심장 마비 같군요."
"그런 일도 있는 법이지."
"그럼, 귀하신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공작님."
경찰들은 모자를 벗고 우리의 마차가 출발하는 길을 정중히 배웅했다.
'그냥 단순한 사고……, 일까?'
그럴 리가 없다.
'책 내용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내 기억은 몹시 불완전하다.
나는 양손을 꼭 쥐고 충격을 삼켰다. 칼렌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아주 친절하게 속삭였다.
"처음 본 날엔 아주 용감하던데, 지금은 겁먹었구나. 뭐가 그리 무섭지?"
"세상엔 별별 일이 다 있는걸요. 전 괜찮아요."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댔다. 하지만 꾀병을 부린 탓일까, 점점 이마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점을 보세요.〉
장난감 가게. 그리고 골목에서 날 끌고 가려하던 수상한 여자.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다.
* * *
칼렌은 나를 데리고 귀가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시온이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두 분이?"
"길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웠지."
"네?"
2층에서 내려오던 제이드도 똑같은 말을 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그런데 어떻게 둘이……?"
"사건이 좀 있었다."
칼렌은 짧게 말했다. 제이드를 보자 놀란 마음에 서러움이 더 번졌다.
제이드가 나를 힐끔 보는데, 풍선을 잃어버린 걸 질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이드."
나는 제이드를 보고 머뭇거렸다. 칼렌의 모자와 코트를 받은 집사가 그를 보필해 2층으로 올라가는 걸 지켜보던 제이드가 나를 향해 등을 돌렸다.
"왜 그러지?"
"죄송해요. 풍선을 잃어버렸어요."
"어쩌다가?"
나는 짤막하게 의상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제이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넌 정말 작은 일에도 웃고 우네. 신기해."
"하지만 첫 선물인데, 제이드가 준……."
"풍선이 그렇게 좋았어?"
"네. 오늘 외출해서, 심심할 때마다 하늘을 보면 풍선이 있어서 아주 좋았어요. 마리아네 님이 손목에 풍선 줄을 묶어 주셨거든요. 그게 너무 좋아서 기뻤는데……. 밤이 되면 잠들기 전까지 풍선을 보려 했는데……."
제이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슬펐지만 그가 화난 것 같지 않아 조금 안심했다.
"대체할 수 있는 물건 때문에 울지 마. 아, 나중에 뱃놀이나 가지. 그럼 되겠지?"
달래 주려는 건가?
"하지만 바쁘지 않으세요?"
"괜찮아."
제이드의 말은 짧고 무뚝뚝했다. 그러나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오늘 겪었던 일들. 레이디 로제의 독설을 엿들은 일, 그리고 눈앞에서 죽은 여자. 그리고 사라진 풍선. 그 위로 사르르 안심이 덮였다.
나는 눈가를 쓱쓱 문지르고 미소 지었다.
"좀 쉬고 식당으로 와. 아마 식사를 마치고 와인 룸에 가서 음악을 듣자고 하실 거다."
제이드가 속삭였다. 난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날 것 같은데.'
쓰러진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계속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예감을 더듬었다. 옷을 갈아입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왼팔이 쓰라렸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이제는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기분 탓인가?'
* * *
"아직까진 수상한 점이 없더라."
칼렌은 흥얼댔다.
그의 손에는 갈색 술과 얼음을 담은 잔이 들려 있었다.
"레라는 아이가 아주 귀엽다는 것 말곤 발견한 점이 없으니- 쓸모가 있든 없든 무사하겠구나. 그렇지 시온?"
칼렌이 속삭였다. 칼렌의 손끝에서 새까만 힘이 일렁였다. 그림같이 서 있는 시온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네 일부를 보낸 덕에 바로 미아를 찾을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말이다. 애 키우기는 역시 힘들어."
칼렌의 손끝에서 검은 연기는 뱀 모양으로 변해 사라져 갔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 * *
죽은 사람을 본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역병이 돌아 거리의 친구들이 죽은 날, 그래서 그 시체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평탄치 않게 살았구나.'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저녁 식사 때, 내게 음료를 따라 주며 시온이 속삭이듯 물었다.
"네……."
아마도 칼렌이 밖에서 겪은 일에 대해 말해 준 거겠지? 하지만 칼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저녁 식사는 조용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시온이 칼렌에게 쪽지를 한 장 건넸다. 칼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쪽지를 훑었다.
"폐하가 수수께끼를 보내셨구나."
칼렌이 속삭였다.
"방금 우리가 겪은 일, 기억나지?"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구나."
"그런 일이요?"
"원인 불명의 심장 마비로 죽은 사람 말이다. 각기 다른 여인들이, 모두 다른 장소에서 갑자기 심장 마비로 죽은 것이 벌써 세 명째라고 하는군. 두 번째까지는 우연이라 결론 내렸지만, 세 번째부터는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니 경찰에서 주시하기 시작한 모양이야. 그 여인들의 공통점은 붉은 머리라는 것뿐이고, 상인의 딸, 귀족, 심지어 천민까지. 신분도 제각각이지."
칼렌이 미소 지었다. 속이 오싹해질 만큼 완벽한 미소였다.
"좋은 일이면 좋겠구나."
칼렌의 입장에서는 살인 사건이 생기면 '사냥' 을 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칼렌에게나 좋은 일이지.'
난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정색하는 대신 눈만 깜빡였다.
"전 잘 모르겠지만, 공작님께서 즐거우시다면 좋아요."
칼렌은 내 말에 느긋이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구나. 언젠가는 아버지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일단은 내가 네 보호자니까."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좀 부끄러운데…….
"익숙해지면 부를 겁니다. 수줍음이 있는 아이 같아서요."
제이드가 점잖게 덧붙였다.
"그렇지?"
"네."
"기분은 좀 나아졌어?"
"네. 저어, 풍선을 잃어버려서 조금 슬펐지만, 제이드가 위로해주었잖아요. 이젠 괜찮아요."
"그래. 천천히 먹어."
제이드는 내 앞으로 맛있는 음식들을 밀어주었다. 칼렌은 놀란 듯 우리 둘을 관찰했다. 제이드가 누굴 챙기는 것이 낯선 듯했다.
"아직 축음기가 고가품이라, 왕국 귀족 중에 이걸 집에 보유한 사람이 거의 없지. 아버지와 난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들어. 이럴 때는 집사도 동석하지."
제이드가 속삭였다.
칼렌은 나팔 모양의 확성기가 달린 축음기를 켰다. 그리고 옆에 꽂혀 있던 레코드 중 하나를 들어 축음기에 꽂았다. 그가 바늘을 움직이자, 천천히 레코드가 돌기 시작했다.
'마정석으로 움직이는 축음기, 엄청 비싼 물건이라지. 마도구를 본 건 처음이야.'
곧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축축한 음악이 허공에 퍼졌다. 약간 느른한 느낌의 피아노곡이었다.
'……음악, 좋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들어 보는 음악이었다. 나는 홀린 듯 집중했다.
"좋아요."
"나중에 다른 레코드도 들려주지."
칼렌이 축음기 옆에 기대서 말했다.
시온이 제이드와 칼렌에게 와인을 건네주고 마지막으로 내게 복숭아 주스를 건넸다.
"고마워요, 집사."
"일일이 고맙다고 하지 마. 이 녀석은 시키는 대로 다 하니까, 굳이 친절하게 대할 필요 없거든."
칼렌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사이좋은 주종인걸 이미 알고 있다.
"이 녀석은 내게 신세 진 게 있어서 꼼짝을 못 하거든."
칼렌은 시온의 눈동자 바로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시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끔 보면, 시온은 잘생긴 동상 같았다.
"그래도 전 고마운걸요."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칼렌이 소파에 앉으며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칼렌의 옆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맞은편의 제이드를 힐끔거렸다.
"제이드는 와인 마셔도 돼요? 아직 성년이 아닌데……."
"괜찮아. 우리 집안사람들은 약도, 술도 잘 듣지 않거든. 난 열 살 때부터 마셨어."
제이드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럼 전……."
"넌 안 돼. 아직 너무 작아. 제이드 반만이라도 큰 다음이야."
칼렌이 딱 잘랐다.
"제이드는 몇 살인데요?"
"열넷."
열일곱은 되어 보였다.
"키는요?"
"글쎄, 마지막으로 재어 봤을 때 3 티나(180cm)를 넘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지? 확실한 건 엄청 크다는 거다. 얼굴은 연령미상의 미소년에 이미 괴물급 성장이라.
'이거 괴물 유전자야, 아님 노안 유전자야?'
역시 보통 가문이 아냐. 내가 너무 작은 걸까? 나는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내 키를 가늠해 보았다.
"뭐 하는 거야?"
"키 크고 싶어서요."
제이드가 왜 웃는 거지?
칼렌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내쪽을 향해 몸을 숙였다.
나른했다. 음악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꼬박 숙여졌다.
"졸리면 가서 자. 아직도 창백해."
칼렌이 속삭였다. 눈이 감겨 왔지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요. 혼자 쉬는 것보다다 같이 있는 게 좋아요."
칼렌은 장갑을 벗었다. 그는 실내에서도 늘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가 내 이마에 큰 손을 가져다 댔다.
'아……!'
그 순간이었다. 그때, 내 몸에 전류 같은 것이 통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 나는 환상을 보았다.
'또…….'
〈……8월 9일 화요일.
이번 타깃은, 빈민가의 소녀 어린 '레'였다.
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만이 재산인 그녀는 가엾게도 여인의 유혹에 바로 넘어가 버렸다.
"이리 오렴. 아가. 점을 봐 주마. 너, 엄마를 잃었니? 네 엄마가 저기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점을 통해 알아봐 줄 수 있단다. 그래, 아주 착하다."
끌려간 레는 다른 여인들과 다른 대접을 받았다. 레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찾을 사람이 없었다. 점쟁이는 레에게 강제로 약을 먹였다.
그다음 레는 철창에 갇혔다.
"아주 예쁜 머리색이야."
레가 왼팔이 잘리기 전에 들은 마지막 말이다.〉
'히익!'
내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나는 내 왼팔을 감싸 쥐었다.
지금 내가 떠올린 내용이 맞는다면, 오늘은 빈민가의 거지 소녀 레가 죽는 날이다.
그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