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18)

9 화

"아아, 공작님.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실 줄 알았으면 식당을 예약해 뒀을 텐데. 우리 요즘 만나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그 애는 누구죠?"

로제가 나를 힐끔거렸다. 난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오랜만이군요, 레이디 로제. 이쪽은, 제 딸입니다."

"그렇군요. 어머, 나랑 친하게 지내야겠구나, 너. 우리도 곧 가족 같은 사이가 될 테니까."

로제는 부채로 입가를 요란스레 부쳤다. 마치 화려한 깃털의 새 같은 느낌의 미녀였다.

"가난한 평민 고아를 입양했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생각보다 예쁜 애네요?"

"생각보다는 모르겠고, 예쁜 건 맞지요."

칼렌이 나직이 대답했다. 로제는 몹시 즐거운 말을 들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자선 사업은 아주 중요한 일이죠. 공작님의 취미를 존중해요. 천민도 사람인데, 열심히 키워내면 훌륭한 품성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저도 협력할게요. 이 아이의 태생을 숨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혹시 가정교사는 알아보셨나요? 아주 혹독하게 훈련할 수 있는 교사를 알아요. 필요하다면 때리기도 하는 과감한 교사죠."

로제가 다음 내뱉은 말에 나는 기절할 뻔했다.

갑자기 칼렌은 나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굽혀 내 눈을 보았다.

"내가 누구지?"

"공작님이요."

"그게 아니지."

칼렌이 속삭였다.

"아버지잖니. 불러보렴."

"……어."

나는 수줍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부끄럽구나. 그렇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라도 아버지-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칼렌이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하는데."

"뭔데요?"

"저 여자에게 지금 당장 나가라고 전해 주지 않겠니?"

잠시 우리 사이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공작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레이디 로제가 파랗게 질려 말했다.

"아, 간접 화법을 못 알아듣는군요."

칼렌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도 내 눈에 띄지 않으면 좋겠군요. 조금 더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꺼져 달란 말입니다."

"……!"

"이해하셨습니까, 레이디 로제?"

레이디 로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동시에, 내 입도 마찬가지였다.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로제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꼭 연극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고 보니 칼렌은 이런 성격이었지.'

오만하고, 하지만 그래서 맹수처럼 매력적인. 좀 못된 남자. 자기중심적이지만 거절할 수 없는 남자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조금은 깨소금 맛을 느꼈다. 나도 못됐나 봐.

"작별 인사하렴, 아가."

칼렌이 속삭였다.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사람이란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안녕히 가세요, 아줌마."

나는 칼렌의 옷자락을 잡고 소심하게 말했다. 칼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착하구나. 그래, 이렇게 귀족적인 태도를 배워 가면 되는 거지."

칼렌은 아침에 하녀들이 공들여 정리해 준 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으으, 기분 좋기도 한데, 좀 곤란하기도 하고.

"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이가 없다는 듯 레이디 로제가 나를 본다. 바로 나한테 화살을 돌리는 건가?

"몰라요. 하지만 언니처럼 예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뭐?"

"제가 언니처럼 예뻤다면 조혼해야 했을 테니까요."

더 이상 나도 내 입을 멈출 수없었다.

"그렇죠?"

그 말에 로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나와 칼렌을 힐끔거리며 보았다.

"아니면 제가 서커스단에 팔려가야 할 것 같아 보이나요?"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칼렌에게 더 달라붙었다. 레이디 로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말을 듣고 다녀?"

"미친 살쾡이처럼 내 딸을 위협하는 일부터 삼갔으면 좋겠는데, 레이디 로제. 그보다, 축객령이 뭔지 혹시 들어본 적 없습니까?"

"여긴 공작님의 집이 아니잖아요!"

축객령……, 이라는 게 집에서 손님을 쫓아낸다는 것 맞지? 칼렌은 어이없다는 투였다.

"이 거리 자체가 내 것입니다. 이 건물의 주인이 누구라 생각하죠? 그걸 알고 내게 접근한 줄 알았는데 실망이군요. 난 좀 세속적인 사람이 좋은데."

"……!"

"아, 물론 넌 빼고. 넌 아무것도 몰라도 된단다."

하하, 네. 하는 기분이 되었다.

"내가 경비를 불러야 하나?"

칼렌이 레이디 로제를 향해 말했다. 로제가 칼렌을 향해 말투를 바꿔 애원했다.

"공작님, 칼렌. 우리는 교제 중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식사 몇 번 했다고 교제 중이라니, 그리 희망적인 성격인 줄 몰랐군요. 정 그리 믿으셨다면 영애가 저를 찬 것으로 해 두셔도 됩니다."

칼렌이 완벽하게 예의 바른 말씨로 말했다.

"그럼 빨리 사라져 주시겠습니까? 꺼져 달라는 말을 반복하긴 싫은데. 후환이 두렵지 않나?"

하지만 말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냉기가 묻어났다. 로제는 울먹이더니,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려 나갔다.

"레이디 로제와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입술을 오물댔다.

"그 사람의 말을 엿들었어요."

칼렌이 더 물어볼 것 같자 나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길거리에서 바로 알아보셨어요?"

"처음 만날 때와 같이 반짝거리니 알아봤지."

칼렌은 바람둥이처럼 말했다.

내 뺨이 붉어졌다.

'와, 달콤한 소리도 잘하네.'

이게 바로 귀족이라는 건가? 그때 탈의실이 아닌, 2층 계단을 통해 마리아네가 내려왔다.

드레스는 아까 그대로였다.

어, 새 드레스를 입어 본다고 탈의실로 간 것 아니었나?

"칼렌, 언제 왔어? 어머나. 아가랑 같이 있었구나?"

칼렌은 그대로 마리아네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네가 의상실에 와서 새 드레스를 입어 보기는커녕, 2주 전에 입은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거기다, 아이를 돌보기는커녕 뒷문으로 통해 있을 2층에서 내려온다는 건……."

칼렌이 느릿하게 말했다.

마리아네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을 끊었다.

"그만! 하지 마! 인사 대신 사람 분석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알아도 모른 척해 줄 수 있잖아. 하여간 소름 끼치게 예리하다니까."

마리아네가 뺨이 붉어져 툴툴거렸다.

"숙녀는 의상실을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하는 법이야."

"연애가 취미인 여동생이 내게 얼마나 골치인지 알아줬으면 하는데. 의상실을 밀회 장소로 삼는 건 삼가 주렴."

"오빠야말로 내게 할 말이야? 아주 수도의 모든 여자를 다 홀리시지. 그보다, 여자인 나는 연애하면 안 된다는 거야?"

"넌 성녀잖아. 특수 직업 종사자가 그러면 곤란하지."

칼렌의 말이 참으로 옳아서 나는 수긍하고 싶어졌다.

일단 성녀……면 수녀 같은 직업 맞지? 마리아네는 말투를 바꾸어 다른 걸 공격했다.

"오빠는 레이디 로제 같은 여자나 만나고 다니면서. 그 여자 오빠랑 만난다고 요새 얼마나 떠들고 다니는 줄 알아? 그녀가 공작부인 되면 재미있긴 하겠다. 아주 난리가 나겠어."

"사귄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헤어졌는데."

"……뭐? 언제?"

"내가 차였어."

칼렌이 그 말을 마치고 나와 칼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풋, 웃어 버렸다. 비밀이 생긴 기분이었다.

"필요한 건 다 샀어?"

"그럼. 저기 보이지?"

마리아네가 입구를 힐끗 가리켰다. 입구에는 산처럼 선물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저어, 옷을……!"

지금이 마리아네를 말릴 기회였다.

"오늘 마리아네 님이 이렇게 절 데리고 나와주셔서 주셔서 정말 기쁘지만, 오늘 의상실에서……, 돈을 조금, 잘못……, 쓰신 게 아닌가 하고요."

칼렌과 마리아네의 눈이 내게 집중되었다.

마리아네가 내 옷에 정말 금화 100개를 써 버린다면 난 충격으로 기절할 것이다.

"얼마나 썼는데?"

"금화 100개를 예산으로 잡고 보석과 비단을 다 달라고 했는데?"

"네가 잘못했군."

칼렌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 휴, 용기를 내어 말하길 잘했다.

공작가 거덜 낸다며 당장 대문 밖으로 내쳐질 위기는 피했다.

"금화 200개는 잡았어야지. 다음 계절의 드레스 선금도 걸어놔야 이들이 제일 좋은 비단을 준비해 줄 것 아니냐. 공작가의 아이가 초라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

"아하! 맞아. 역시 오빠야!"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마리아네가 해맑게 말했다.

"그러면 되겠다!"

되긴 뭐가 돼?

"아, 저는 마리아네 님의 어릴 적 드레스만으로 충분한데, 집에 다섯 벌이나 있어요!"

"하지만 다섯 벌로 드레스 룸을 어떻게 채워?"

마리아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티에 입고 갈 옷도 부족하잖아?"

"하지만 그건 너무……. 너무 큰 신세고……."

"걱정 마라. 신세는 없어. 이 정도는 보호자의 의무야."

칼렌이 말했다. 난 그런 의무는 들어 본 적 없다. 정말 곤란했다.

"몇 벌이나 맞췄다고?"

"일단 스무 벌 정도 맞춰 놨어."

"좋아, 그럼 더 가져오라고 해."

나는 급히 말했다.

"저, 좀 피곤해요. 죄송해요, 하지만 눈이 감겨 버릴 것 같아요……!"

정말 피곤했다. 쇼핑은 엄청나게 에너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먹혔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머지 옷은 달아 둬."

칼렌이 수석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최우선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 입고 온 갈색 원피스로 다시 갈아입었다.

탈의실 밖으로 나오자 칼렌이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와."

칼렌이 손짓했다.

"칼렌, 나는?"

뒤늦게 드레스를 이리저리 대보고 있던 마리아네가 고개를 들었다.

"년 신전으로 돌아가서 기도나 해. 가끔은 성실하게 역할을 하라고."

"……쳇. 알겠어. 아가, 고모랑 또 놀아 줘야 해. 알겠지?"

마리아네가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 돼. 넌 아이 보기에 재능이 없어. 애는 인형이 아니야. 뭘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허락 없이 데리고 외출하지 마."

내가 혼자 길거리를 헤매던 걸 봐서 인지 칼렌이 엄하게 말했다.

마리아네는 모른 척 미소 지으며 내게 크게 손만 흔들었다.

"오빠 말은 신경 쓰지 마. 떠봐. 다음번엔 꼭 마리아네라 불러 주기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다가, 칼렌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머리가 아픈 척했다.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 나는 풍선 생각에 다시 울적해졌다.

'제이드에겐 뭐라고 말하지?'

정말로 풍선을 받아서 기뻤다.

하지만 그걸 잃어버리고 돌아오면 내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제 조금 친해졌는데…….

"아……. 아아……."

그때였다. 한 여자가 휘청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칼렌이 재빨리 나를 등 뒤로 숨겼다.

"도와주세요……!"

여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저 사람, 낯이 이상해.'

풀썩.

그리고 다음 순간, 파리한 낯의 여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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