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18)
  • 8 화

    "아, 안 돼요! 그건 너무 많아요."

    나는 기겁하며 마리아네를 말렸다.

    "어머, 얘. 그 정도는 해야 첫 쇼핑이지. 걱정하지 말렴. 나도 부자란다."

    하지만 전 부자가 아니에요.

    '심지어 난 공작가의 친딸도 아닌걸!'

    하지만 여기서 안 된다고 버티면 마리아네를 망신 주는 걸까 봐 망설여졌다.

    반면 의상실 직원들의 행동은 번개 같았다. 판매에 대한 투지에 불타는 그녀들은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다.

    "이건 보관해 드리겠습니다."

    "어, 내 풍선……."

    "잠시 저쪽에 묶어 둘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실 직원은 풍선을 창문 손잡이에 매어 두었다.

    곧 의상실 직원들이 몰려와 내 몸에 다양한 천을 대 보고 이것저것 디자인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꽃무늬 천, 다양한 색의 천, 구름 그림의 천, 숲 무늬의 천…….

    "더 비싼 것 가져와. 공작가의 품위에 맞는 거로요."

    "어머, 이런 디자인은 유행이 지났잖아."

    "이렇게 예쁜 애한테 고작 이런 거 입힐 거야?"

    마리아네는 무릎에 카탈로그를 올려놓고 신이 나서 이것저것 지시했다. 나는 금세 녹초가 되었다.

    "지금 보시는 페이지의 의상은, 견본이 있는데 입어 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아가, 어서 일어나렴."

    마리아네가 손짓했다. 나는 축 늘어져 있다 허리를 폈다.

    "귀빈용 탈의실로 모실게요."

    의상실 직원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녀들은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방에는 칸막이식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공간이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

    의상실 직원 언니 둘이 내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몸을 보이자 부끄러워졌다.

    "이런 어린 아가씨들 용 옷은 허리둘레를 끈으로 조일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쑥쑥 크셔도, 소매만 새로 만들어 달면 언제든 입을 수 있게 사이즈 조절이 가능하죠."

    그녀들이 속삭이며 내게 옷을 입혀 주었다.

    "지금 입으신 옷은 파티용 드레스입니다. 공주님도 비슷한 걸 주문하셨어요."

    핑크색의 반짝이는 천으로 만든 드레스는 리본이 열 개도 넘게 달려 있었다.

    '공주님이 입는 드레스……?'

    너무 큰 호사는 현실감이 없었다.

    그때 옆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옆 탈의실에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정말 천민이 이 의상실에 들어와 있다고?"

    "네. 그래요, 레이디 로제."

    "이봐! 손대지 마. 내 시중은 내 시녀가 들 거니까. 아무튼, 정말 너무 싫어. 공작님과 교제하기 직전인데. 아아, 제이드 도련님 같은 분이야 우러러볼 분이지만 천 것이 양딸이라니. 공작가의 마법사 혈통을 타고난 애도 아니잖아? 그걸 뭐에 써?"

    "사교계에서도 말이 많아요."

    "만일 내가 공작부인이 되더라도 교육할 일이 큰일이네. 어떻게 사람 구실 하게 만들지?"

    "조혼시켜서 시골로 보내는 방법도 있는걸요."

    "어머, 그거 좋은 방법이네. 예뻤으면 좋겠네. 못생기면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할 수도 있거든. 추녀를 어떤 남자가 데려가겠어?"

    "못생겼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공작님은 괴짜이니 기괴하게 생긴 애를 들였을 수도 있잖아. 여자 취향 빼고는 다 이상한 사람이니까. 괴물처럼 생겼으면 서커스에 팔아 버려야지."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주변을 보니 내 옷 시중을 들어주던 직원 언니들도 모두 파랗게 질려 있다.

    한 명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쉿! 아가씨, 듣지 마세요."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다. 저런 사람들은 많이 봤다. 거지인 나를 혐오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겪음직한 일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주치지 않게 지금 바로 나가세요."

    직원이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자 다행히 레이디 로제는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평생 잊지 못 할 것 같았다.

    "어머, 귀여워!"

    마리아네는 나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다행이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방금 그런 말을 들었는데, 마리아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랑 세트로 드레스를 맞춰 입으면 어떨까?"

    "그거 좋네요. 샘플을 입어 보시겠어요? 비슷한 디자인의 성인용 드레스도 있답니다."

    "내 오랜 꿈이었어! 여자 가족이랑 드레스를 맞춰 입는 거 말이야!"

    점원의 말에 마리아네는 신나서 탈의실로 들어갔다.

    "앉아 계세요. 마실 걸 가져다 드릴게요."

    직원 언니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나는 내 풍선이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보았다.

    '……어?'

    심장이 쿵 떨어졌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없어!'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내 풍선……!"

    태어나 처음 받은 선물이었다.

    공주님 드레스도 좋았지만, 그 풍선이 훨씬 좋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혹시 풍선의 바람이 빠졌다면 앞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역시 없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드레스를 더럽히면 안 되는데."

    나는 우울하게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었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이드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아가씨."

    그때 골목길에서 쉰 목소리가 울렸다.

    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골목길 안쪽에서 앙상한 손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귀한 집 아가씨 같군요. 이리 와요. 점을 한번 보시겠어요? 정말 예쁜 머리카락 색이네요."

    앙상한 손이 내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왼손이었다. 그 순간 내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아야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법이지요. 와요, 아주 유명한 점쟁이가 있어요. 은화 닷 냥이면 됩니다."

    그 사람이 한 발짝 다가왔다.

    후드를 푹 눌러쓴 여인이었다.

    나는 손을 비틀어 떼어 냈다.

    "괘, 괜찮아요. 됐어요."

    나는 나를 잡으려는 갈퀴 같은 손을 피해 뛰었다. 정신없이 몇 블록을 지나쳤다.

    '갔나?'

    초조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다 장난감 가게의 진열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보았다.

    꿈에 그리던 장난감 가게였다.

    그런데 안에 있는 것들이 하나도 예뻐 보이지 않았다.

    '내 풍선이 더 좋아.'

    나는 곧 시무룩해져서 걸음을 돌렸다.

    '……어?'

    그러다 문득 나는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상실이 어디였지?

    '하얀 지붕, 하얀 지붕.'

    하얀 지붕의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건물. 하지만 다 똑같이 생겼다.

    '이 드레스, 내 것 아닌데.'

    말도 없이 입고 나와버렸다.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 어쩌지?'

    그러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치고 지나갔다. 나는 세 발짝이나 밀려났다.

    "조심해!"

    그 사내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아파…….'

    나는 울고 싶었다. 어쩌지? 길을 찾아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눈앞이 깜깜했다.

    "아!"

    무언가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까만 것.

    '뭐야, 새인가?'

    그때, 거짓말처럼 어떤 마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금박 장식이 딸린 새까만 마차였다. 나는 이마 차를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마차 문이 스르륵 열렸다.

    '칼렌?'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칼렌이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싶어졌다.

    칼렌 맞지? 이런 절세미남이 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너였구나."

    칼렌이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천사처럼 예쁜 여자애가 서 있어서 다가왔더니, 이제 보니 너였네."

    "……공작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농담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웃기보다는 울고 싶었다. 칼렌은 나를 장갑을 낀 손으로 안아 올렸다.

    "벌써 가출이냐?"

    나는 그가 나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렌이 마지막으로 본 내 모습은 며칠 전, 꼬질꼬질한 까마귀 같은 거지 소녀였으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난 네가 의상실에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저어. 마리아네 님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빠져나왔어요. 풍선을 찾느라."

    "풍선?"

    "제이드……가 준 풍선이요. 아침에 받았는데 잘 가지고 있겠다고 약속하고는 그만 잃어버렸어요……."

    "바보같이. 풍선은 새로 사면되는 것을."

    나는 우울해졌다. 하지만 약속은 새로 살 수 없는데. 그래도 그를 만나서 다행이었다.

    나는 칼렌의 품에 안겨, 의상실로 돌아왔다. 어른 남자가 날 안아 올린 건 처음이었다. 의상실 주변에서 나를 찾아 서성이던 점원들이 놀라서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아가씨! 갑자기 사라지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경찰을 불러야 하나 했다니까요."

    "풍선을 찾으러 갔다더군."

    "그게, 새로 온 손님이 저희에게 말도 없이 환기한다며 시녀를 시켜서 온 창문을 다 여셔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난 그 손님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칼렌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로제?'

    나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녀가 레이디 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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