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18)
  • 7 화

    아침을 먹고 나는 시온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갔다.

    "공작가는 왕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 그만큼 공작가의 건물들도 역사가 있지요. 수도에서 이만한 부지를 쓰는 가문은 공작가가 유일무이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의 땅값은 걸음 한 발짝에 황금 하나다. 소설에서 그런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금색 풍선을 손에 꼭 쥔 나를 보던 시온이 살짝 미소 지었다.

    어, 시온이 웃는 건 처음 본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나요? 쉽게 말해, 수도에서 가장 큰 집에 사는 귀족이 공작님이란 말입니다."

    "네. 집에 온갖 것이 다 있어요. 조각상도 있고. 분수대도 있고."

    "모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지요."

    공작가는 별세계였다. 집 안에 작은 숲이 있고 뒤쪽으론 호수도 있고, 또 별채 건물들도 많았다.

    "이 많은 집엔 누가 살아요?"

    "공작가의 방계 가문 분들이 살거나 고용인들이 살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아, 저쪽의 오래된 신전이 보이십니까?"

    "네."

    아주 낡아 보이는 신전이 보였다.

    "저쪽은 공작님께서 귀한 '수집품' 을 모아 두는 곳이므로 함부로 가시면 안 됩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건물 지하에 뭐가 있는지 잘 알았다.

    '저기가 칼렌의 작업실……!'

    그때였다.

    "……저 마차, 우리를 향해 오는 건가요?"

    마차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차는 분명히 잘 닦인 길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공작가의 정원을 가로질러 우리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신전의 마차군요."

    안타깝다는 듯, 시온이 중얼거렸다.

    곧 새하얀 마차가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엄청난 미녀가 뛰어내렸다.

    "어머, 세상에. 이게 누구야? 이렇게 만나네?"

    "……분명히 마차가 이쪽을 향해 질주하는 걸 봤습니다만."

    마리아네는 시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세간에 우리 공작님이 양녀를 들인 일로 소문이 자자해."

    "벌써 말입니까? 기사는 다 막았는데요."

    "신문보다 더 빠른 정보원은 늘 입소문이지. 왕국 최고의 미남자인 공작님의 일거수일투족엔 모든 아가씨들이 촉각을 곤두세우잖아."

    나는 눈이 둥그레졌다.

    하긴. 내가 알기로 칼렌은 엄청난 인기남이었다. 본인이 뭘 하지도 않는데 바람둥이 이미지가 있을 만큼 말이다.

    "레이디 로제가 내게 찾아와서 떠보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니까."

    레이디 로제가 누구지?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그때, 마리아네가 나를 훑어보았다.

    "어머, 이 옷은……."

    "아……!"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의식했다. 마리아네가 어릴 적 입던 옷이라 했었지.

    "재단사를 부르기 전까지 마리아네 님의 옷을 빌려 입고 계십니다."

    "몸에 조금 큰 것 같은데? 거기다 이런 구식 드레스라니. 이 옷, 내가 원예 할 때나 입던 옷이잖아."

    "그러셨습니까?"

    마리아네의 옷은 내게 천사 옷처럼 귀하게 느껴졌지만, 그녀의 눈에는 차지 않은 듯했다.

    "칼렌은 집에 있어?"

    "바쁘셔서 출타 중이십니다."

    "아아, 잘됐다. 그럼 이 애 좀 빌려 갈게."

    마리아네는 내 팔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풍선을 한 손에 꼭 쥐고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의 외출은 공작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나 참, 나중에 허락받으면 되잖아. 이럴 줄 알았어. 모처럼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가 집에 들어왔는데 필요한 물건은 하나도 안 샀잖아. 새 옷 좀 맞춰 주고 올게."

    "……."

    "뭐하면 칼렌에게 의상실로 오라고 하면 되잖아. 어차피 지방 영지 핑계를 대고 시내 호텔에 있겠지?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해. 3번가의 내가 다니는 의상실에 있을게. 나이가 몇 살이라 했지?"

    "아홉 살입니다, 마님."

    "마님? 세상에. 내가 마님으로 보이니? 마리아네라고 불러. 아무튼, 아홉 살이면 다 큰 숙녀거든! 남자들 눈 말고 여자 눈으로 필요한 걸 골라 줘야 할 나이라고."

    마리아네의 말이 빨라서 내 눈이 돌아갔다.

    엄청나게 도도한 외모인데 오히려 그녀는 뭐랄까, 살짝 발랄한 성격이었다.

    시온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어서 타!"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나를 마차에 태웠다.

    "풍선 가져가도 돼요?"

    내가 든 금색 풍선을 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풍선이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끌어안았다. 이건 내가 받은 첫 선물이니까 소중하게 다룰 거다.

    "너 정말 예뻐졌구나. 누더기를 입고 왔는데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내가 원석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니까."

    마리아네가 웃으며 말했다.

    "난 마리아네야. 우리 구면이지?"

    "네. 신전에서 일하신다는, 공작님의 아주 아름다운 여동생분이시라고……."

    그게 내가 마리아네에 대해 떠오르는 내용 전부였다. 정말 소설에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는걸.

    내 말에 마리아네는 아주 좋아하더니 까르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세상에. 너 정말 말 잘한다. 귀엽기도 하지. 응, 난 신전에서 작은 자리를 맡고 있어. 후우, 졸리다. 어제 밤새 대사제들과 카드게임을 했거든."

    신전에서 카드 게임을 하다니.

    설마 도박은 아니었겠지?

    "내가 따서 기분이 좋아."

    맞나 보다.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작은 자리요?"

    혹시 사제인 걸까?

    "응, 뭐 한직이야. 성녀. 특수직이긴 하지."

    아, 네. 성녀……. 잠깐. 성녀? 그게 내가 아는 성녀가 맞나? 특수직? 그런 말로 퉁 칠 수 있는 건가? 내가 받은 충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마리아네가 흥얼댔다.

    "새 드레스가 많이 나왔을까? 기대된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품 안에서 꺼낸 사각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성녀라면서요……!'

    담배를 피우는 성녀님이라니.

    으음. 피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내 충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성녀가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직업 같은 건가?'

    마리아네는 평화롭게 담배를 한입 베어 물고 후, 하고 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콜록대자 놀라서 담배를 케이스에 비벼 껐다.

    "어머, 세상에. 미안해. 제이드는 어릴 적부터 담배 냄새에 익숙한 애라……."

    "괜찮아요."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미안. 네 앞에선 안 피울게."

    마리아네는 담배를 쥐지 않았던 쪽의 손으로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놀랐지, 아가?"

    나는 조금 안심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고혹적인 마리아네가 상냥하게 대하자 내 가슴이 두근대며 뛰었다.

    곧 마차가 시내로 접어들며 메인 로드가 나왔다. 나는 마차 밖을 구경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장난감 가게다. 거기다, 시장도 있어!'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거지였던 내게 장난감 가게를 구경하는 건 최고의 호사였다. 우리 같은 거지들이 가게 근처에 가는 걸 주인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주인이 진열창의 램프를 끄는 걸 깜빡하고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있다.

    파란 눈이 반짝이는 금발 인형에 곰 인형, 강아지 인형, 병사 인형들. 모형 마차. 장난감 칼.

    그걸 새벽에 몰래 가서 구경하는 게 얼마나 천국처럼 황홀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난 그날 밤 진열창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 마리아네와 함께라면 혹시……?'

    혹시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서 인형을 한번 만져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설레는 상상이었다.

    "너 단것 좋아하니?"

    불쑥 마리아네가 말을 건넸다.

    어떻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반짝이는 내 눈을 본 마리아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다신 안 물을게. 이봐 신관, 먼저 제과점으로 가자."

    그리고 마리아네는 나를 꽃으로 장식된 제과점에 데려갔다.

    그녀가 사 준 온갖 화려한 모양의 과자들과 파르페는 팡팡 튀는 맛이 났다.

    나는 조심조심 파르페를 떠서 먹었다. 풍선은 잠시 의자에 묶었다.

    "어머, 잘 먹네. 우리 집안사람들은 다 소식해서 얼마나 정이 떨어지는데. 이것도 먹어, 아아."

    마리아네는 내 입에 과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조용히 입을 벌리는 내 뺨이 붉어졌다.

    간식을 다 먹은 후에는 마리아네와 손을 잡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리본을 사고, 모자를 사고, 속옷을 샀다. 정신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그녀는 한 2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숙녀라면 모두 세빌 가에서 옷을 맞추지! 옷을 좀 많이 맞춰야겠다. 아홉 살이라도 공작가에서 살려면 수많은 자리에 나가야 하거든. 야회복, 평상복, 이브닝드레스, 가족 식사용 드레스……."

    마리아네는 흥얼대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머! 성녀님."

    마리아네를 보자 전 직원들이 모두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마치 달리기 경주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나를 쫓아내려 오는 줄 알고 움찔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귀빈이 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마리아네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난 그때 처음 실감했다. 일렬로 선 직원들 사이로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점원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맞춰 드릴까요? 새로 들어온 노벨 산 비단이 있습니다."

    "오늘은 나 말고 이 아이의 옷을 맞춰 줘요."

    그러자 내게로 시선이 모였다.

    그들의 시선이 바쁘게 돌아갔다.

    "이 아가씨는 누구신지……?"

    "아아, 새 식구."

    "어떤 용도의 옷을 맞춰 드리면 될까요?"

    "전부 다요. 숙녀에게 필요한 것, 모두 다. 돈은 공작가에서 낼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예산은…… 어느 정도의 비단을 보여 드릴까요?"

    "공작가의 이름 앞에 예산을 묻는 건가요?"

    마리아네의 말에 점원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뭐 좋아요. 일단은, 첫 번째 예산으로 금화 100개."

    "……!"

    "오늘 그 돈 다 쓰고 갈 거니까, 내가 쓰게 만들어 봐."

    난 머릿속으로 금화 100개를 계산해 보았다.

    하녀 한 명의 월급이 주급으로 은화 25개니까, -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 하녀 월급이 월 금화 한 개.

    금화 100개면, 내 전생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으음…….

    '……대강 계산해도 1억원정도?'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막아야 한다. 그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만약 내가 그 돈 다쓰면…….'

    정말 큰일 날지도. 처음 맞이하는 위기였다. 바로 쫓겨날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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