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첨벙!
나는 물이 찰랑찰랑 가득 찬 하얀 대리석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가의 욕실은……. 음. 내가 태어나 본 모든 방 중에 가장 넓었다. 가족들이 모인 홀보다 욕실이 더 넓다니 믿을 수 없어!
"곧 몸 시중을 들 하녀가 올 겁니다. 몸을 좀 불리고 계세요."
욕조 근처의 문 밖에서 집사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물론 옷은 커튼을 닫고 나서 내가 직접 벗었다.
"다 씻고 나서는 오른쪽의 파란 문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저! 집사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아주 조금 열린 문. 그 너머로 모습이 보이지 않은 집사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제 이름은 시온입니다."
"네,시온……, 집사님."
"시온이라 부르십시오."
나는 커튼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목욕 후에 물어보셔도 될 것 같은데요."
시온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만요! 저기……. 공작님이 제게 양녀가 돼라 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그건 아가씨께서 이제 제가 모셔야 할 작은 주인이 되신다는 뜻이지요."
"그거 말고요, 왜 저 같은 고아를 집에 들이셨나 해서요. 사실, 제게는 행운이지만. 너무 큰 행운이라서……. 믿어지지 않아요."
"……."
"저는 이제 뭘 해야 할까요?"
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아직 완전히 양자로 입적되지 않으셨으니, 아직 제 주인이 아니라 생각하겠습니다."
"……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어른의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족 가문의 양녀는 드문 일이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닙니다. 일종의 자선 사업이죠. 고아들을 데 려 다 교육을 시켜 훌륭한 인재로 길러 내는 겁니다."
아. 자선 사업. 그런 거구나.
"그리고 제이드 도련님이 외동이시니, 놀이 친구가 되실 수도 있지요. 자제가 외동인 경우 일부러 양자를 들이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숨죽이고 이야기를 들었다.
'제이드 도련님에게도 잘 보여야 하는 거구나.'
제이드가 날 싫어하면 쫓겨나게 되는 건가?
"공작님은 사람을 그리 좋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에게나 호의를 베풀지 않으시죠."
그건 나도 잘 알았다. 아무렴, 이 작품 속의 다크 히어로, 괴짜 공작님이니까.
"아가씨가 어엿한 귀족 가문의 일원이자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신다면 다들 공작 가문의 자비를 칭송하겠지요."
"그렇군요."
그러니까, 내가 훌륭한 어른이 되면 은혜를 갚는 거구나.
'그건 너무 좋은 일이잖아.'
공부도 하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자선 사업이라고 해도 감지덕지다.
"감사해요. 잊지 않을게요."
나는 작게 중얼댔다. 내가 몸을 웅크리자 찰랑이는 물소리가 났다.
"건방진 말씀 사죄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이 집안의 아가씨로 모시겠습니다."
"……네."
"그리고 덧붙여, 가장 중요한 건 아가씨께서 이 집안에서 건강하고 평화롭게 자라시는 겁니다."
나는 집사의 단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문 너머에서 꼭 허리를 굽히고 있을 것만 같았다.
탁. 이내 욕실 문이 닫혔다.
'……물, 따뜻하다.'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으으, 언제 다 씻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손톱까지 까맸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건가?'
르웰턴 공작가에는 세 명의 미남자가 있다.
잔인한 공작인 칼렌과 그를 꼭 닮은 아들, 제이드. 그리고 칼렌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집사. 이 셋은 〈르웰턴 공작가의 나날들〉의 주요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공작 칼렌이었다. 특수한 혈통을 타고난,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의 공작.
'그게 다는 아니지.'
으음…….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한번 되짚어 봤다.
'평화롭게……. 건강하게 자란다, 가능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은, 날 입양할 사람은 살인마잖아.'
그것도 이미 107명을 죽인 살인마.
칼렌은 흑마법사다. 그것도 아주 최고위급의 흑마법사. 그는 사람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저주에 걸려있다.
'최고위급의 흑마법사는 사람 몸에서 마력을 흡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라.'
그리고 그럴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 그 병을 마력 흡수병이라 한다.
'칼렌은 500년 만에 태어난 최고위급의 흑마법사였지.'
내가 아는 칼렌에 대한 정보는 이게 다다.
'나도 책을 다 읽진 못했던 것 같아.'
여기저기 가위질을 한 듯 전생의 기억은 얼기설기 얽혀 있다.
'확실한 건…… 전생의 난 책을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는 것 정도.'
전생의 기억의 대부분은 하얀 병실에서 시작했다. 그곳에서 좋아하는 책을 잔뜩 읽고 TV를 보고. 그게 기억의 전부다. 추리물도 좋아했고, 이 소설처럼 살인 이야기가 나오는 기괴한 공포물도 좋아했다.
'전생의 난 약했으니까.'
어렴풋이 떠오른 바로는, 〈르웰턴 공작가의 나날들〉은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인 것 같다. 그것도 아주 푹 빠져서 읽은 책.
병자였던 나는, 무서울 정도로 우아하고 강한 르웰턴 일가를 동경했던 것 같다.
마치 몸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맹수나 독사에게 홀리듯이 말이다.
'그래도 칼렌은…… 좀 무섭지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정의의 편……, 영웅 같은 사람이니까.'
칼렌은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의 병을 알아낸 가문에서는 칼렌을 병기로 키우기로 결정한다.
왕실에서도 그 일에 협조한다.
칼렌은 사람을 죽이되, 범죄자들만 찾아 벌주는 살인자로 성장한다.
'일종의 정의의 히어로랄까.'
좀 삐뚤어진 히어로긴 하지만 말이다.
악당을 죽이는 악당. 연쇄 살인마를 죽이는 연쇄 살인마. 왕실의 1인 특수 부대. 그게 칼렌 드 르웰턴이다.
난 이제 이 세계에 대해 조금 안다. 저 거리 밖에는 칼렌의 사냥감인 살인마들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닌다.
'나, 그대로 뒷골목에 살았다면 살아남기 힘들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 피가 낭자한 살인광 공작님의 양녀가 길바닥 거지보단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거다.
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나는 흠칫 놀랐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한 떼의 하녀들이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어요?"
나는 물에 잠긴 채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들이 든 바구니 안을 보고 나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목욕 도구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양한 종류의 솔, 색색깔의 좋은 향이 나는 비누들.
"아가씨, 혹시 어디가 아프면 말씀하세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끄덕였다.
몸을 문지르고 문질러도 때가 나왔다. 머리카락을 북북 감길 땐 시원하기도 하고 피부가 욱신대기도 했다.
어느새 내 몸은 꽃밭 같았다.
다양한 종류의 비누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욕조 물이 까매져서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죄송해요……."
"버리고 새로 받으면 되어요. 자, 일어나세요."
마지막으로 하녀들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도톰하고 부드러운 천 몇 개를 이용해 감싸서 나왔다.
'이렇게 부드러운 천으로 내 몸을 닦아도 될까?'
미안하기까지 한 기분에 나는 손끝으로천 모서리를 살짝만져보았다. 하녀들의 이마에는 땀이 다 배어 있었다. 나도 진이 다 빠져있었다.
"후유, 마리아네 님이 어릴 적 입으시던 드레스를 창고에서 간신히 찾아냈답니다. 이 옷이 없었으면 도련님의 옷을 빌려 입으셔야 했을 거예요."
하녀들은 그렇게 말하며 옷을 입혀 주었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팔락팔락한 원피스였다.
'와! 부드러워. 꼭 천사 옷 같다.'
옷을 갈아입고 나자, 그녀들은 내 머리를 정성스레 수건으로 말려 준 후 빗겨 주었다.
손발에 오일도 살살 발라 주었다. 그다음, 하녀들은 내 손발톱을 자르고 다듬었다.
"어쩜, 손톱을 정리하고 나니 손 모양까지 예쁘시군요. 아직 어리셔서 그런지 피부도 거칠지 않아요."
하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뿌듯한 표정이었다.
"아주 예쁜 아가씨셨네요. 다른 사람 같아요."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어? 예쁘다?'
나는 거울을 보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머리가 이렇게 핑크빛 도는 색이었나? 피부가 이렇게 희었던가? 심지어 늘 똑같았던 초록색 눈동자마저 달라 보였다.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하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아, 아가씨. 이제 홀로 가시면 돼요. 저녁 식사 시간이잖아요. 가서 배불리 드세요."
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화장실에 딸린 파우더 룸을 지나, 파란 문을 열자 작은 식당이 있었다. 비단 같은 벽지를 바른 벽에는 화려한 꽃이 그려진 그림과 드레스 입은 여인들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러나 테이블 위를 보고 나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꿀꺽.
'와! 과일 파이다! 고기도 있어.'
오렌지 파이, 딸기 파이. 그리고 비프, 꿀을 발라 구운 통닭.
아직 김이 나는 수프. 종류가 5가지나 되는 빵. 과일과 채소를 듬뿍 넣은 샐러드. 알록달록 푸딩들까지.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침이 넘어갔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대다 낑낑대며 높은 의자에 올라갔다. 발이 달랑달랑 들린다.
'마, 맛있겠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까지 앓느라 며칠간 거의 먹지 못 했다.
꼬르륵.
난 고픈 배를 끌어안고 간신히 모두를 기다렸다. 그러나 10분, 20분.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조금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
평생 말라비틀어진 빵과 주운 음식을 먹고 자란 내게 그 상차림은 지옥보다 더한 유혹이었다.
나는 눈앞의 따듯한 빵을 집어 들었다.
'맛있어…….'
전생의 나는 죽기 전, 병이 깊어 입맛을 아예 잃었다. 그 당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뿐이기도 했다.
두 번의 삶을 거쳐 오랜만에 먹는 맛있는 음식인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포실한 빵은 입안에서 살살 풀렸고 고기는 잇몸으로도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딸기파이는 달콤했다. 태어나 처음 맛본 진한 단맛은 마약 같았다.
한 손에는 닭다리를 들고, 한 손에는 딸기 파이를 든 채 나는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흐응……."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눈이 젖을 수도 있다는 걸 태어나 처음 알았다. 그러느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뒤늦게 발견했다.
'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랐지만, 제이드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