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90화 (완결) (90/90)
  • 90.

    살벌했던 반역 잔당들을 솎아 내는 일과 다르게, 나와 율리시즈의 약혼(을 빙자한 사실상 청혼 파티)은 발 빠르게 준비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전투적인 태세로 연회 준비에 임하는 시녀들은 무섭기까지 했다.

    수석 시녀장 로라를 필두로 의기투합한 황궁의 시녀들은 율리시즈와 나의 약혼 축하 파티를 기록에 길이길이 남을 최고의 연회로 준비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시간은 유수처럼 빠르게 흘러 어느새 약혼식 당일.

    로라는 율리시즈는 어디다 팽개쳐 뒀는지, 내게 와서 약혼식 의상이며 코르사주 등을 꼼꼼히 점검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내가 쓰는 마법 한 번이면 뚝딱, 하고 1초 만에 해결될 일을 로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 됩니다.”

    “왜 안 되는 건데.”

    “그래서는 정성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물며 황제 폐하와 세진 님의 약혼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누가 자기의 약혼을 축하하는 연회를 직접 준비한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힘들잖아. 예산도 절약하면 좋은 거…,”

    “황제 폐하의 인가는 이미 다 받아 놨습니다. 그분도 이럴 때 예산을 쓰는 거라고 못 박아 두셨으니 저희가 준비하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끄응.”

    너무도 단호한 로라의 태도에 내가 한 수 무르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 같은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내게도 항변할 구석은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뭐가 말인가요?”

    “로라. 모르는 척하지 마. 황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요 며칠 새 황궁이 시끄럽다 했더니, 마법을 이용해 들려오는 이야깃거리를 주워듣자 가관이었다.

    “제국에서 이름난 예술가들을 모조리 불러다 약혼식을 준비하게 만든다는 거 다 들었어. 화가에, 조각가에, 악기 연주자에…. 명단이 지나치게 호화스럽다고 경악하는 귀족들 소리까지 다 들리던걸.”

    ‘개중에는 나와 율리시즈의 결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고.’

    남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는 건 취미가 아니었지만, 불쾌한 소리를 들었을 땐 바로 그 못된 주둥이를 잡아채고 싶었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경지를 이룬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엄연히 남성이었으니까. 후계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국의 귀족들은 내게 큰 마이너스 점수를 매긴 모양이었다.

    게다가 율리시즈가 나 외엔 다른 어떤 비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점 때문에 더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젊고 유능한 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율리시즈를 일등 신랑감으로 여기고 제 딸을 붙여 보려던 속셈을 지닌 인간들이 수두룩했던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내가 버티고 있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악당처럼 씨익 웃고 있는 내게 로라가 타박하듯 말했다.

    “그러니 더욱 신경 써서 화려한 축하 파티를 열어야죠. 황제 폐하께서 대마법사님을 이만큼 신경 쓰시고 계시노라, 하고요.”

    “그건 당사자인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저도 알지만, 때로는 외부에 보이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뭐… 개인적인 사감으로는 세진 님이나 황제 폐하나 제겐 소중한 분들이시니 책잡히는 일 없이 해 두고 싶은 게 사실이지만요.”

    나이가 들어 슬슬 주름살이 올라온 로라가 개구쟁이처럼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그녀가 엿보여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내가 율리시즈와 함께하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어머, 괴물을 물리치시면서 열렬하게 고백하시고 청혼도 승낙하셨으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다정하고 푸근하던 로라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설마 내가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가늘게 눈을 뜨며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 엄포를 놨다.

    나 역시 율리시즈를 두고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내가 늙지를 않아서 그래. 내가 내 육신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윈터에게 들으니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 나는 줄곧 나이가 멈춘 채로 늙지를 않았다고 해서.”

    “…….”

    “율리시즈는 용혈을 무사히 각성해 일반인들보다는 오래 살 테지만…. 나보다 그 아이가 먼저 죽는다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율리시즈’가 남긴 유산인 드래곤 하트는 우리 둘 다 공평하게 나눠서 흡수했다.

    그러니 율리시즈의 정해진 수명은 나보다 짧을 터.

    나는 언젠가 혼자 남게 될 미래를 상상하면 무섭고 두려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를 구원해 주고 내 삶을 이어 나갈 용기를 준 이는 너인데.’

    그런 네가 없다면, 나는 더는 살고 싶지 않을 텐데.

    “정해진 끝이 무서워,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자, 잠시 정적이 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라는 세상 한심한 이를 쳐다본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세진 님, 몰랐는데 이렇게 겁쟁이실 줄이야.”

    “겁쟁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사실이 그러한걸.”

    로라가 내게 다가와 딱밤을 날렸다.

    “악! 무슨 짓이야!”

    “마법으로 막으실 수 있었을 텐데, 피하지 않고 맞으신 걸 보면 본인이 얼마나 약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신 거겠죠?”

    엄한 로라의 말에 내가 기가 죽어 우물거렸다.

    “그건….”

    “미리 걱정해서 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우울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로라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양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내게 훈계를 했다.

    “제가 만일 셀레스틴 폐하께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포기하려 했다면, 세진 님께선 제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겠죠. 세진 님께선 그때 율리시즈 님을 보호하려는 게 최우선이었으니까. 그 당시, 셀레스틴 황후 폐하와 제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해도 제게는 무척 큰 지원군이셨습니다.”

    20년 전의, 오래된 과거를 되짚는 로라의 눈은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아득했다.

    “절망에 빠질 뻔했던 저를 구해 주고 희망을 주신 건 세진 님이십니다.”

    “…나는 별로 한 게 없는걸. 일어설 계기를 준 건 맞다고 해도, 결국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건 로라 스스로의 용기야.”

    “그 계기가 중요했던 거랍니다. 저는 그때의 일로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는 속단하지 않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작게 콧노래를 부르는 로라는 마지막으로 내 눈동자 색과 같은 커프스단추를 끼웠다.

    “세진 님과 함께하는 나날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했으니까요. 아멜리아 공주님을 황제 폐하와 같이 모시게 된 것도, 카밀라 황비가 허망하게 가 버린 것도, 세드릭 황자가 저리 망가진 꼴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로라.”

    “아, 다 됐네요. 완벽합니다. 오늘 연회장에 모인 그 누구도 세진 님을 헐뜯지 못할 거예요.”

    로라가 나를 거울로 끌고 갔다. 투명한 거울 위로 비친 내 모습은 근사했다.

    하얀 정복 위로는 금사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황족만이 새길 수 있는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고, 평소 내가 입고 다니는 마법사로서의 정복을 의식한 것인지 화사한 하늘색의 띠도 둘려 있었다.

    머리는 반만 까서 곱게 빗어 넘겼는데,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인 탓에 내 모습인데도 그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훑어보며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어색해.”

    “잘 어울리기만 하시는걸요. 황제 폐하께서도 보시면 흡족해하실 게 분명합니다.”

    ‘유리, 걔는 내가 거적때기를 입고 와도 잘 어울린다고 박수를 칠 애인걸?’

    하지만 이런 말을 해 봤자 율리시즈의 이미지만 깎일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수석 시녀장님, 곧 약혼식이 시작될 예정이니 대마법사님을 모셔 오라는 황제 폐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바깥에서 다른 시종이 문을 두드리며 소식을 전했다. 로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차림새를 점검하고서는 보내 줬다.

    “오늘 최고로 멋지십니다.”

    “…고마워, 로라.”

    로라의 눈길에서 애정이 엿보였다.

    “두 분의 행복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요.”

    “……응. 고마워.”

    오래되고 깊은 애정을 마주한 나로서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 축복해 주는 건 몹시 기쁜 일이었으므로.

    문밖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윈터와 루나, 페른과 데이지가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윈터, 세진 님께선 시간에 맞춰 나오셨다. 너 자꾸 신경질 부릴래? 엄마는 너 버릇없이 키우질 않았다.”

    “맞아요. 패밀리어로서 주인님을 시집보내는 그 심정… 아주 복잡할 거라 이해는 가지만 자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윈터 님.”

    “어떻게 데이지 너마저!”

    “자, 자. 황제 폐하께서 약혼식장에서 먼저 도착하셔서 오늘의 주인공이신 세진 님을 목 빠지게 기다리실 테니 어서 가자고.”

    늘 그랬듯이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웬일로 페른이 중재자가 되어 나를 연회장까지 이끌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종알거리는 패밀리어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아 긴장이 풀어졌다.

    연회장의 문 앞에 선 순간, 시종이 우렁찬 목소리로 내 입장을 알렸다.

    “대마법사이신 세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거대하고 육중한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바로 앞에는 율리시즈가 찬란한 미소를 띤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전혀요, 스승님.”

    한쪽 무릎을 꿇고 얌전히 손을 내민 율리시즈는 황제로서는 몹시 낮은 자세를 취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표현하기 위해 취한 자세임을 알기에, 웃으며 율리시즈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결혼식은 제발 소박하게 하면 안 될까?”

    “스승님께서 원하신다면 둘만의 비밀 결혼식으로 할게요.”

    “…아니다. 그냥 적당한 규모로 하자.”

    어째 비밀스럽게 한다니까 더 걱정스러워졌다.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연회장의 가장 상석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우리를 쳐다봤다.

    어지러운 시선 속에서도 나를 붙잡은, 사랑하는 이의 온기만큼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사랑해요, 스승님.”

    “응. 나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율리시즈가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물론이야.”

    네게 아이를 줄 수는 없어도, 어쩌면 너를 내가 먼저 떠나보낼지도 모를 일이어도.

    너와 함께 걷는 생이라면 행복할 것만 같아서 괜찮았다.

    “평생을 영원히 함께할게.”

    용기를 내어 율리시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율리시즈는 무척 기뻐하며 내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화답했다.

    “제가 드릴 말씀이에요.”

    “어휴, 뜨겁다, 뜨거워.”

    두 번째 상석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이, 이것으로 약혼이 완료되었음을 알립니다!”

    아멜리아의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못 박듯이 우리의 약혼 사실을 알렸다.

    박수갈채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율리시즈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응? 사전에 이런 논의는 없었는데?’

    뭘 말할지 궁금해하며 모두가 율리시즈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다들 우리의 후계에 대해서 걱정할 것을 안다. 미리 말했듯이, 나는 세진 님 외의 다른 이를 비로 들이지 않을 생각이나… 황족의 계보는 이어야 하기에, 묘안을 떠올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한 귀족이 용기 있게 물었다. 그러자 율리시즈가 웃음기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다음 제위는 아멜리아 공주가 낳은 아이가 이을 것이다.”

    “!”

    “뭐라고? 나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멜리아는 기겁했고, 나도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더는 뒤로 이상한 협잡질 따위를 논의하지 말도록.”

    율리시즈는 마지막까지 폭탄선언을 날리고서 나를 꼭 껴안았다.

    “저 잘했죠, 스승님? 이제 귀찮은 소리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하하.”

    그래. 너와 함께 살아간다면 이런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누릴 수 있겠지. 그건 제법 괜찮은 일일 거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경쾌한 연주곡이 시작됐다.

    다가올 미래가 전혀 두렵지 않은, 우리의 즐겁고도 평온한 날의 시작이었다.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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