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세드릭의 죽음은 율리시즈가 공표했다.
황궁의 시종들은 약혼 파티를 먼저 치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세드릭의 장례 겸 그의 죽음을 발표하고 쥐새끼들을 색출하는 게 더 시급했다.
거대한 홀에 귀족들을 모아 놓고 눈부신 황관을 쓴 채 율리시즈가 선언했다.
“폐황자 세드릭은 지난번 황궁에 들이닥쳤던 거대한 뱀에게 살해당했다.”
나와 아멜리아, 율리시즈 셋은 세드릭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황실에 그다지 애정은 없지만, 세드릭이 일으킨 반역으로 인해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사실이야.”
아멜리아가 어느새 말끔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확실히, 세드릭 그 녀석은 죽어서도 골치 아픈 놈이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드릭의 어머니인 카밀라가 무슨 짓을 벌여 뱀을 소환했는지를 알게 되면, 그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황실의 권위도 바닥으로 추락하겠지.”
마법도 아니고 주술을 사용한 결과라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주변 국들에게도 빈축을 사게 될 터였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여 그 생명력으로 거대한 힘을 가진 무언가를 불러내는 주술이라니.’
이 사실이 퍼진다면 카밀라 휘하에 있다가 실종되거나 시신으로 발견된 시종, 시녀들의 유족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가 향할 가해자들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니, 갈 곳을 잃은 화살은 율리시즈를 향해 쏘아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율리시즈가 적법한 황제로서 무탈히 제국을 통치하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진실은 반만 보여 주기로 했다.
폐황자 세드릭의 죽음을 알리는 자리에서, 율리시즈는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더 풀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니 누구나 알면서도 쉬쉬한 이야기라는 말이 더 맞겠군. 폐황자 세드릭의 어머니인 카밀라 황비는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사람이었다.”
이거야 익히 알려진 이야기니 귀족들이 놀라지는 않았지만, 메인 디쉬는 그다음이었다.
“카밀라 황비는 이에 그치지 않고, 결국 자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시녀나 시종들을 죽을 때까지 때리는 악질적인 습관을 갖고 있었지. 황비의 무도한 폭력으로 죽어 나간 시신만 여러 구다.”
“…….”
“짐의 목을 노리고 일으킨 반란에서 그 증거를 확보했다. 이에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폐황자 세드릭은 제 어머니의 치부를 감추고자 짐을 해하려 했던 것이지.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스승님께서 조사 차 들린 마을의 동굴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
율리시즈가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꿰어 만든 이야기는 이랬다.
동굴에서 숨어 살던 폐황자 세드릭은 어느 날 ‘우연히도’ 동굴 안에 잠들어 있던 거대하고 사악한 ‘악’ 그 자체인 뱀을 깨웠다.
세드릭은 그 뱀의 강함을 깨닫고 이용하려 했으나, 뱀이 몹시 영악하고 잔악하여 말을 들어 주는 척 불공정한 계약을 맺어 버렸다.
맺는 순간부터 서서히 이지를 잃고 죽어 가는 계약을.
그것을 몰랐던 어리석은 세드릭은 이리저리 뱀에게 이용당하다가 끝내 처참한 몰골로 황제군에게 발견되어 황궁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단 이야기였다.
진짜 위험한 요소들만 쏙 뺀 희멀건 된장국 같은 이야기였지만, 이조차도 귀족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는지 다들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나는 율리시즈가 마련해 준 특급 상석에 아멜리아와 함께 앉아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어느 놈이 반역에 참여한 나쁜 놈인지를 추려 냈다.
“가일 남작. 이 사람은 영지민들의 고혈을 쥐어 짜낸 세금을 세드릭 뒤에 찔러 줬고.”
“모든 재산 몰수에 유배 확정.”
“바이룬 백작 부인. 사교계에서 절제와 순결을 미덕으로 치며 고고하게 자기만의 세력을 형성한 사람이지만, 사실 세드릭과 카밀라 모자에게 새로운 정부를 주기적으로 소개시켜 주는 뚜쟁이 노릇을 했지. 수입이 쏠쏠해 유리나 아멜 너에게도 접근하려는 것 같은데, 절대 안 될 말이야.”
“줘도 안 가져요. 이 사람도 재산 몰수에 유배 확정. 작위도 회수.”
“남편 작위는?”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이혼할 거냐고 묻고 백작 부인의 작위만 회수하도록 하죠.”
“좋아.”
나와 아멜리아는 율리시즈가 직접 만들어 준 귀족 명단 자료집을 보며 살생부를 적어 나갔다.
거기엔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왜 쫓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다 적혀 있었다.
“무서운 오라버니…. 바빠 죽을 맛이었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만들었대.”
아멜리아는 율리시즈의 일 처리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빈틈없이 부패한 귀족들을 감시하고 있었단 사실에 소름 끼쳐 했다.
나야 뭐. 옛날부터 예상했던 그대로 철두철미한 성군의 모습이 되어 가는 게 보여서 뿌듯했다.
‘정말 다 컸구나.’
제자의 듬직한 모습에 뿌듯하기만 했다.
아멜리아와 나는 열심히 어느 귀족놈을 쳐내야 하는지 자료와 최근 행적을 보고 면밀히 따져 반역에 개입했던 인간들을 하나하나 걸러 냈다.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세드릭이 입을 나불거리기 전에 죽어서 다행이라 여긴 놈들의 뒤통수를 쳐 낼 기회였으니까.
우리가 다 정리한 살생부를 넘기자, 율리시즈는 그걸 거뜬히 한 손으로 들어 낭랑한 목소리로 명단을 읊었다.
“이 명단이 무엇인지 알겠나?”
“자,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불쌍하게 죽은 내 이복동생인 세드릭의 반역에 찬성한 사람들의 목록이라네.”
“……!”
율리시즈의 말에 몇몇 귀족들의 인상이 새파래졌다.
어느 귀족들은 눈치를 챘는지 체면조차 챙기지 못하고 뒤로 돌아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이상은 나가실 수 없다는 폐하의 엄명이십니다.”
“뭐라고?”
“내가 누군질 알고! 어서 비켜!”
“억지로 길을 열고 나가시려 한다면 그때는 죽여도 좋다는 황명 역시 계셨습니다.”
“…….”
“…….”
갓 즉위해 세상 물정을 잘 모를 줄 알았던 애송이 황제가 아니었다.
율리시즈는 이미 어릴 적부터 제왕학을 비롯한 웬만한 학문들은 다 독파했다. 책으로부터 익힌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체스판 위의 말처럼 굴리는 건 그에겐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군주에게는 적당한 잔혹함도 때로는 지배를 위해선 필요했기에, 자비 없는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반역도들은 꼬리를 내리고 항복했다.
“…목숨만 살려 주시옵소서.”
반역의 죄는 3대가 멸할 대죄였다.
사형이 내려질 것을 두려워하던 반역도들은 팔다리가 결박된 상태로 율리시즈 앞에 끌려갔다.
“사, 살려 주십시오, 폐하. 뭐든지 다 하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아, 아니. 제 가족만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그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목숨을 구걸했다. 누군가는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죽은 황비와 어리석은 폐황자를 침이 튀도록 욕하기도 했다.
나는 그 진풍경을 보며 뱀이 내게 보여 준 원작이 현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면 나라가 도대체 얼마나 개판이 되었을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율리시즈는 참으로 자비롭게도 그 무도한 인간들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단, 너희의 귀족 작위 및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를 몰수하여 사회에 환원토록 하겠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저희는 이제 뭘 먹고 살란 말입니까?”
날 때부터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죽을 줄 안 인간들이 성을 냈다.
율리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으로 단상을 내리친 다음 조용해지자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단상 위에는 일부러 찍어 둔 것처럼 선명한 손 모양이 남은 채였다.
“그럼 목숨값이 쌀 줄 알았나? 감히 이 나라의 황제인 나를 죽이려 하고도 뻔뻔하게 협상하려 드는 배짱은 칭찬해 줄 만하군. 재산을 넘기고 싶지 않다면 그대들의 모가지로 대신해 줘도 좋아.”
사실 율리시즈는 쓸데없이 부패한 관리들의 뒤룩뒤룩한 모가지를 자르는 것보다 그들의 재산을 털어 황비와 세드릭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시종이나 시녀들을 위한 보상금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어차피 그들의 모가지를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그의 말을 참으로 믿은 귀족들은 미래가 암담하기만 했다.
“…어찌 재물이 목숨보다 귀하겠습니까. 삶을 잇게 해 주신 은혜에 감읍하며 살겠습니다.”
반강제에 가까운 명령에 결국 반역자들의 잔당은 굴복했다.
율리시즈는 짭짤한 수익에 기분이 몹시 좋아졌고, 그 금액은 황비와 세드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진실을 은폐한 값을 더 얹어 피해 보상금을 주는 것이었지만, 진상을 알지 못하는 피해자의 유족들은 새로 즉위한 황제의 인심에 감사해했다.
물론, 안타깝고 가여운 최후를 맞이했다 해서 세드릭과 카밀라 모자의 죄를 완전히 덮어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의 진상은 기록을 통해 후세에도 널리 전해질 수 있도록 꼼꼼하게 사관을 통해 적어 두도록 했다.
그리고 카밀라 황비와 세드릭 폐황자는 모두 황족의 계보에서 내쫓아, 묘지도 황족들이 묻히는 곳이 아니라 평민으로서 어느 산골짜기에 묘를 이장시켰다.
죽은 이후의 처벌이라 내겐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이게 더 무겁고 끔찍한 사회적 말살쯤으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유족들도 만족한 결과가 나왔고, 반역도 잔당들도 줄줄이 굴비 꿰듯이 유배를 보냈으니 이제 남은 건… 나와 율리시즈의 결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