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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87화 (87/90)

87.

“대연회장을 광이 나게 닦고 악단을 불러야겠군요. 급한 초대는 예의가 아니지만 오늘은 예외적이니 다른 귀족들도 서둘러 입궁하라는 초대장을 보내야겠어요.”

“그렇게까지 크게 해야 해?”

“해야 합니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 아직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황제 폐하께서도 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럼 해야지.”

우리 율리시즈 하고 싶은 거 다 해.

로라가 괜히 율리시즈를 핑계 삼아 갖다 붙이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하고 싶을 거란 이야기를 들으니 귀가 쫑긋해졌다.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잠깐만. 그거 유리한테 결재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나한테…?”

“자! 여러분! 들으셨죠? 다가올 대연회를 우리가 최고로 멋지게 장식해야만 합니다.”

“알겠습니다, 수석 시녀장님!”

의아했지만 쏜살같이 달려가는 로라를 잡아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뒤를 양 떼처럼 따라가는 시종들 무리도. 다 치료해 줬더니 쌩쌩해져서는 언제 다쳤냐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대단했다.

‘뭔가 찜찜한데….’

공개 고백에 이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나는 애써 그걸 무시했다.

“우선은 쉬러 가 볼까….”

오랜 악연을 끊어 냈더니 온몸에 피로가 가득했다.

뻐근한 어깨와 목을 뚜둑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니, 완전히 물러간 줄 알았던 윈터와 루나, 페른과 데이지가 다시 내 옆으로 슬그머니 나타났다.

물론 페른은 데이지가 아예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밧줄로 꽁꽁 묶어 쓸데없는 소리를 원천 차단 한 채였다.

“…꼴이 그게 뭐야.”

“으으읍(이것 좀 풀어 주세요!)”

이상하네. 말을 못 하는 상태인데 뭐라고 하는지 너무 선명하게 들리네.

눈을 들어 자그마한 눈의 요정 같은 귀여운 햄스터 패밀리어 데이지를 응시하자, 데이지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두시지요, 세진 님.”

“그래.”

“으으읍! 으읍!(세진 님! 배신자!)”

페른이 틀어막힌 입으로 뭐라고 항의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페른은 좀 입을 막고 조용히 있을 필요가 좀 있었다.

‘졸려…….’

꾸벅꾸벅 감기는 눈꺼풀을 비비는 내 옆으로 윈터와 루나 모자가 다가왔다.

“주인님, 이제 다 끝났으니 푹 쉬러 가시죠.”

“그래요.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하지만, 저주로 인해 한 번 부서졌다가 도로 원상 복구 된 몸이니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다 나았는데도 안 좋단 말이야?”

내 질문에 루나가 짐짓 엄한 눈빛으로 나를 꾸짖었다.

“사람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답니다, 세진 님. 요 며칠 새 일어난 경험만으로도 세진 님의 몸에는 과부하가 걸렸을 텐데, 그걸 정신력으로 꾸역꾸역 이겨 내고 있다가 긴장이 풀리니 잠으로 피로를 해소하려고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자, 어서 가서 침대에 몸을 뉘고 주무시지요.”

“그럴까.”

굳이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뱀을 물리친 순간 너무나도 피곤했으므로.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고 싶었다. 당장 급한 복구 작업도 전부 마법으로 끝냈으니 문제 될 것도 없으리라.

“지금 눈이 졸음에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입니다. 어서 방으로 가시죠.”

“응…….”

윈터가 쯧쯧 혀를 차며 나를 부축했다. 부양 마법을 사용해 내 몸을 띄워 포털을 통해 내 방으로 이동했다.

내가 비척비척 걸어 침대 위에 엎어지니, 두 마리의 페럿들은 그런 나를 불쌍히 여겨 두툼한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주고 토닥였다.

“쉬세요, 세진 님.”

“응….”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꾸는 단잠이었다.

***

“스승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율리시즈가 곁에서 보랏빛 눈을 초롱초롱 뜬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 얼마나 잤어?”

“얼마 안 주무셨어요.”

“윈터. 나 얼마나 잔 거야?”

“꼬박 이틀은 주무셨습니다.”

“진짜?”

“네. 중간에 깨워서 식사를 드시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어머니께 여쭤봤는데, 일시적인 피로 누적 때문이니 내버려 두는 게 최고라고 그러시더군요.”

루나가 내린 처방이라면 믿을 만했다. 나는 주린 배를 쥐고 율리시즈를 맞이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율리시즈는 먹기 좋은 부드러운 식감의 과일을 손수 과도로 깎아서 내게 건넸다. 황제가 직접 깎아 주는 과일이라니. 무척 호사스러웠지만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맛이라 주는 대로 먹어 치웠다. 율리시즈는 아기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새처럼 내게 한 입 한 입 포크로 찔러 먹여 줬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도 모르게 뭐라고 이의를 걸지 못하고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다.

“언제 왔어?”

복숭아를 우물거리며 묻자 율리시즈가 해맑게 웃었다.

“방금요.”

그럴 리가 없는데.

방금 전에도 거짓말한 전적을 보아하니, 윈터의 말을 듣는 게 더 정확도가 높을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윈터가 볼을 부풀리고 사실을 털어놨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폐하. 자그마치 7시간 동안을 거기서 붙박인 채로 주인님 얼굴 감상만 했다는 거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만.”

윈터가 질린 눈으로 율리시즈를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율리시즈를 어릴 때부터 돌봐 온 존재 중 한 명이 저렇게 애를 징그럽다는 듯이 흘겨보니 내 속이 좋지 않았다.

“윈터, 왜 유리한테 성질을 부려.”

“주인님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해 봤자 갓 이어진 연인 사이에서 훼방꾼 역할이나 맡겠죠. 흥!”

내 말에 윈터는 서운한 듯이 꼬리를 부풀렸다. 우리 사이에 있기 불편했는지 냉큼 방을 나가는 건 기본이었다.

반면 율리시즈는 히죽거리며 내 침대맡에서 가르릉 소리까지 내면서 머리카락을 더 쓰다듬어 달라 보챘다. 이게 고양인지, 사람인지.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멍한 상태의 나는 기계적으로 율리시즈의 금빛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세드릭의 일은 잘 해결됐어?”

“네.”

깔끔하게 단답을 내미는 율리시즈의 뒤로 문이 열리며 엘리엇이 들어왔다.

“저희 측에서 볼 땐 잘된 일이지만, 아마 이미 죽어 지옥에 가 있을 카밀라 황비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겁니다.”

“엘리엇! 잘 다녀왔어요?”

“물론입니다, 세진 님.”

‘엇. 그러고 보니….’

다들 나를 세진 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클로드 하센티온이란 이름이 아니라.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하니 엘리엇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진 님의 진짜 이름을 들었으니 그 호칭으로 불러야 마땅하지요.”

“…고마워요.”

“감사는 제가 아니라 세진 님 스스로에게 돌리셔야지요. 가짜를 물리치고 본래 누렸어야 할 운명과 육신을 되찾으신 것 아니십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냥한 말에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불을 손에 쥐고 꼼지락대고 있으니 윈터가 종종 달려와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똬리를 틀었다.

“피델리움 후작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주인님께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못되고 사악한 것을 내쫓으셨으니 어깨에 힘을 더 주십시오.”

“나간 거 아니었어?”

“흥. 늑대 같은 황제 폐하가 주인님 곁에 있는 게 불안해서 온 겁니다. 저는 주인님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새하얀 눈 같은 순수한 주인님께서는 나중에 아셔도 됩니다.”

저기. 나 이미 율리시즈랑 입 맞췄는데.

‘그리고 다들 보지 않았나. 뱀이 황궁을 다 무너뜨려서 전부 훤히 보였을 텐데…….’

그런데도 이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윈터를 보니, 꼭 딸을 내줄 수 없다고 이를 가는 부모님 같았다.

“윈터, 나 알 거 다 알아.”

“뭐, 뭘 다 압니까!”

내 보호자처럼 가슴팍에 힘을 팍 주고 있던 작은 페럿이 당황해 도로 쪼르르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율리시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무릎 위로 제 머리를 얹고 골골거렸다.

“스승님, 윈터만 보지 마시고 저한테도 관심 가져 주세요.”

“아까부터 머리 쓰다듬으면서 충분히 관심 가져 줬는데.”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더 많은 사랑을 원해요.”

“허허, 허허허.”

냉철하고 이성적이던 손자 율리시즈가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엘리엇은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아… 미안합니다, 엘리엇. 손주며느리가 저라서.

“두 분께서 행복하시다면야 좋은 일이죠.”

엘리엇이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 둘을 굉장히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몹시 부담스러워졌다.

“율리시즈, 세드릭은 어떻게 되었어?”

그래서 재빨리 화제를 전환해 세드릭의 일을 캐물으니, 율리시즈가 순순히 답했다.

“아, 그 녀석이라면… 살아는 있어요.”

“이런.”

“스승님의 말씀대로 숨만 붙어 있더라고요, 그 녀석. 아직 사람의 형태는 간신히 유지하고 있긴 한데… 황궁 마법사의 말로는 아마 얼마 못 가 육신도 붕괴될 거랍니다. 인간이 지녀야 할 영혼이 이미 많이 손상된 상태라 육신도 그걸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거라고 하더군요.”

“역시, 그렇게 되었구나.”

세드릭의 몸은 여름날 더위로 인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무너질 것이다.

마법을 통해 들여다본 그의 영혼의 손실은 심각했으니까. 반절이 넘게 뱀에게 흡수당한 자아는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내게 구조 요청을 한 게 기적이었지.

“제가 세드릭을 발견할 적엔 이미 인간으로서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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