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내가 연 차원이동용 포털이 마치 블랙홀처럼 뱀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닥치라는 소리만 반복하던 뱀은 강하게 끌어당기는 포털의 힘에 의해 퍼득 정신을 차렸다.
“시… 싫어…!”
뱀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차원이동용 포털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무용한 짓이었다.
이전보다 강해지고 튼튼해진 내가 건 마법 주문은 이 세계에서 절대적이었고, 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력해진 뱀이 그걸 뚫을 방법은 전무했다.
“싫어, 싫다고! 하찮은 존재로 몇 번이나 환생을 거듭하며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뱀은 날카로운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이 피가 날 때까지 바닥을 긁었다.
바닥에 딱 달라붙었지만 포털의 힘에 저항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블랙홀과 같은 포털이 뱀을 청소기처럼 쭉쭉 끌어당겼다.
“싫어! 싫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뱀은 질겁했다.
흙바닥 위를 질질 끌려가는 소리가 나더니, 뱀의 손에 힘이 빠지자 포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력하게 빨아들였다.
“싫어어어어…!”
발이, 다리가, 몸통이, 머리까지 순차적으로 포털 속으로 끌려갔다.
뱀의 손가락 끝까지 야무지게 먹어 치운 포털은 이내 닫혔다.
뱀이 떠난 자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질질 끌려가면서 남긴 손톱자국과 핏자국만이 뱀이 이 세상에 있었음을 마지막으로 증명해 주는 증거였다.
나는 그걸 발로 짓밟아 지워 버렸다.
놈의 흔적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와 율리시즈가 행복하게 지낼 미래엔 어떤 그늘도 드리워지지 않도록,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니.
그렇게 다짐하며 율리시즈를 바라보자, 자색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우리 사이를 방해하던 가장 큰 요소인 뱀을 내가 이 세상에서 추방했으니, 또 낯간지러운 말, 혹은 농담이나 할 줄 알았는데.
“스승님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예상과 달리, 율리시즈는 눈시울을 붉히며 진지한 감정을 표현했다.
나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커진, 내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스승님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그늘을 걷어 내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었는걸.”
내가 율리시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허무하게 생을 포기했더라면 절대 얻을 수 없었던 값진 현재였다.
율리시즈가 나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나를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율리시즈’들이 해피 엔딩으로 향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오늘은 계속 먹구름이 낀 흐린 하늘이었을 것이다.
“고마워.”
이 세상에 존재해 줘서.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으려 애써 줘서.
그리고 나를 사랑해 줘서.
“저야말로 감사해요, 스승님. 제 마음을 받아들여 주셔서. 그리고 언제나처럼 저를 지켜 주려고 하셔서요.”
개구쟁이처럼 씩 웃는 율리시즈의 모습이 너무나 환해서, 나는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윈터가 끼어들었다.
“크흠흠! 주인님, 막 결혼을 전제로 사귀게 된 황제 폐하와의 사이가 돈독한 건… 끄응, 축하드릴 일이지만 그것보다 우선 처리해야 할 건이 있지 않을까요.”
“윈터.”
율리시즈가 한창 분위기 좋을 때 끼어든 페럿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으나 윈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선 황궁이… 그 뱀 새끼 때문에 난리통이 되었으니 복구가 시급합니다. 또한 그 전에, 제 주인님께서 갇혀 계셨던 동굴에서 발견된 세드릭 폐황자의 처분도 결정해야 하고요.”
“그건 그렇지.”
‘순간적으로 키스할 뻔했잖아.’
주책맞게. 뱀도 처리했으니 이제 황궁 사람들만 다 지켜보는 판인데 무슨 남사스러운 짓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걸 아는 건지, 이 요망한 제자 녀석은 입을 비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물론, 황제로서의 본분은 잊지 않고서.
“옳은 말이긴 해. 이 난장판을 어서 수습해야 다시 제국에 평화가 찾아오겠지.”
“주인님의 납치에 세드릭 폐황자의 실종, 그리고 뱀의 출현으로 인해 한창 뒤숭숭해졌으니까요.”
“이참에 잘됐어. 세드릭이 폐위되었다고는 하나 카밀라 황비를 지지했던 잔당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차였는데, 이참에 색출해서 제거하는 게 좋겠지.”
“그렇다면 황제 폐하, 어서 수습하러 이동하셔야지요?”
윈터가 약 올리듯이 율리시즈에게 깐족거렸다.
“윈터, 너 왜 그래?”
‘얘가 율리시즈에게 함부로 대하는 애가 아닌데?’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윈터는 로라와 더불어 나와 함께 어린 율리시즈를 키운 장본인으로서, 자식처럼 돌본 율리시즈에게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흥. 제가 뭘요?”
그런데 윈터의 지금 반응은 꼭… 딸이 신랑감을 데려왔을 때 아버지의 표정 같았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심술궂은 표정인 게 딱 그랬다. 꼬리나 털도 빳빳하게 선 게 영 아니올시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율리시즈한테 심술부리고 있잖아.”
“그럼 주인님을 홀라당 잡…아 가려는 사람에게 제가 화를 내지 뭘 내겠어요?”
율리시즈에게 사과하려던 말이 되려 윈터에겐 역정을 일으켰다.
까칠한 녀석이긴 해도 툴툴거리며 정을 제 주위 사람들에게 쏟던 윈터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다시 물었다.
“어… 윈터. 혹시 내가 율리시즈랑 결혼한다는 게 싫어?”
“…그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왜.”
내 질문에 윈터는 더 뾰로통해졌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님께서 진짜 황제 폐하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주인님을 완전히 빼앗기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이럴까요. 악!”
심란한 윈터의 뒷다리를 윈터의 어머니인 루나가 가격했다.
“아! 엄마! 왜 때리세요?!”
“쉿. 조용히 해라. 겨우 이어진 달콤한 연인 사이 깨 버리지 말고 분위기 파악이나 해.”
“엄마도 패밀리어로 근무한 시절이 있었으니 알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제 맘을 이해해 주진 못할망정….”
“응. 그래. 아들. 네 마음 다 이해하니까 지금은 비켜 주자?”
루나는 윈터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성난 아들을 질질 끌고 나갔다.
윈터가 계속 성질을 냈지만 딱, 하고 큰 소리가 난 이후에 조용해진 걸 보면 귀찮아진 루나가 아예 윈터를 기절시킨 듯했다.
페른과 데이지도, 윈터와 루나도 퇴장하자 나와 율리시즈 곁에는 로라와 엘리엇만이 남았다.
황제의 측근 시녀장인 로라와 피델리움 후작인 엘리엇은 황제인 율리시즈를 도와 난리가 난 황궁을 돌볼 의무가 있었기에, 눈치를 보며 우리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저…. 황제 폐하, 그리고 대마법사 세진 님?”
“어, 네.”
“막 이어졌으니 열렬히 불탈 시기인 건 알겠습니다만, 피해 복구와 세드릭 폐황자의 일에 조금만 집중해 주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나와 율리시즈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모두가 쳐다보는 개방된 장소에서 율리시즈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는 점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율리시즈는 나와 조금이라도 빨리 단둘이 되기 위해 얼른 일을 끝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역할을 분담했다.
“그렇다면 제가 황궁 쪽의 복구를 맡겠습니다.”
“나는 그럼 세드릭을 잡아 오도록 하지.”
나는 엉망이 된 황궁 보수를, 율리시즈는 병력을 이끌고 다시 동굴을 찾아 세드릭을 잡아 오는 일을 담당하기로 했다.
“좋아. 로라는 스승님의 뒤를 따라 부상자들을 챙기고 치료해 줘.”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피델리움 후작은 나를 따라 세드릭을 생포하러 가지.”
율리시즈의 말에 엘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세드릭은 이제 폐황자의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거기에 얌전히 자숙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삿된 존재와 계약해 폐하와 대마법사님을 해하려 한 이인데 그래도 살려 두시겠다는 겁니까?
엘리엇은 드물게 노기를 띤 눈동자를 일렁였다.
그는 그의 딸이자 선대 황후였던 셀레스틴이 카밀라에 의해 살해당했던 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율리시즈를 세드릭이 해치려 작정했고, 실제로 위험에 빠뜨렸으니까.
옛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엘리엇의 스위치가 눌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지만, 세드릭은 카밀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엘리엇이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내가 자부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엇. 율리시즈가 병사들과 함께 세드릭을 발견할 즈음이면, 왜 유리가 그를 생포하라고 했는지 알 겁니다.”
“예? 그게 무슨…….”
“세드릭은 이미 뱀과의 거래를 통해 이미 정신이 한차례 붕괴됐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기적이었어요.”
나는 동굴 속에 붙잡혀 있을 때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던 망가진 세드릭을 기억했다.
“그렇다는 건….”
“세드릭은 곧… 아니, 어쩌면 이미 자아가 완전히 무너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에요. 이미 영혼이 부서져 껍데기만 덜렁 남은 허깨비가 되는 거죠.”
“…….”
“제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엘리엇. 율리시즈를 따라가세요. 아마 엉망진창이 되어 더는 사람조차 아니게 된 세드릭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윈프리드 제국에 몰아닥쳤던 사건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