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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83화 (83/90)
  • 83.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아 도망치려 하자 윈터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나를 한사코 뜯어말렸다.

    “안 됩니다, 세진 님! 저, 저 놈팽이는 확실히 처리하고 가셔야죠!”

    물론 거기에는 지고하신 황제 폐하 율리시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애는 다른 이유로 내가 텔레포트로 도망가는 걸 막았지만.

    “도망치시면 안 되죠, 스승님! 이대로 가시면 저한테 고백하셨던 일은 없던 걸로 무르실지도 모르잖아요!”

    “안 물러!”

    “그럼 왜 포털 열 준비를 하시는 거예요!”

    “…몰라!”

    “웬만한 건 다 아시는 스승님께서 자기 행동의 이유조차도 모르시다니요!”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지려고 그러냐. 제자라는 녀석이!”

    젠장. 왜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그거야 전 지금 스승님 앞에 한 사람의 남자로서 서 있는 거니까요.”

    율리시즈는 내 마법 술식을 완전히 파괴하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자기 무릎은 흙바닥에 굽힌 채로,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품에 마치 화사한 꽃다발이나 반짝거리는 반지를 담은 작은 보석함이라도 있는 것처럼, 몹시도 열렬하게.

    “스승님, 제 청혼을 받아들여 주신 것. 맞지요?”

    “…그래.”

    두 뺨이 화끈거렸지만 솔직한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청혼에 응하는 말이니까.

    주위에서 경악 어린 감탄사가 이어져 다시 도망칠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랬다가는 또다시 이 제멋대로인 황제 제자 녀석이 다시 파훼해 버릴 테니 소용없었다.

    구속당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바람피우면 죽여 버린다고 했잖아. 그거로는 부족했어?”

    공개 처형 좀 그만 시켜라, 이 자식아.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걸 겨우 참고 꺼낸 말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고 퉁명스럽기만 했다.

    내가 율리시즈였어도 무안했을 것 같아 손가락만 꼼질거리는데, 유리가 태양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을 밝게 비춰 주는 등불 같은 웃음이었다.

    “그럼 됐어요. 충분해요. 제게 그보다 더 확실한 청혼 승낙은 없을 테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난 율리시즈는, 황궁 온 구석에 다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시간부로 나,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와 대마법사이신 세진 님의 약혼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바이다!”

    확성기와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성량 증폭 마법을 쓴 것인지, 바로 옆에 서 있던 나는 고막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뱀과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황궁 사람들은 모두 얼음이 되었다.

    “여기서요?”

    “궁정 예법이고 절차고 하나도 거치지 않고 이 난리통에서 약혼을 했다고요…?”

    “황제 폐하. 제가 황제 폐하의 은덕에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기는 하오나 약혼반지도 없이 약혼했다고 소리치시는 건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만….”

    율리시즈를 향한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특히 이미 결혼해 유부녀, 유부남이 된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쏘아졌다.

    나야 이 난리통에서 약혼을 했다고 사랑하는 제자님께서 갑자기 외치니 어안이 벙벙했다.

    “유리! 내가 네 청혼을 승낙한 건 맞지만 갑자기 이런 식으로는…!”

    “스승님, 이거 받으세요.”

    “어?”

    “제가 너무 기뻐서 깜빡 잊어버릴 뻔했어요. 자, 스승님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날부터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던 반지예요.”

    율리시즈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건 작은 보석함이었다.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큼지막한 사파이어를 다이아몬드로 촘촘히 둘러싼 아름다운 반지가 드러났다.

    반지의 개수는 당연하게도 두 개로, 한 쌍이었다.

    “…제가 스승님의 손가락에 이 반지를 끼워도 될까요?”

    반지를 품은 보석함을 든 율리시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수전증도 없는 건강한 율리시즈가 손을 떠는 이유야 명확했다.

    “이 순간을 정말, 정말… 오래도록 기다려 왔어요.”

    율리시즈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촉촉해진 눈가를 보니 절로 손가락이 나가 닦아 주고 있었다.

    울면서 웃는 낯으로 율리시즈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저와 결혼해 주실래요, 스승님? 평생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왜일까. 율리시즈의 다소 일그러진 입꼬리를 보며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청혼하는 그의 얼굴 위로 ‘율리시즈’가 보여 준 사라진 시간선의 율리시즈가 전부 겹쳐 보였다.

    “사랑해요, 스승님.”

    ‘율리시즈’가 보여 준 기억에서나 봤던 그들은 나와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식받은 ‘율리시즈’의 드래곤 하트 때문인지 수백 명의 율리시즈가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꿈꿔 왔노라고.

    그리고 나 역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돌려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나도 사랑해.”

    세상 누구보다 너를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내 시야에는 오로지 율리시즈만이 보였다.

    다른 이의 어떤 소리도,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유리와 나 둘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존재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율리시즈를 힘껏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한 웃음기를 띠고서.

    “그래. 네 맘대로 해. 약혼이든 뭐든, 다 하자.”

    “정말이죠?”

    “나는 거짓말 안 해. 네 앞에서는.”

    쪽.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니 율리시즈의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방금 전까지 우렁차게 우리 약혼했다고 주장하던 인간은 어디 갔는지, 수줍어하는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거참, 내가 키웠지만 속을 모르겠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픽 실소가 나오는데, 율리시즈는 새빨개진 얼굴로 꿋꿋이 내게 반지를 내밀었다.

    “이거 끼면 무르기 없어요. 스승님 꼼짝없이 저랑 결혼하셔야 하는 거예요.”

    “누가 들으면 네가 억지로 너랑 결혼한다고 한 줄 알겠다. 잔말 말고 손가락에 반지나 끼워.”

    “끼울 거예요. 제가 사랑하는 스승님께 반지를 끼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가지 마세요!”

    황제인 너한테서 뭘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하겠니. 그랬다가는 목이 날아갈 텐데.

    실없는 농담이 생각났으나, 이를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틀림없이 유리가 질색할 것 같아 꾹 참았다.

    율리시즈는 섬세한 보석 세공 장인처럼 내 오른손을 살포시 붙잡고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내 대답을 듣지 못해 안달이 났던 방금 전의 태도와는 달리 반지를 끼우는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어 너무 느린 게 아니냐고 타박할 뻔했다.

    “됐어요!”

    타원형의 블루 사파이어 주위를 별처럼 에워싼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반사했다.

    내 손가락 사이즈는 언제 알아 갔는지, 반지는 내 손에 꼭 들어맞았다.

    “…예쁘다.”

    보석 같은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율리시즈가 내게 준 반지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예쁘죠? 스승님을 상징하는 색을 고심해서 골라 봤어요.”

    “내가 항상 하얗고 파란 옷만 입어서?”

    “네. 그래서 그런지 스승님은 항상 맑은 하늘 위를 떠도는 구름 같은 분이셨어요.”

    “낯간지러운 비유인데.”

    “스승님께서는 언제든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구셨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보이지 않을 구름처럼, 스승님께서 떠나실 것 같아 맘을 졸였어요.”

    “……그랬겠지.”

    율리시즈가 정확히 봤다. 유리가 어릴 때 나는 뱀과의 계약을 통해 죽지 못해 겨우 살아 있는 상태였으므로.

    미안함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해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들뜬 목소리로 율리시즈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드디어 구름을 붙잡았으니까요.”

    “…….”

    “제가 어릴 적 스승님께서 들려주신 동화 속 이야기처럼, 저는 따스한 태양이 되어 스승님을 붙잡을 수 있었어요.”

    그래, 그랬었지.

    율리시즈가 어렸을 적, 나는 유리와 아멜 두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준 적이 있었다.

    그 동화책은 지구에서 읽은 책을 바탕으로 내가 만들어 낸 이야기였다.

    누구나 아는 태양과 바람의 대결인, 나그네의 옷을 누가 먼저 벗기느냐에 대한 이야기.

    율리시즈는 그것을 인상 깊게 읽었는지 몇 번이고 그 책을 시간 날 때마다 다시 정독하곤 했는데, 나를 대입해서 생각할 줄은 몰랐다.

    율리시즈의 태양과도 같은 찬란한 금발이 보석처럼 빛났다.

    “사랑해요, 스승님. 제 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제까지나, 제 마음은 스승님을 향해 있을 거예요.”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내게 사랑한다 말하는 율리시즈는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나도 그래.”

    너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어.

    솔직한 고백에 율리시즈의 표정 속에 행복이 깃드는 게 보였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유일할, 하나뿐인 나의 연인.’

    살아 있어서, 살아남아서 기뻤다.

    너의 사랑한단 말에 나 또한 사랑한다고 답해 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사랑해, 율리시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력해진 뱀이 무어라 욕설을 지껄이는 게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게는 사랑하는 네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듣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율리시즈의 손을 끌어 남은 반지 한 개를 그의 약지에 끼웠다.

    “[색상, 형질 변환.]”

    내 마법으로 인해 파랗던 사파이어는 옐로우 다이아몬드로, 투명하던 다이아몬드는 자수정으로 변했다.

    율리시즈의 오른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물었다.

    “네 색으로 물들여 봤는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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