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저주를 완성했으니, 더는 뱀에게 볼일 없었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진창을 구를 테니.
“[속박을 해제하라.]”
나는 뱀의 시끄러운 입을 틀어막던 속박 주문을 풀고,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으드득. 으득.
뱀이 제 몸의 관절을 꺾어 가며 영혼까지 새겨진 낙인의 고통에 괴로워했다. 게거품을 물며 경련하는 걸 보니 저주의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유리, 나 좀 잡아 줘.”
“네!”
가속 마법을 내 몸에 걸어 재빠르게 뒤로 이동한 걸, 율리시즈가 가뿐히 받아 줬다.
나를 품에 안은 율리시즈는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비며 행복해했다.
“스승님, 제가 스승님을 받아 낼 줄 아시고 일부러 가속 마법을 건 것이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좌표 설정을 하실 분이 아니시잖아요. 단거리 텔레포트를 쓰면 쓰셨지.”
“…그래.”
“음? 뭐라고요? 작아서 잘 안 들리네요.”
헤실거리며 웃는 꼴이 어쩐지 보기 민망할 만큼 밝았다.
“…너를 믿고 무작정 가속 마법을 건 게 맞다고. 너라면 절대 나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말을 마치고 나니 얼굴이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율리시즈에 대한 사랑도 깨달았겠다,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게 옳다고 여겨 입을 연 것이긴 했지만….
이런 식의 노골적인 애정 확인을 내 입으로 하니 역시 부끄러웠다.
“…….”
반면, 율리시즈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날 붙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율리시즈?”
아무 반응이 없자 그건 그거대로 속이 상해 눈앞에 손을 흔들며 반응을 재촉하자, 율리시즈가 홍당무가 된 얼굴로 앓는 소리를 냈다.
“…스승님.”
“왜.”
“그 말씀은, 제가 스승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신다는 거죠?”
“…여기까지 와서 무얼 굳이 물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이제 와서 네 사랑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
네가 나를 구했는데.
죽음을 갈망하던 나를 네가 구원해 줬는데.
‘이런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누굴 사랑하겠어.’
한때는 오만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린 너를 보호하며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 너는 내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것이라고.
내가 너를 구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사랑으로 오인한 것이 아니겠냐고.
하지만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내가 틀렸다고.
‘구해진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음을.’
네가 내게 준 사랑으로 공허하던 나의 삶은 여백 없이 꽉 채워졌음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였다.
율리시즈의 멱살을 붙들고, 내 쪽으로 끌어당겨 불현듯 입을 맞춘 것은.
짧은 입맞춤이었고, 새가 부리를 쪼는 듯한 움직임에 가까웠지만 입술이 닿은 부분만은 생생한 감촉이 남았다.
“…나도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있으니까.”
“…어?”
율리시즈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얼빠진 표정조차 사랑스러워서 재차 입을 맞췄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는 길었다. 말랑한 입술이 겹쳐지며 문질러지는 감촉이 생생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돌처럼 굳어 있던 율리시즈는 눈만 깜빡거리다 다급히 내 입맞춤에 화답했다. 서툴지만 열렬한 반응에 나 역시 눈을 감고 이 시간을 마음속에 박제했다.
율리시즈가 나사 빠진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건 덤이었다.
“끄흡, 스승님. 제가 평생 잘할게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드릴게요. 스승님은 몸만 오시면 돼요.”
“…청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너랑 결혼하겠다고 한 말 아니다.”
“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신다면서요! 그게 어떻게 청혼이 아니에요! 지금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겁니까!”
엉엉. 훌쩍거리며 다시 입술을 겹쳐 오는 율리시즈의 모습에 결국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난 발언권도 없다는 거냐? 난 너를 폭군으로 기르지 않았는데.”
“몰라요, 그런 거……. 그리고 스승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얼마든지 폭군이 될 수 있어요.”
“그건 안 될 말이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아요! 문자 그대로 듣지 마시고… 아무튼, 아까 하신 말씀은 철회 불가능이에요.”
율리시즈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 허리를 잡아끌어 자기 몸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평생 놓지 않을 거예요.”
단단히 굳은 결심이 선 율리시즈가 나를 꼭 안고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착 달라붙었다. 근력 증강 강화 마법을 써도 안 떨어지는 걸 보니 알겠다고 할 때까지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을 모양이었다.
“누가 할 소리를….”
“어?”
나로서는 반가운 소리였다.
기억할 수도 없는, 사라진 시간선의 모든 평생을 나를 찾는 데 바친 사랑스러운 연인을 내가 놓칠 수 있겠는가.
내게 질려서 도망치려고 하면 나야말로 율리시즈를 붙잡아 내 옆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스스로도 몰랐던 내 안의 소유욕이 뭉게뭉게 솟아올라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 그럼?”
율리시즈가 잔뜩 긴장하면서도 기대하는 표정으로 얌전히 내 말을 기다렸다.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나만 바라봐야 해.”
“그건 너무 당연한 소리인데요.”
“바람피우면 죽여 버릴 거야.”
“그딴 짓을 저지르는 새끼는 제가 아니에요. 그건 가짜죠. 잡아다가 능지처참을 시켜야….”
“사랑해.”
“네, 저도… 어?”
반사적으로 사랑한다 말하는 율리시즈가 귀여워 나는 다시 입을 맞췄다.
“사랑해.”
“저, 저도요.”
율리시즈가 눈가를 붉히며 또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유리는 날 짜부러뜨릴 듯이 꽉 끌어안고는 울고 웃었다.
“사랑해요, 스승님.”
“나도.”
“아무것도 없던 제 곁을 지켜 주셔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아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할 말인걸.”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언제나 나를 찾아 헤매던 너에 비할까.
나를 향한 네 애정의 깊이가 너무도 깊어 그걸 지금부터 채운다고 해도 다 메꿀 수 있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끄으으으….”
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뱀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이마를 맞대고서, 우리는 기어이 찾아낸 평온한 결말에 기쁨을 표했다.
‘고마워.’
우리를 살려 준 ‘율리시즈’의 희생을 잊지 않으면서.
율리시즈가 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끌어안고 헤벌쭉 입을 벌리며 좋아하는데, 뒤에서 조심스럽게 윈터가 우리에게 물었다.
“저… 그럼….”
“응?”
“알콩달콩한 와중에 실례지만, 저건 어떻게 되는 거죠?”
윈터가 땅바닥에서 뒹구는 뱀을 가리켰다.
“으… 으으… 주, 죽여 줘….”
내 저주 마법으로 인해 가졌던 모든 힘을 잃은 뱀은 그 후유증으로 육신이 무너져 몇 차례나 허물을 벗은 뒤였다.
호리호리하고도 키가 컸던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작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내게 죽여 달라 청하고 있었다.
나는 율리시즈에게 껴안긴 채로 그 뱀에게 다가갔다.
“그건 안 돼.”
“어째서…?”
“너는 대가를 모두 치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어. 끝없는 환생을 반복하며 모든 일생에서 우리가 겪은 비참한 생을 네가 똑같이 겪지 않는 한, 너는 못 죽어.”
자살은 허용치 않았다. 뱀이 끝내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신의 인생을 저버리고 도망치도록 둘 수는 없었으니까.
“시, 싫어…. 제발 나 좀 죽여 줘…! 이딴, 이딴 하찮은 모습으로는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죽여 줘…. 죽여 달란 말이야….”
관절이 꺾인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내게 자비를 구걸하는 뱀은… 설아를 잃었을 때의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뱀에게 베풀 동정 따위는 없었다.
“닥쳐.”
“제발….”
더러워진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걸, 율리시즈가 거칠게 쳐 냈다.
“어딜 감히 내 스승님께 손을 대려고 해?”
“아….”
‘내 스승님이라니.’
사랑 고백 좀 들었다고 벌써부터 나한테 소유격이나 붙이면서 침 바르기냐?
망연해하는 뱀 앞에서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율리시즈를 가볍게 한 대 쳤다.
율리시즈는 억울해했다.
“아야, 왜요! 스승님도 좋으시면서!”
“…적당히 해라.”
“왜요! 스승님이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기념비적인 날인데! 이 소식을 제국 전체에 퍼뜨려야만 마땅…”
“뒤에 사람들 있습니다만….”
윈터가 난처한 기색으로 황제인 율리시즈의 말을 잘랐다. 도저히 눈꼴시어서 못 봐 주겠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익지도 않아 떫은 감을 먹더래도 저런 표정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체통 좀 지키십시오, 황제 폐하…. 다들 두 분께 주목해서 입방아를 찧느라 정신없습니다.”
윈터의 말에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우리의 염병 떠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궁 사람들이 재빨리 등을 돌렸다.
“커흠, 험.”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지요.”
“예. 저희는 그냥 움직이는 벽 정도라 여기시고 하실 말씀 다 나누시옵소서.”
“아니, 적을 물리치셔서 기분 좋은 건 아시겠는데 왜 이런 옆구리 시리는 풍경을… 악!”
“제 멍청한 주인님이 하시는 말씀 신경 쓰시지 마시고 마저 남은 이야기 나누시지요. 주인님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데이지! 너! 읍읍!”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작은 햄스터 데이지가 제 주인인 페른을 끌고 나가면서 조용해졌다.
어쩐지 다들 응원해 주는 분위기에 나는 부끄러워져 율리시즈의 품 속에서 빠져나왔다.
율리시즈는 다시 울상이 되었다.
“스승님! 어딜 가세요!”
“…잠시만 떨어져 있어 봐.”
‘내가 공개 고백을 하다니….’
뒤늦게 찾아오는 수치스러움이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