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들 소란이지? 황궁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건가?”
아멜리아도 방금 전 황궁의 지축을 울린 큰 소음을 들었다. 해서 달려온 시종에게 물었더니, 그 대답이 가관이었다.
“바, 밖에 거대한 뱀이 나타났습니다.”
“뱀이?”
“우리가 익히 아는 보통 크기의 뱀이 아닙니다. 황궁을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뱀입니다…!”
“뭐라고?”
놀란 아멜리아가 급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확인하자, 과연 새까만 비늘과 초록색 눈을 지닌 거대한 뱀의 몸통이 보였다.
“크르르르륵….”
그 뱀은 목에서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상처를 꿰뚫은 무기를 아멜리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율리시즈 오빠의 검이잖아?’
발현된 용의 피는 인간의 오감을 아득하게 초월하여, 아주 멀리 있는 물체라도 가까이서 보는 것처럼 상세히 관찰이 가능했다.
초월적인 시력으로 아멜리아는 뱀에게 상처를 낸 것이 율리시즈라는 걸 눈치챘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공주님!”
“잠깐만.”
시종이 허겁지겁 아멜리아를 대피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그것을 거부했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임시로 국정을 보는 자리를 넘기신 건, 바로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해서가 아닌가?”
“하오나…!”
“나는 황제 폐하의 하나뿐인 누이이자,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신하다. 그런 내가, 이 나라에 위기가 닥쳤는데도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해 숨어야 하겠나?”
아멜리아는 허리춤에 늘 매달려 있던 애검을 빼 들었다. 새파란 날이 반짝이며 두 가지 색의 머리칼을 지닌 아멜리아를 비췄다.
초록색과 황금색이 기묘하게 섞인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그렇게 살라고 내 오라버니에게 배운 적이 없네.”
“공주님!”
아멜리아가 창틀을 훌쩍 뛰어넘어 황궁을 막 부수려는 뱀에게로 달려갔다.
“나보다 황궁 내에 남은 사람들의 대피를 돕게! 특히 구금 중인 시녀장, 로라를 반드시 빠져나가게 하고!”
‘저 녀석은 내가 막아야 해!’
아멜리아가 처음 뱀을 봤을 때, 강적에게서나 느낄 법한 무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율리시즈 오빠가 상대하다 온 괴물이라면 내가 막아야만 해.’
망할 황제 폐하의 생사는 알 수 없었으나, 아멜리아는 무식하게 강한 그녀의 오빠이니 죽지 않았을 거라 믿기로 했다.
‘세진 님을 찾으러 갔잖아. 그 오빠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가서 세진 님을 찾아올 테니, 절대 죽었을 리가 없을 거야.’
그리고 대마법사인 세진을 믿어서이기도 했다.
그 둘이 쉽게 죽지 않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멜리아는 길게 도약해 순식간에 뱀의 앞으로 다가왔다.
“크르르륵… 크르륵!”
‘그 계집애는 어디 있지?’
때마침 뱀은 아멜리아의 행방을 찾아 황궁을 멋대로 부수려던 참이었다.
‘내가 힘을 되찾기만 하면 멸망시켜 버릴 나라야. 지금 화풀이용으로 파괴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크륵! 크르륵!”
뱀이 길쭉한 꼬리를 들어 아름다운 황궁, 그것도 세진과 율리시즈의 추억이 어린 황태자궁의 외벽을 내리치려는 때였다.
“멈춰! 이 뱀 새끼야!!!”
“!”
아멜리아가 고함을 내지르며 뱀에게 정면으로 몸통 박치기를 했다. 돌로도 깨지지 않을 뱀의 비늘이었건만, 용의 피가 특별하긴 한지 아멜리아의 박치기에 우드득, 하고 비늘 몇 개가 부서졌다.
물론, 내상도 톡톡히 들어가 뱀이 움찔하고 몇 발자국 물러났다.
“크르륵…!”
‘어딜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내게 상처를…!’
분노하던 뱀은 땅 위로 가볍게 착지한 인간을 보고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미친 뱀 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침입한 거냐! 당장 꺼져! 유리 오빠가 황궁 지키라고 부른 건데 너 때문에 나만 혼나게 생겼잖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작은 여성은 틀림없이 용의 피를 각성한 증거로 금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를 지녔다.
‘어설프게 각성한 저 머리 색과 눈 색. 확실하게 아멜리아 윈프리드로군.’
목표로 삼은 사냥감을 포착한 뱀은 망설이지 않고 아멜리아를 향해 쩍 입을 벌리며 돌진했다.
“크롸라라라락!”
‘한입에 삼켜 주마!’
뱀이 전속력으로 돌진했으나, 아멜리아는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코를 틀어막고 찡그리는 건 덤이었다.
“으악, 입 냄새! 더러워!”
‘뭔지는 몰라도 저 뱀, 나한테 집중하고 있네.’
아멜리아는 속으로 안심했다. 황궁 내의 사람들이 대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시간을 벌어 주는 게 중요했으니까.
율리시즈와 세진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아멜리아에게도 소중했다. 그녀의 목숨을 살려 주고 보살펴 준 둘에게 감사함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 아멜리아는 맞서 싸워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크르륵…!”
‘이 계집애! 가만두지 않겠다! 반드시 한입에 삼켜 뼈째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죽게 만들 것이야!’
아멜리아의 가벼운 도발에도 뱀은 쉽게 넘어갔다. 이미 율리시즈에게 큰 부상을 입어 이성을 챙기기 어려운 몸 상태인 것이 한몫했다.
우우웅. 거대한 검은 뱀의 주위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어어. 지능이 있는 뱀 새끼였어…? 마법을 쓰는 건 반칙 아니야?”
“크르르르륵.”
‘그 건방진 입과 사지부터 찢어 주마.’
이복동생이라고는 하나, 성장한 아멜리아는 율리시즈와 분위기가 똑 닮은 핏줄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뱀은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잘되었다.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를 닮았으니, 이 계집애를 죽여 삼키는 맛은 더 각별하겠구나.’
“크르륵!”
‘얌전히 내 먹이가 되어라!’
지직. 지지직. 검붉은 마법진에서 엄청난 양의 공격 마법이 뿜어져 나와 아멜리아에게 향했다.
“으윽…….”
웬만한 공격은 피하긴 했으나, 이번 것은 몇 개는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아멜리아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점점이 밀려온 살기 어린 공격 마법은 저주처럼 아멜리아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아프잖아, 이 자식들아!”
아멜리아가 몸에 달라붙은 성가신 마법 공격을 떼 내는 중이었다.
“헉!”
“아멜리아 공주 전하!”
“피하십시오!”
아멜리아의 명대로 몸을 피하던 황궁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오… 이러다 죽을 것 같은데…?”
헛웃음을 지으며 상공 위를 빼곡히 덮은 공격 마법을 보면서도, 아멜리아는 여유로웠다.
“그런데 우리 깐깐한 황제 폐하께서는, 내 죽음을 바라지 않을 사람인지라…!”
황금색 눈이 불타올랐다. 아멜리아가 검을 빼 들자, 황금색 검기가 그 위로 솟구쳤다.
“유학 가서 허투루 산 게 아니라서!”
아멜리아는 마치 바람처럼 쾌속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검으로 모든 공격 마법을 쳐 냈다.
“크르륵?!”
‘아니?!’
고작 반 정도밖에 각성하지 않은 반인반룡이라기엔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챙강. 챙강. 챙강.
뱀이 보낸 공격 마법을 쳐 낼수록, 아멜리아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건 선명한 황금색이었다.
“완전히 각성하게 된 거, 오라버니랑 대마법사님께 자랑하려고 꼭꼭 숨겨 놨던 거였는데…. 이딴 파충류 괴물 새끼한테 먼저 보여 주게 되다니. 어이가 없어서.”
‘뭐야?!’
“크르륵!”
아멜리아의 말에 화가 난 뱀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돌진했으나, 완전히 각성한 반인반룡은 그 공격을 쉽게 무시했다.
“메롱. 약 오르지? 하하!”
“크르르르르륵…!”
‘이 망할 계집애가!’
뱀은 아멜리아를 쫓아 사나운 송곳니를 놀렸으나, 잽싼 아멜리아는 공격을 피하며 황궁에서 조금씩 뱀을 떨어뜨려 놓았다.
‘후원으로 옮기는 게 나아. 이 뱀 새끼 때문에 행여나 황궁이 반파되기라도 하면, 그거 다 나라 예산으로 메꿔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필시 율리시즈가 아멜리아를 닦달할 테니, 어떻게든 이 사태를 넘겨야 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 더 무거운 사안이었다.
‘에슬라에서 검 수련을 게을리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벌하게 덤벼드는 거대한 괴물은 마주한 적이 없는 아멜리아였다.
검 자루를 쥔 손이 미약한 두려움으로 떨렸으나, 아멜리아는 용기를 냈다.
“덤벼, 이 뱀 새끼야!”
“크르르르륵…!”
바짝 독이 오른 뱀은 아멜리아의 계획대로 그녀를 쫓는 데 혈안이 되어 후원 쪽으로 이동했다.
‘이익! 왜 잡히질 않는 거야!’
뱀은 금방 잡아먹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아멜리아가 좀처럼 잡히질 않고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튀어 올라 소소한 공격만 남기니 짜증이 났다.
“크르륵! 크르르륵!”
“야, 성질나지? 나도 성질나. 에슬라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돌아오게 됐잖아!”
아멜리아는 휙휙 뱀의 공격을 피하며 어서 율리시즈와 세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거의 다 각성했다고는 해도, 내가 버틸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단 말이야…! 오라버니, 세진 님! 무사하다면 어서 와 줘요!’
아멜리아는 뱀과 처음 눈을 마주했을 때, 직감적으로 뱀이 더 강하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요리조리 피하는 수법을 사용하여 버티고는 있었지만, 언제 힘에 부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크르르륵!”
뱀의 헛발질이 이어지던 가운데, 아멜리아가 발을 삐끗하자 그 틈새를 노리고 뱀이 꼬리로 그녀를 감아올렸다.
“으악! 이거 놔라, 이 뱀 새끼야!”
“크르륵.”
‘이제 포식할 시간이구나. 널 잡아먹고 다시 몸을 회복해 그 두 놈을 죽이러 가마.’
뱀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한입에 아멜리아를 삼키려던 때였다.
“[꿰뚫어라.]”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강철 송곳의 비가 내려 뱀의 몸뚱어리를 덮쳤다.
“끼아아아악…!”
뱀은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으앗!”
그 바람에 아멜리아가 꼬리에서 풀려났지만,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괜찮아?”
“율리시즈 오빠!”
아멜리아를 받은 건 율리시즈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반가움과 무사하다는 기쁨에, 아멜리아는 괜히 성질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