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한때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았던 뱀은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이런 치욕을 겪다니…!’
내가, 신이 될 뻔했던 이 내가!
뱀의 입가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끊일 틈 없이 들렸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는 상처 입은 목 쪽에서도 새어 나왔다.
‘젠장…! 그 빌어먹을 애송이 따위에게 내가!’
율리시즈가 검을 꽂은 목에서는 진득한 검은 피가 줄줄 흘렀다.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봤으나, 회복을 시도하면 도리어 그 자리에서 더욱 썩은 내를 풍기며 피고름을 흘렸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나, 검을 매개로 흘려보낸 용의 힘이 뱀의 회복을 방해하고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뱀에게는 절망적이게도, 그 힘은 독처럼 뱀의 몸에 속속들이 퍼져 나가 자가 치유를 방해하는 중이었다.
“끄르르르륵….”
‘회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도망치기 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 둔 힘으로 자가 치유를 시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율리시즈를 습격하는 데 성공해 그 힘을 일부나마 빨아들인 것 또한.
그것마저도 없었다면 지금쯤 뱀은 볼썽사납게 숨이 끊어져 아무 땅바닥에서나 구르고 있을 터였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가 되었으나, 욕심 많은 뱀은 거기에 만족할 존재가 아니었다.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을 것이다!’
몇 번이고 죽여 본 상대였다. 그래서 우습게 여겼다. 수만 번의 회귀 동안 뱀에게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기에, 이번에도 율리시즈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거라 뱀은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것은 완벽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내가 나락 속에 빠져 도망치는 신세나 되었단 말인가?
무거운 몸을 질질 이끌고 기어가며, 뱀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계획에 차질 따위는 없었다. 옛날 옛적에 내다 버린 제 쌍둥이의 혼을 찾아 원래의 세계에, 뱀이 수만 번의 회귀 동안 과도하게 사용한 본래의 육신에 데려다 놓는 것부터가 순조로웠다.
멍청하게도 그 쌍둥이는 죽음을 바라고 있어 일이 쉬웠다. 대충 지어낸 핑곗거리에도 하는 수 없이 끌려와 준 걸 보면 그랬다.
‘큰 수고를 들일 것도 없이 저주를 건 채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겠군.’
그건 뱀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제 쌍둥이의 육신을, 신이 그에게 선물했던 강대한 힘을 모두 남김없이 앗아 간 이후에도 그는 뱀에게 거슬리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 이유는 율리시즈 때문이었다.
-왜 나를 바라보지 않아? 내가 너의 짝이란 말이야!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너의 운명이라고!
-…너는 내가 찾던 그 사람이 아니야. 가짜 주제에 진짜를 흉내 내어 나를 현혹하려 하지 마라.
본디 율리시즈의 짝이어야 했던, 제 영혼의 쌍둥이가 가질 모든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건 뱀인데도 율리시즈는 뱀에게 마음 한 자락 내주지 않았다.
뱀은 욕심이 많아 자신이 삼켜 버린 이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어 했다. 육체와 누렸어야 할 운명, 힘까지 꾸역꾸역 먹어 치웠는데도 허기진 뱀의 위장은 채워질 겨를이 없었다.
초월자를 다 집어삼켜도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마음의 허전함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나 강해졌는데, 왜 만족스럽지가 않지?
회귀를 반복하며 그 해답을 찾던 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회귀 때마다 그에게 진짜 자신의 짝이 어디 있는지를 추궁하는 율리시즈였다.
-진짜 내 연인을 돌려줘.
율리시즈는 뱀이 가볍게 거는 수작에도, 진지함을 가장한 유혹에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럴수록 뱀을 꺼림칙하게 여기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세진을 간절히 찾아 헤맸다.
그 모습을 보며 뱀은 뒤틀린 소망을 갖게 되었다.
‘아… 저렇게 끈질긴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되면 나의 공허한 마음도 채워지지 않을까?’
왜. 내가 내 쌍둥이의 육신과 힘을 이미 가졌으니, 맺어져야 할 영혼의 짝도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다른 차원에 던져 놓은 내 쌍둥이야 이제 그저 그런 불행한 인간 따위에 불과하니, 내가 진짜야!
저렇게 끈질긴 인간의 사랑마저 가지면 허하던 마음이 꽉 채워질까 싶었다.
하지만 사랑받는 일만큼은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마땅히 가졌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고서 내게 역겹게 사랑을 갈구하지 마.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는 공고히 쌓은 요새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뱀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외면했으며, 뱀의 유혹을 전부 거절했다.
시간을 몇 번을 돌려도 율리시즈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과 내가 이어질 일은 없어.
-왜! 어째서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뭐가 부족하냐니. 남의 것으로 치장한 무뢰배를 사랑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 봐도, 제 쌍둥이의 흉내를 내려고 해도 율리시즈는 귀신같이 뱀이 사악하고 거짓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내 뱀에게 맞서 싸우다 죽어 버렸다.
-한 번도 본 적도 없는데 그리운 사람… 당신은 대체 어디에 있나요. 보고 싶어요.
유언으로 그따위 말이나 남기면서.
율리시즈가 세진을 갈망하며 처참하게 죽을 때마다, 뱀의 속에는 울화가 얹혔다.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접근했던 것이 점점 질투와 열등감이 뒤섞여 집착으로 변했다.
그래서 율리시즈를 철저히 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움직인 결과가 이거였는데…….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거지?’
치이익. 목에 꽂힌 검에서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사악한 뱀의 몸뚱어리를 용의 힘이 정화하며 태우는 냄새였다.
“크르륵…!”
신음 소리를 내며 뱀은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검 자루에 닿는 순간 피부가 불에 타듯이 일그러졌다.
“크아악!”
‘어째서 나는 안 되는 거였는데……?’
타들어 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뱀은 여기저기로 공간을 이동했다.
‘도망,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수만 번의 회귀 동안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으로서 일국의 황제 못지않은 부귀영화를 누린 뱀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빈털터리 신세나 다름없었다.
뱀은 이제 더는 대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드의 이름으로 출입할 수 있던 수많은 은신처들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은신처들의 출입문은 주인의 마력으로만 입장이 가능했기에, 진짜 클로드 하센티온이 돌아온 이상 뱀이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뱀은 어지러운 정신으로 간신히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이동했다.
손쉽게 세진과 율리시즈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장담했던 데다가, 다른 차원에서 노닐다 온 몸이었기에 가지고 있는 재산도 없었다.
‘살아남고 싶어.’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그런데 어디로 도망쳐야 목숨을 건지지?’
후일을 도모하고 싶어도 다친 뱀을 품어 줄 안전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 세계에 발 디딜 땅은 없는 것처럼 느껴져 뱀은 공포에 휩싸였다.
“끄륵… 끄르륵….”
목의 상처로부터 검은 피가 뚝뚝 흘렀다. 치유가 불가하니 상처는 더 깊어졌고 그 상처로부터 빠져나가는 힘도 점점 양이 늘어 갔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면 죽는다.
죽음의 공포가 전신을 뒤덮자 뱀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날벌레를 죽이듯 쉽게 생명을 거뒀던 이들의 모습이 눈에 스치며, 자신도 곧 그리될 수도 있을 거란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를 쳤다.
“끄륵… 끄르륵…!”
‘싫어! 죽기 싫어!’
비참하게 죽기 싫은 뱀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세진과 율리시즈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 거머리 같은 놈들이 다시 살아나 추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시가 시급했다.
‘내가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한 개체… 하지만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여야만 해. 소화만 된다면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어…!’
아.
하나 있었다.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의 이복 여동생, 아멜리아가.
그 계집애는 사라진 대부분의 시간선에서 어미에게 버림받고 핏덩어리 처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죽는 결말을 맞았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멜리아, 그 계집이 율리시즈보다 빠르게 용의 피를 각성했지…?’
츄릅.
뱀이 입맛을 다셨다. 두 갈래로 갈라진 선홍색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용의 피를 각성한 반인반룡. 하지만 어설프게 각성해 율리시즈보다는 약하다.’
궁지에 몰린 이 상황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사냥감이 아니던가?
‘하하! 율리시즈! 너는 이번에도 패배할 모양인가 보구나.’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어도, 내게 축복을 빼앗기니 또 실패하는 운명으로 처박히는구나!
검은 비늘로 뒤덮인 뱀의 몸뚱어리가 스르륵 빠르게 움직였다. 목적지는 윈프리드 제국의 황궁이었다.
‘율리시즈가 세진을 구하기 위해 핵심 전력이 되는 병사들은 이미 빼 왔다. 내가 부상을 입었어도, 고작 그저 그런 인간들 따위에게 지지는 않아!’
거치적거리는 인간들이야 꼬리 짓을 하건, 머리로 들이받건 해서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아멜리아! 고것을 잡아먹어 이 위기를 타개하겠다!’
사냥감을 정한 뱀이 빠르게 공간이동 마법을 중첩해서 사용해 윈프리드 황궁으로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뱀은 황궁 위로 떨어졌다.
쿠웅-
“으악!”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지진인가?”
“아, 아니야…. 바, 밖에 저길 봐!”
“세상에, 저게 뭐야?”
“거대한 뱀…?”
황궁에 있던 사람들은 흉물스러운 뱀의 등장에 경악하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물론, 그 소식은 급하게 귀국하여 오빠 대신 정무를 보고 있던 아멜리아에게도 전해졌다.
“큰일입니다, 아멜리아 공주 전하!”